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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한가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강점 제1시기에 시행된 매립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봉암동과 남성동 두 번의 매립 밖에 없었습니다.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최초 매립>

매립이 시작되기 전, 마산의 해안에는 70m에서 200m에 이르는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봉암동, 현 마산자유무역지역에는 최고 1㎞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지도 중 마산만의 수심이 나타나 있는 것들을 보면 봉암 지역의 넓은 간석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연두색으로 표시된 지역으로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입니다.


이런 간석지는 당시 마산포 주변의 주민들에게는 해산물을 제공하는 보고(寶庫)였지만 일제의 눈에는 얕은 수심이 경제적으로 매력 있는 매립 대상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합방 직 후 곧장 매립공사가 있었습니다.
합방 후 최초의 마산 앞바다 매립인 셈입니다.

사실 이 봉암동 간석지 매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1916년 일본육지측량부에서 측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1 / 50,000 지도에 최초로 매립되어 있는 것이 나타날 뿐인데 매립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도 없었습니다.
바로 다음 지도입니다.

 
이 지도 만으로는
매립 시기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것, 1916년 지도에 나타나니 1910년대 초반이었지 않나? 정도 밖에 추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16년 발행된 1 / 50,000 도면에 나타나는데 지도제작 기간을 고려해보면 1910년대 초반에 매립했을 것이다.
㉯ 도면상 일부는 논으로 이미 표기가 되어 있고 일부는 호안표시는 있지만 아직 논표시가 없는 것으로보아 매립이 진행 중이다. 인력으로 공사를 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공사를 시작한지는 꽤 오래되었을 것이다.
바다 매립은 완공 직후부터 곧 바로 논으로 사용하기가 곤란하다.
㉱ 동척마산출장소가 1909년10월 6일 개설되었다.
㉲ 간석지 매립은 그 주변일대에 사는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을 것이어서 일사천리로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추론을 근거로 한일합방 직후에 바로 매립을 시작하여 1913년-1915년 사이에 이 정도로 공사가 진척되었던 것 아닌가 하는 겁니다.

면적은 지도 비교에서 확인한 결과 약 9만여 평이었으며 위치는 양덕천․산호천․삼호천 하구(河口)입니다.

이 매립지의 영역을 가장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1947년 미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입니다.
진작 매립이 끝나 농토로 변했습니다.

이 지역의 현 위성사진입니다.


오래동안 봉암동에서 거주했던 분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이후 봉암동 지역에서는 이 매립지를 '청수둑안'이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매립지는 일본인 '청수'의 소유였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에
신마산 지역에서는 매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10년대에도 마산의 해안매립에 눈독을 들이는 일본 자본가들은 있었습니다.
『매일신문』 1919년 6월 11일자 기사에서 '마산만 매립을 구상하고 있다'는 기사 때문입니다.
현대문으로 약간 바꾸었습니다.

馬山 本町 1丁目에서 同 3丁目에 이르는 海面을 埋築하기로 計劃을 세우고 東京 某 實業家가 不日 技師를 派遣하여 實測을 하고 當局에 出願할 것인데 該 海面埋築의 目的은 五州輕鐵 開通 後 馬山을 豫想한 것인데 同 埋立地에 家屋 及 倉庫를 建築하야 一般의 要求에 應하고자 한다더라

 본정 1정목에서 3정목은 현재의 월남동1가에서 3가 까지를 말하는 것인데 이 지역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인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 두 사람이 매립한 위치와 꼭 같습니다.
기사에 나오는 동경의 모 실업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이 기사의 매립추진계획이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의 매립과 이어진 것인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시기(1910년대)에 이미 마산만의 상업용 매립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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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객주들이 마산포 상권지켜>

1910년대 마산의 시가(市街)는 마산포라 불렀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도시 신마산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마산포는 우천이 아니면 어느 때라도 사람들로 붐볐으며 특히 5․10일 장에는 전(全) 지역이 혼잡할 만큼 사람의 왕래와 상거래가 많았습니다.

산업은 상업이 주(主)였고 다음은 어업이었으며 공업은 아직 초보적 단계였습니다. 1911년이 되어서야 종래 재래식 디딜방아뿐이었던 원마산에 일본인 하목철삼(夏目哲三)이 발동기를 이용하는 정미소를 설립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한와사(瓦斯, 가스)전기주식회사 마산지점이 1911년 3월 16일에 설치 허가되어 중앙동 전 마산시청자리에 발전소를 건립, 같은 해 5월 23일 최초로 전기를 송출한 것을 비롯하여 도시의 변화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최초로 전깃불을 생산한 기념으로 옛 마산시청 뒷마당에 세워 놓은 ‘전기불터’ 기념비 사진입니다.

 


금융기관으로는 1905년 제일은행 마산출장소로 시작하여 1907년 월남동(지금의 월남동 천주교회자리)에 신축 건물로 이전한 조선은행 마산출장소 및 경상농공은행 마산지점이 남성동(현 제일은행 자리, 후에 조선식산은행으로 합병)에 있었고 마산금융주식회사․마산지방금융조합․동척출장소 금융부와 민간 대금업자(貸金業者)도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던 조선식산은행마산지점입니다. 1918년에 지었습니다. 뒤에 무학산과 학봉이 보입니다.


다음 두 사진은 1911년 발간된 『마산과 진해만』에 수록된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마산지점과 경상농공은행마산지점의 광고입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대부분의 동종업자들이 끼리끼리 공동의 이익을 위해 조합을 구성하여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조합종류도 곡물상조합․여관조합․주조(酒造)조합에서 이발업조합․농사(農事)조합․고물상조합 등 모두 16업종으로 다양했습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뒤에도 마산의 한국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상권을 지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이 그들 스스로 개발한 신마산의 상권을 쥐고 있었던 반면, 한국인 자본가들은 원마산 어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어시장 객주였습니다.
원마산 어시장은 상인들의 공유재산과 같은 것이어서 원마산 주민의 절반 이상이 어시장 덕에 생계를 꾸려 갔다고 할 만큼 비중이 큰 시장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인들의 침탈 기도를 뿌리치고 어시장 상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이래 유지되어 온 객주제도 덕분이었습니다.
객주들은 계 조직을 통해 일본 자본가는 물론 다른 지역의 자본 침투도 굳게 막았습니다.
그런가하면 객주들의 계 조직은 이후 상민조합, 합포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산지역 한국인 자본가의 구심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저축조합까지 운영하면서 상권을 유지 강화하였고, 운송업에도 진출하여 역전의 화물운송업을 차지해 곡물무역업(주로 미곡)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진행된 꾸준한 자본축적이 3․1운동 후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자 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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