본문 바로가기

경화동3

『진해』(1912) - 28. 옛날과 지금, 29. 안락경(安樂境) 28. 옛날과 지금(古今) 진해의 고금은 소생이 말할 필요 없이 토지 그 자체가 말하고 있다. 토지에 부수하는 건축물이 말하며 사람이 말하고 있다. 특별히 고금이란 항목을 지어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 줄 안다. 새로 발전하고 있는 곳이라 모든 것이 생생하다. 현재의 건축물과 인간을 제외하고 자연을 상기한다면 진해의 옛적을 알 수가 있을 터이며 지금은 보는 대로 들은 대로이다. 지금 즉 현재에 관해서는 건축물과 인간이 다 말하고 있다. 사람의 변전을 반영해 '사흘 안보는 사이에 피는 벚꽃'이라는 비유가 있듯이 토지에도 '시골이 서울이 된다.'는 일이 있다. 진해는 소위 시골이 서울이 된 격이다. 다만 그 변하는 속도가 아주 빠르다는 점이 딴 데와 다르며 그 다르다는 점이 새롭고 그리고 생생하다는 것을 역사가.. 2025. 5. 5.
중평들판의 팽나무 이 글은 1월 30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된 것이다. 1200백 년 까마득한 세월, 해상왕 장보고가 서해를 호령하던 때. 그 아득한 시간 언젠가 중평이라 불렀던 들판에 팽나무 한 그루가 섰다. 그로부터 1000년도 더 지난 20세기 벽두, 동아시아 해상 장악을 꿈꾼 일제는 해군기지와 함께 그곳 중평들판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창원시 진해구의 '구도심' 혹은 '서부지역'이라 불리는 곳이다. 11개 마을의 390가구, 2000여 주민이 신도시건설로 쫓겨났다. 청천벽력, 하루아침에 땅 빼앗기고 집 헐리고 내동댕이쳐졌으니 그런 목불인견이 없었다. 이를 두고 매천 황현은 '왜인이 늑탈하여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다'고 한탄했다. 저항이 없지 않았지만 이미 일본인 세상이라 버틸 수.. 2023. 2. 1.
아! 경화동,,, 100여년 전, 일본군부에 의해 강제로 조성된 진해신도시는 식민지 시대 여느 도시처럼 기존 시가지에 일본인이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해안·비옥한 농토와 함께 평화롭게 살던 마을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뒤에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한국인들의 신도시 ‘경화동’이라는 음지가 있었습니다. 진해 현지조사단이 해군대신 재등실(齋藤實) 앞으로 보낸 ‘진해군항시설지 실지답사보고서’라는 서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수부·공창·수뢰단·화약고·대포발사장·병원·연병장·관사·시가·정차장·묘지·학교 등 제반시설의 위치와 규모를 결정하고 그 이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보고서 끝에 「실지조사를 바탕으로 각 조사원의 소견이 일치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라며 6개 항을 붙여 놓.. 2011.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