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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2.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7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10) "진짜 본토박이" ------------------------- 배○○

1941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04-2

날짜 : 2015년 1월 16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얘기부터 기억나시는대로 좀 해 주시지요.

= 바로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자랐지요. 6.25전쟁이 났을 때 내가 아홉 살 먹었는데 진해 웅천으로 피난을 갔거든요. 회원국민학교 입학 하고는 바로 피난을 갔어요.

거기로 피난 갔다가 석달만에 돌아왔어요. 그때는 여기가 전부 초가집이고 완전히 농촌이었지요. 농사 짓고 닭 키우고 소 키우고 완전히 농촌이었지요.

그래 기억나는 게... 군인들이 논에 엎드려 숨어 있고... 우리가 수류탄도 줍고 그랬거든요. 무엇인가 싶어서 주워보면 조그마한 단지처럼 생겼는데 그걸 도랑에 돌멩이 사이에 끼워놓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때 여기 미군들이 많았어요. 처녀들은 밖으로 못댕겼어요. 미군들이 건딜려고 해서... 그래서 우리 언니들도 막 숨겨놓고 그랬어요.

- 어릴 때 여기 사실 때는 이 동네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저 위 골짜기에도 마을이 있었지요?

= 여기는 그냥 회원동이라고 했어요. 저 앤지밭골 골짜기 거기는 전부 농촌이고 사는 사람도 스무남 집 정도 될까? 사람이 많이 안살았어요. 앤지밭골은 우리 아주 조그만 할 때부터 앤지밭골이라 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네요. 앤지밭골에서 내려오다 보면 중간에 못이 있었거든요.

그 주변이 다 논인데 논 중간에 언덕이 있고 그 옆에 못이 있었는데 애 하나가 빠져죽고 난 뒤 그 못을 없앴버렸어요. 그게 언젠지 모르겠는데... 거기서 조금더 내려오면 거기가 못산이거든요. 그런데 못이 가운데 있으니까 못산인가 싶기도 하네요. 옛날에 못산쌀가게가 있었는데 없어진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앤지밭골 밑 동네가 못산마을이고 그 다음이 우리 마을인데 이 마을은 그냥 회원동이라 했어요. 사람은 못산에 많이 살았고 앤지밭골에는 별로 많이 안살았어요.

- 지금 이 동네 안에서 제일 오래된 집은 어느 집입니까? 옛날에는 다 초가집이었지요?

= 주변이 다 논밭이고 집들은 다 초가집인데 어쩌다가 기와집 하나 있고... 초가가 점점 없어지고 쓰레트로 바뀌었다가 쓰레트 없어지고 슬라브 올리고 그랬어요.

우리 이 집도 옛날에 조그만 기와집이었어요. 지금 집들이 다 오래됐지요. 아직도 집이 옛날 그대로이지요. 요 앞에 골목도 옛날 그대로고 입니다. 내나 우리 쪼깬을 때 그 골목이고... 집도 다 농사 지어 묵던 집 그대로 이지요. 조금씩 수리해서 살다가 재개발 한다는 소리 듣고 수리도 안하고 그대로 살다보니 옛날 그 집 그대로 입니다.

물새는 집도 있고... 얄굿습니다. 요 밑에 골목으로 조금 가면 옛날에 풍수하던 사람 집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씨라서 이풍수라고 불렀어요. 사람도 죽고 다 어디로 가버리고 지금은 빈집입니다.

또 그 골목 끝에 돌깨는 돌쟁이 집이 있었는데 집도 뜯겨나가고 빈터 뿐입니다. 옛날에 이 동네에는 송씨, 허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다 어디로 가고 없어요.

- 앞에 이 골목이 거의 동네 한가운데 있는데 옛날에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내나 골목이지요. 우에 골목, 아래 골목... 어른들이 그리 부르대요. 여기 우리 집 있는 데는 아래골목이고, 우에 골목은 연탄집 위에 있는 거기가 우에 골목이고... 그리고 동네 골목, 여기가 또랑인데 지금은 복개를 안보이지만 개울이지요.

지금은 다 덮어놔서 안보이지만 또랑 따라서 공동새미가 졸졸하이 네 개나 있었어요.

- 그럼 지금 회원천이라 부르는 저 하천은 어릴 때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큰또랑이라고 했지요. 우리 동네 여기는 작은 또랑이라고 하고... 작은 또랑은 지금 복개를 해서 덮어놨지만 지금도 그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요.

옛날에 우리가 빨래 하러 큰또랑 갔다 아닙니까. 큰또랑 가면 물이 펑펑 내려오니까 거기 앉아서 빨래 하고 그랬지요.

- 예. 물이 깨끗했겠네요?

= 옛날에는 앤지밭골에 마을이 있어도 더러운 거는 논으로 다 갔지 또랑으로 꾸중물 내려오고 그런 거는 없었거든요.

물이 맑았어요. 무학산 물이 참 좋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해요. 똥물보다 더 더러워서... 비 좀 왔다 하면 다리가 떠내려 갈 정도로 여기에 물이 많았어요.

물이 깨끗할 때는 송사리 같은 조그만 물고기도 있었고 가재도 있었고 고동도 있었어요. 새까맣고 쪼깬 고동... 삶아서 꼬리 끊어 빨아 먹던 그 고동도 있었는데...

- 그러면 서원골 쪽으로는 빨래 하러 안갔습니까?

= 갔지요. 거기 가면 나무 주워와서 불 피우고... 옛날에는 다 알미늄 니무 대아거든요. 그 대야로 빨래 삶아 가지고 깨끗하게 빨아서 큰 바우에 널어놓고 냄비에다가 밥 해 먹고 놀고... 그랬다 아닙니까.

하하 재미 있었지요. 여기 큰또랑은 빨래를 해도 빨래 널 큰 바우 같은 게 없거든요. 거기는 우리가 놀기삼아 어불리서 갔다 아닙니까. 하하 그때가 좋았어요.

- 또랑 건너 둥구나무(아래 사진) 있는 데는 옛날에는 어땠습니까?

= 우리 쪼매할 때부터 있던 정지나무가 지금까지 있는 겁니다. 정지나무 원 둥치는 죽고 옆 가지가 살아있거든요. 누구든지 회원동 정지나무라 하면 다 찾아왔어요. 택시도 알고 전부가 다 알았어요.

어릴 때 보면 큰 정지나무가 있는데 노인네들이 거기 누워자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또 옛날 노인네들이 거기서 제 지내고 그랬거든요. 깨끗한 사람이 제를 지내야 되거든요.

부정 타면 안된다고 상주도 못보고 아무도 못봐요. 그런데 지금은 제도 없고... 옛날 노인들 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술꾼들, 노름쟁이들만 모이쌌대요.

- 아, 거기서 제를, 그러니까 동제를 지냈다고요? 그럼 동제를 언제 지냈습니까? 정월에?

= 그때가 우리 처녀 시절인데... 그때가... 정월에 안지내고 가을이든가? 춥도 덥도 안할 때니까 가을입니다.

정월하고 팔월에는 안했어요. 동네에서 그 나무가 전통있는 나무라고 해서 거기다 오만 거 다 차려놓고...

 

 

- 제를 아주 크게 지냈던 모양이죠? 언제까지 제를 지냈습니까?

= 옛날 노인네들이 크게 지냈지요. 상주거나 추접은 사람은 부정탄다고 거기에 못가고... 회원 마을 사람은 다 모였으니까 큰 행사였지요.

떡도 하고 돼지도 잡아서 동네에 다 갈라먹고 그랬어요. 건구도 치고... 제 안지낸지가 삼십년도 넘었것 같네요. 내가 의령으로 시집 갔다가 보리 숭년지고 난 뒤 여기로 다시 이사를 왔는데 그때까지도 제를 지내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열아홉살에 시집을 의령으로 갔다가 스물두살에 여기 내려왔어요. 신랑은 군에 가버리고 아들 하나 낳아가지고 보리숭년이 져서 여기 내려왔는데 그때까지 제를 지내더라고요.

내가 스물세살까지... 지금 내가 칠십네 살이니까 한 사십일 년이나 이 년 되는가 보네요. 노인들이 차차 돌아가시니까 누가 할 겁니까? 할 사람이 없는데... 옛날 노인들이 돌아가시고 나니 할 사람이 없어요.

- 당시에 이 마을에는 사람이 얼마나 살았습니까?

= 어릴 때 이 동네에는 많이 살았지요. 또랑 건너 하고 합하면 한 백 집?

이 동네만 해도 지금 있는 것만 백 집 되지요. 회원동 마을이 크거든요. 저 건너편에는 일본놈 말 키우는 창고가 있었는데 거기가 새한아파트 됐어요.

- 거기 창고는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 소 키우는 것처럼 일본놈들 말을 쭉 매어놓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말 지켜주고 말 밥 먹여주고 그랬다고 하대요. 그 한참 뒤에 말 창고 뜯은 그 자리에 새한아파트가 들어섰어요.

- 이 동네에 당시에 절은 없었습니까?

= 우리 쪼맨할 때는 돌산이라 하는 데에... 돌산이 교방동에 들어가는데, 저 위에 육일약국 있지요? 그 건너편부터 주공아파트 그 위로는 돌산이라 했어요. 돌이 많다고 돌산이라 했어요.

그 돌산에 절이 하나 있었어요. 지금까지 있는데 절 이름이 잘 생각이 안나네요. 옛날에는 절에 간다 하면 돌산 절에 가고 그랬지요.

- 옛날에는 동네마다 조그만 공장이 많았지 않습니까?

= 또랑가 둥구나무 밑 쪽에 작은 장갑 공장이 있었고 또 바로 밑 교원동에 우피 공장이 있었어요. 소가죽을 벗겨서 그 껍데기를 고아가지고 부리풀 만들었어요.

그걸 부리풀이라 하든데 그게 고무신 만드는 공장에도 가고 또 어디에도 가고... 그걸 또 녹여서...

- 그러니까 부리풀은 아교를 말하는 거군요? 접착제로 쓴 거지요?

= 소가죽을 가져오면 그 속살은 삶아먹기도 하고 그랬지요.

제비산 밑에 도치막이 있었어요. 또 우리 동네에 정미소는 또랑가 정자나무 밑에 있었어요. 우리 처녀 땐데 거기 하던 사람이 배씨라서 배씨 정미소라 그랬어요.

둥구나무 바로 밑에 다리 딱 건너면 거기 있었는데... 그럴 때 미군들이 많았어요.

- 그럼 그 당시가 전쟁 때이군요. 정미소, 장갑공장, 우피공장...

= 그리고 방장 공장이 있었어요. 요 앞에 작은 또랑 건너가 교원동인데 거기에 있었지요.

그때 우리가 열여섯 살, 열일곱 살 먹었을 처녀 시절인데, 거기서 방장도 만들고 마스크, 손수건도 만들고 이랬어요. 그 공장 했던 사장이 이만열이란 사람입니다.

또 그때는 일본 있다 나온 사람들이 요꼬를 많이 하대요. 우리 집에서도 방을 세 놓으니까 그 작은 방 사람이 요꼬를 짜더라고요. 그때 가정집에서도 기계 하나 가지고 요꼬 짜고 많이 그랬어요.

- 옛날에 이 근방에서 국화도 많이 키웠지요?

= 하우스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리고 저 위에 무학농장이라고 있었는데 포도, 배, 복숭 이런 거 하던 농장인데 마산에서 최고로 큰 농장이었지요. 과일나무가 있고 그 농장 안에 여관도 있고 하니까 사람들이 놀러 많이 갔지요.

해치 하면 농장 안에 가서 하고... 그 농장 주인이 말을 타고 내려오면 동네가 딸깍딸깍 했구마는...

- 농장 주인 성씨가 뭐였습니까?

= 천씨였는데 회원동에서 최고로 부자였어요. 농장에서 말 타고 내려오면 동네가 들썩들썩 했지요.

영감쟁이가 멋이 있었는데... 그 뒤에 한일합섬에서 사서 소도 키우고 짐승도 키우고 그러다가 한일합섬에서 또 어디 팔았다고 하던데... 몇손을 넘어간 모양이더라고요.

- 그럼 무학농장은 언제 생긴 것 같습니까?

= 우리 쪼맨 했을 때도 있었으니까 오래 됐을 거예요.

우리 오빠가 살아 계시면 팔십네 살인데 오빠가 그 농장에 댕기고 할 때 우리가 쪼맨했으니까요. 농장이 한 마을을 다 차지해 있을 정도로 큽니다. 지금도 젖소 키우고, 오리 식당, 닭백숙 식당도 있고 그렇습니다.

- 어릴 때는 밑에 시장이 없었겠네요?

= 옛날에는 시장 한번 가려면 부림시장까지 가야 되는데, 다라이 이고 갔다오면 멀었지요. 그전에는 회원동 전체에 시장이 없었어요. 시장이라고는 부림시장 밖에 없었지요.

어시장은 멀다고 잘 안가고... 북마산역 앞에 쌀장사들이 좀 있었고 그 건너편에 소전걸이 있었고... 한참 뒤에 북마산 중앙시장 들어서고 또 철길 있는 데도 시장이 생겼는데 장사가 최고 잘 된단다고 그래요.

부림시장은 죽었는데 여기는 아파트 들어오고 사람이 많이 끓으니까요.

- 그리고 이 동네는 큰 부자집이 있다든지 그런 것도 없이 다 비슷한 형편이었던 모양입니다.

= 우리 어릴 때야 다 농사 짓고 사니까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이 부자인데... 비슷비슷 했지요.

그중에서 좀 많이 지은 집이 송씨 집이었어요. 큰 집, 작은 집, 졸졸하이 집을 지어 살았는데 송씨 부자집이라 했거든요.

- 그러면 그 송씨들이 지금도 살고 있습니까?

= 옛날에 좀 부자로 살면 애들이 대학까지 나와서 다 서울로 어디로 가버리니까... 집 팔고 터값만 받아먹고 다 떠났지요. 옛날 부모들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 그럼 이 동네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집은 어느 집입니까? 동네는 얼마나 오래 됐다고 들었습니까?

= 얼마나 오래 됐는지 모르지요. 내 알기만 해도 백 년이 넘는데 몇백년 됐는지는 알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삼대 사대 그렇게 오래 산 집은 없어요. 옛날 사람들은 전부다 동네 떠나고 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 옛날 농사 짓던 헌집을 사서 들어온 사람들이지요. 이 동네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이... 나 하고 바로 이 밑에 사는 내 친구, 이미숙이라고 있는데 그 친구도 토백이입니다.

바로 옆에 살아도 동으로는 그 친구는 교원동이고 나는 회원동입니다. 그리고 노원호 씨라고 내하고 두 살 차이인데 동네서 같이 자란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나 하고 내 친구 하나 하고 세 사람이 토백이이네요. 나머지는 전부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뭐 말 한마디 하면, 토백이값한다, 이럽니다. 하하하.

이 동네 완전 본토박이는 세 사람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사 가고 없어요.

- 예. 말그대로 진짜 본토백이군요. 그러면 부모님들은 뭘 하셨습니까?

= 내나 농사 지었죠. 우리 아버지 고향은 밀양이고 분성 배씨인데 우리 어머니는 진양 강씨이고요.

우리 형제가 오빠가 다섯 명이고 내 위로 언니 다섯 명, 내 밑에 여동생 남동생 있제 하니까 열 명도 넘었어요. 옛날에는 생기는대로 낳으니까 열 명도 넘었는데 인자 다 돌아가시고, 언니 하나, 내 밑에 동생 둘 뿐입니다.

- 이 동네서 나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데 재개발 한다니까 마음이 어떠십니까?

= 재개발 되면 어쩌겠어요. 돈 쪼매 내주면 가도오도 못할 건데... 요새는 일억오천은 줘야 조그만 집이라도 산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재개발 되면 전부 촌에 터 사서 집 지어서 간다고 하고, 여기 아파트 들어와 살 사람이 거의 없어요.

지금 여기는 전부 늙은 사람 뿐이지 젊은 사람 없거든요. 젊은 사람은 다 나가 있고 나이 많은 사람들 밖이거든요. 지금 우리 동네 이 근처에 집이 일곱 채가 비어 있어요.

터 값만 삼천만 원 받은 집도 있고 사천만 원, 육천만 원 받은 집도 있지만 빙돌아 다 비어 있습니다. 덕방 하는 사람들이 사가지고 아파트 들어서면 팔려고 하다가 팔년이나 구년이나 썩히고 있는 데도 있어요.

재개발 되면 할 수 없지. 어디로 가게 될런가, 어찌 될런가... 앤지밭골로 가 터를 좀 사서 집 지으려고 해도 터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엄두도 내기 힘들어요.

앤지밭골이 큰 도시가 됐어요. 옛날에는 앤지밭골이 골짜기였는데 지금은 절이 두 개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양옥집을 지어 놓고 잘 돼어 있더라고요. 거기는 공기 좋고 물도 좋고 해서 살아보고 싶은 곳인데 잘 될런가 모르겠어요.<<<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모두 27회 포스팅했다. 이 편이 마지막이다.

 

 

Trackback 0 Comment 2
  1. ha 2021.04.06 16:39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푹 빠져서 27편까지 내리 봤네요^^
    제가 사는곳의 역사를 읽으니 너무 흥미롭고 재밋었습니다~~

  2. 허정도 2021.04.07 13:56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 분이시군요, 방문 감사합니다~~

2021. 1. 11.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2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5) "서민들 사는 보통 동네에서의 조용한 기쁨" ------------------------- 최○○

1936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1-5

날짜 : 2015년 1월 7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저기 걸린 액자는 좀 특이하군요?

= 저건 내가 우체국장 하다가 정년퇴직 했더니 누가 기념으로 준 겁니다.

청춘은 결코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다 마음의 상태이다는, 이 말은 젊다고 청춘이 아니고 늙어도 마음만 먹고 있으면 청춘이다는 뜻입니다.

정년퇴직 하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라는 뜻에서 내한테 준 것입니다.

- 예. 보통 동양고전에서 좋은 말을 가져와서 액자를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서양 사람 이름이 적혀 있네요?

= 그렇지요. 사무엘 울만이 유명한 사람은 아닌데 저런 말을 한 모양입니다. 청춘이란 것은 젊다고 청춘이 아니고 마음이 젊으면 항상 청춘이다는 그런 말이죠.

- 그럼 선생님께서는 이 동네에는 언제쯤 오셨습니까?

= 내가 이 집에는 1997년 6월달에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여기 온 지도 만 18년이 됐네요.

-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네요. 그럼 퇴임하시고 나서 집을 사가지고 오신 거네요?

= 그렇지요.

- 이 동네가 처음 여기 오셨을 때와 지금하고 큰 변화가 있습니까?

= 똑 같습니다. 하나도 안변했어요. 이 근처는 딱 그대롭니다. 이 집도 옛날 그대로 입니다. 원래 집에다 샤슈만 새로 했는데 이것도 내가 한 게 아니고 전에 살던 사람이 이렇게 해 놓은 거예요. 샤슈를 달아놓으니까 난방도 되고 그래요. 안 그러면 추워서 안되지요.

저 마당에 있는 정원수도 내가 심은 게 아니고 다른 사람 것입니다. 이 앞에 솔나무까지만 내 거고 나머지는 원래 땅주인 겁니다. 나는 집만 샀어요. 그러니까 이쪽은 대지고 저쪽은 밭입니다. 등기상으로는 전으로 되어 있어요.

- 이 동네에서 이십여 년 가까이 사시면서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없었어요. 큰 사건도 없었고...

- 동네가 좀 조용한 편인 모양입니다.

= 아닙니다. 이 동네가 좀 시끄럽습니다.

하하. 뭐 그렇게 크게 시끄러운 일은 없었지요. 또 보면 전부 서민들이거든요. 집도 터가 몇평밖에 안되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면 되는데 아파트 지어 놓으면 들어가 살려고 해도 돈이 없어요. 돈을 더 넣어야 하는데... 그런 상황입니다.

- 그러면 퇴임은 어디에서 하신 겁니까?

= 여기 상남동우체국(아래 사진)에서 국장 하다가 퇴임 했어요. 이 우체국으로 들어오면서 살 곳을 물색을 했지요.

상남동우체국도 역사가 오래된 우체국이고 또 큰 우체국이 석전동에 하나 있고 경찰서 앞에 또 하나 있지요. 거기는 서기관 우체국입니다. 또 남성동에도 우체국이 있는데 내가 거기 있다가 이리로 와서 여기서 정년퇴직 했어요.

 

 

우리는 한 사람을 한 군데 오래 안놓아 두거든요. 한 삼 년 주기로 로테이션 시킵니다. 왜그러냐 하면 한 군데 오래 놔두

면 아는 사람 많아지고 그러면 부정을 저지를 소지가 생기니까 그걸 아예 차단하려고 하는 겁니다.

우체국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엄청 변했습니다. 옛날에는 일이 많아서 상당히 바빴는데 요즘은 전에 맨치로 그렇게 안바쁘지요. 일반 국민들이 편지를 안써잖아요. 옛날에는 전부 편지 아닙니까? 요즘은 편지가 없어요. 뭐 통지서 보내는 것 말고는...

옛날처럼 안부 묻고 그런 거는 전화로 하지 누가 편지 보냅니까. 그래서 우편물량이 싹 줄어들었어요. 요즘에는 금융 편리함 때문에 우체국 왔다갔다 하는 거죠. 우체국이 제일 낫잖아요? 이자가 좋은 건 아니지만 국가에서 직접 하니까 신뢰성이 있지 않습니까?

일반 금융기관 말고 신협 같은 그런 데는 안그렇습니까? 만약 부실하게 되면 몇천만 원까지만 보장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 이상은 힘든 겁니다. 그런데 우체국은 국가에서 하니까, 우스개소리로 김정일이가 온다 해도 국가에서 보장하는 거니까요. 하하.

- 우체국에는 언제 처음 들어가셨습니까?

= 정확한 거는 내 수첩을 봅시다. 나는 이런 거 적어 다녀요. 혹시 어디 쓰고 할 일이 있을까봐.

1966년 1월달에 서울저금보험관리국에 국가공무원으로 그 당시에 5급 공무원으로 들어갔어요. 요즘으로 치면 9급택인데 그 당시는 5급이라 했어요.

- 그럼 처음에는 서울에서 근무하셨네요?

= 공무원 첫 출발은 서울에서 했죠. 실력이 좋으니까 서울에서 근무한 거죠.

하하. 그 당시에 5급 공무원 모집공고를 내면 시험을 치기는 도별로 모아서 쳤습니다. 전국에서 도별로 시험을 치고 나면 합격자들은 국가공무원이니까 총무처에서 총괄관리를 하거든요.

요즘은 총무처라 안하고 행정자치부라 하지만 옛날에는 총무처라 했어요. 그래 공무원이 되어 가지고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마산전화국으로 왔어요. 분수로타리 있던 데 거기 근무했어요.

그래 전화국에 칠팔 년 있다가 우체국으로 갔어요. 그 뒤로 기장우체국, 서생우체국, 칠원우체국, 진해우체국, 양덕우체국, 남성동우체국, 회성동우체국을 거쳐서 여기 상남동우체국에서 정년퇴직을 했지요. 그러니까 삼십 년 넘게 근무했네요.

- 그래 살아보시니까 이 동네 어떻습니까?

= 직장에만 왔다갔다 하니까 동네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또 나이가 많으니까 친구가 별로 없어요. 이 동네에 내 또래 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맨날 혼자서 집에서 책 보고 신문 보고 시조창이나 하고... 하하. 그렇게 지냅니다.

- 여기 건너편에 보니까 시조 회관이라고 있던대요 ?

= 내가 거기 다닙니다. 시조 공부하러 다닙니다. 거기 이름이 한국전통예약총연합회 마산지부인데 시조창 하는 데입니다. 내가 국창까지 졸업 다 했어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 한테 가서 가르쳐요. 오늘도 내가 갔다 왔는데, 제일여고 앞에 보면 금강복지회관 있죠? 거기에서 하모니카를 배우고 있습니다. 또 명상도 하고 그러는데 뭐 소일거리죠.

- 그래도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알죠. 하모 이걸 모르면 되는가요?

하하. 이걸 하니까 재미있어요. 이거는 계음을 모르면 안되거든요. 하모니카 배운 지는 한 일년쯤 됐어요.

- 그럼 악보 없이도 여러 곡을 연주하시겠네요?

= 그런데 계음을 알아도 악보 없이는 안됩니다. 젊은 사람들 맨치로 악보를 못 외웁니다. 그러니까 악보를 보고 불어야지요. 하하.

- 좋은 취미생활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요산산악회라고 있는데 거기서 딱 금요일마다 산에 갑니다. 옛날에는 천 고지 이상 갔는데 요즘은 나이 많다고 조금 낮은 산에 다닌다고 오륙백 정도 되는 데 갑니다.

하하. 그래도 네 시간 이상 걸으니까 좋습니다. 나댕기니까 마음이 즐겁고 그래요.

- 이 동네에 이십여 년 사시면서 동네 옛날 이야기 이런 거 들으신 거는 없습니까? 옛날에 여기 미나리꽝이 있어서 얼음이 얼고 그랬다고 합니다.

= 미나리꽝이 어디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왔을 때는 무학상가가 지어져 있었고 주변에는 밭이고 그랬지요. 그런데 마을흔적 남기기, 한다는데 여기가 옛날에 무슨 훌륭한 역사의 유적 같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고 보통 동네인데 뭐 할 게 있나 싶습니다.

한다고 해도 여기는 옛날에 무슨 터라고 조그만 비석 하나만 세워놓고 말아도 돼요. 그래 간단히 하면 될 걸 거기다가 무슨 거창하게 넣을 게 있겠습니까?

- 예. 맞습니다. 하지만 이 동네가 사라지기 전에 동네의 사소한 이야기라도 모아서 남기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예정대로 절차가 진행되면 몇 년 안에 다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설 것 아닙니까?

= 확실히 어떻게 될지 그거는 잘 모르죠. 이게 뭐 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벌써 몇 년 째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뭐 그런갑다 하고 그냥 있는 거죠.

- 예정대로 재개발이 잘 진행되고 또 앞으로도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오늘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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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8.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0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3) "삼십 년 넘게 한 자리에서 콩나물을 길렀다" ------------------------- 권○○

1949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무학상가 지하 수정식품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수정식품

 

- 이 콩나물 공장이 이 동네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공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이 콩나물 공장 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 그러니까 원래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서 하던 거를 내가 인수 받았어요. 그때가 80년도인가 81년도인가? 그러니까 벌써 삼십 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삼십 년이 지나도 돈을 못벌었으니까 못나가고 이래 있는 거지요. 벌써 나가야 되는데... 허허. 내 앞에 하던 분도 벌써 돌아가셨고요.

- 예. 그럼 이 아파트 들어서고 난 뒤에 공장을 하셨네요?

= 그 이전에 여기가 어떤 자리였냐 하면, 논이었습니다. 이 아파트 짓기 전에는 논인데, 어떤 논이냐 하면, 농사도 지어 먹을 수 없는 구렁논, 구렁논 안있습니까? 구렁텅이, 그러니까 늪처럼 그랬어요. 그래 거기를 메워가지고 지었어요.

70년대 이전에는 이 뒤로는 전부 미나리꽝이었어요. 여기는 논이 워낙 물컹물컹 하고 해서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 유일하게 여기만 논이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아파트 맨 저쪽으로 옹벽이 있을 겁니다. 거기가 논이 끝나는 데거든요. 그쪽에 보면 지금도 탱자나무가 있을 겁니다. 그쪽에 옛날에 기와집 몇집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쪽에 집이 하나 있는데 육십 년 됐나? 그 집에 가면 나보다 더 잘 압니다.

왜 잘 아느냐 하면 내가 여기 왔을 적에 그 분이 시집 와 가지고 시집살이를 하고 살고 있었어요. 그분이 여기 동네에 대해서는 더 잘 알겠네요. 다른 집들은 사는 사람이 전부 바뀌고 그랬는데 그 집은 사람이 안바뀌고 집만 새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앞에 다리가 옛날에는 돌다리였는데 팔십 몇년도고? 그때 홍수가 나서 돌다리가 싹 떠내려가고 나서 새로 다리 지었거든요.

 

미나리 꽝 / 참고자료

 

- 그 홍수 났을 때 피해가 많았습니까?

= 우리는 별 피해가 없었어요. 이 공장 옹벽까지 돌이 치고 들어와서 다 깍여 나갔지요. 이 옹벽이 워낙 두꺼워서 그걸 차고는 못들어왔지 안그랬으면 여기도 피해가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앞에 다리 있던 밑으로는 싹 쓸어버렸어요. 그때가 내가 여기 인수하고 난 뒤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아파트 짓고 난 뒤로 내가 공장에 들어왔는데 그때 인수받을 적에는 이 상가가 또 뭐였냐 하면 방공대피소였어요. 대피소...

- 민방위훈련?

= 그렇지요. 민방위 대피소로 지정이 된 겁니다. 지역주민을 위해서 쓴 거죠. 상가에 지하가 있으니까요.

- 그 당시에 여기 상가에는 어떤 가게가 들어왔습니까? 작은 공장은 주변에 없었습니까?

= 주로 잡화점이고 또 고무신, 어물전, 그런 게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상가가 형성이 잘 됐는데 나중에는 잘안된 것 같습니다. 거기 대해서는 이 위에 쌀집에서 잘 알 겁니다. 바로 이 밑에 고물상 앞에 보면 주차장이 있는데 그 일대가 옛날에는 돼지털 공장이었고 가발공장도 하고 그랬어요.

요꼬 공장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요. 또 이 밑에 내려가다가 도랑 이쪽에 철공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 그럼 사장님은 원래 이 동네 출신이십니까?

= 내가 원래 이 동네 출신이 아니고, 고향이 진주 산청입니다. 산청 오부면인데 뭐 먹고 살 게 없으니까 부모 뿌리치고 친구 따라서 나온 거지요.

그때가 열여섯, 열일곱 살 때지요. 내가 육십여섯이니까 약 오십 년 됐네요. 대략 65년도쯤 되는 것 같습니다. 마산에 왔다가 부산에 갔다가 서울도 갔다가 그랬죠.

여기 뒤에 보면 월남집이라고 있었습니다. 왜 월남집이냐 하면 월남 갔다 온 사람이 집을 지어 가지고 살았다고 해서 월남집이라 했어요. 그때 당시 파병으로 많이 갔다 아닙니까? 그때 돈도 벌어 와가지고 그 집을 지어 살다가 우리 숙모 한테 팔았던 겁니다.

그래 나는 숙모님 집에 와서 덤으로 들락날락 하다가 나중에 여기에 눌러 앉았어요. 그 당시는 이 근처도 그렇고 저 위에 벽산아파트 쪽에도 다 밭이었어요.

그리고 이 뒤로는 미나리꽝인데 겨울 되면 다 얼었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얼마나 추웠습니까? 그때 나도 어릴 때니까 동네 애들 하고 앉은뱅이 스케이트 만들어 놀았죠.

나무로 앉는 판을 만들고 그 밑에 철사 대고 이렇게 만들었는데, 내 사촌형이 있어서 그 사촌형하고 스케이트 타고 놀고 그랬어요.

그 당시만 해도 여기 석교가 지금처럼 만들어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앞에 이 도랑이 참 좁았어요. 여기 도랑이 다른 이름이 없고 그냥 회원천이라 했는데 물이 맑았죠.

옛날에는 정자나무 그 위쪽으로 가면 가재도 나왔습니다. 여기서 빨래도 할 정도로 억수로 맑았습니다.

- 콩나물 키우기는 여기가 조건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 그렇죠. 원래 여기가 구렁논이다 보니까 물은 억수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콩나물 기르는데는 큰 지장이 없지요. 지하수니까 아무래도 여름에는 물이 좀 찹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그래요.

- 요새는 하루에 콩나물을 몇통이나 생산하십니까? 많이 하실 때는 언제 많이 하셨습니까?

= 아주 영세하죠. 콩나물 많이 해 봐야 열댓 통 하니까 많이 하는 거 아니고 그냥 겨우 생계나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처음 인수 맡아 가지고 할 때는 주로 어시장에 배달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여기서 어시장까지 뭘로 배달 했느냐 하면 자전차로 운반했어요. 이런 플라스틱 통이 아니고 나무통이었어요. 그때는 스물댓 통, 서른 통 정도 했어요.

큰 통으로... 그때는 큰 것 밖에 없었으니까요. 참 미련스러웠지요. 그 나무통만 해도 물 먹어서 무거운데 거기다가 콩나물까지 들어 있으니까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 무거운 걸 두 통 세 통이나 자전차에 싣고 선창에 갖다 주고...

-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 그렇죠. 그때 볼 것 같으면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 뒤에 조금 있다가 오토바이가 나왔고 그리고 조금 있다가 차가 나와 차로 운반을 했지요. 그러니까 시기 따라 세상 따라서 그래 산 거죠.

내가 살아나온 거는... 아직까지 나는 회사 회 자도 모르고 남의 집 밥 얻어 먹고 그러지는 안했어요. 처음에 와가지고 몇 년은 점원 생활 했지만 그 뒤로는 내 스스로 살았으니까요.

이 동네 없어진다고 역사를 알아야 된다고 하는데 내 이런 것도 뭐 역사가 되겠습니까?

-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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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1.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9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2) "동네 지킴이칠원쌀상회" ------------------------- 이○○

1948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무학상가 1층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지금 조합원 중에서 이 동네에 아주 오래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 예. 이 자리에만 거의 40년을 살았네요. 하여튼 요 동네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이 아파트 들어서기 전인데 내나 같은 동네입니다. 여기가 3-5번지인데 거기가 교원동 3-6번지이네요.

내가 여기 이사올 때는 단층 슬라브집 지어놓은 데 바로 들어 왔거든요. 주인이 진해에 있었는데 우리가 먼저 들어 왔어요. 방 큰 거 한 칸에 부엌 있고 다락방 있고 조그만 했어요.

지금도 내나 그대로 있거든요.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은 병원에 가 계시고 안계실 겁니다.

그리고 이 무학상가 자리에는 옷짜는 요꼬공장이 있었거든요. 지금 앞에 주차해 놓은 데가 공중화장실 자리고요. 그리고 바로 앞에는 옛날에 영일공업사라고 쇠를 가지고 뭐 만들던 공장이었어요. 그런데 요꼬공장은 이름을 모르겠네요.

그때만 해도 밭은 별로 없었어요. 집이 많이 들어서 있었고요. 초가집은 없었고 전부다 쓰레트나 기와집이고 슬라브 집은 몇집 있었어요.

교방동 쪽에는 논이 많이 있었는데 여기는 전부 집이었어요. 지금도 그때하고 집은 변동이 별로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 당시에 동네 주변은 어땠습니까? 동네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요꼬공장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다른 공장은 없었습니까?

= 건너편 회원동 쪽에도 기와집도 있고 쓰레트집도 있고 공터도 있고 그랬는데 내가 오고나서 집을 새로 많이 지었어요.

그때 동네 이름 뚜렷하게 부르는 것은 없었어요. 사람들이 집 위치를 물으면 옛날 요꼬공장이라고 그랬거든요. 우리가 뭐 부탁할 거 있으면 옛날 요꼬공장 옆으로 오라 그랬거든요. 그때 요꼬공장이 컸습니다.

하여튼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전체였거든요. 그 요꼬공장을 뜯고 짓고 하는데 한 일년반이나 이년 가까이 걸렸을 겁니다. 요꼬공장 했던 사람 성은 모르겠네요.

그리고 상가 지하에 콩나물 공장이 있는데 지금 현재도 하고 있습니다. 그 콩나물 공장이 81년인가 82년인가 모르겠는데 그때부터 계속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한 사람은... 하도 오래돼서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성은 정씨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사람은 권씨이고요. 여기 콩나물 공장 이름이 수정식품인데 여기 지하수가 참 좋아요. 지하가 다 콩나물 공장입니다. 이 가게 여덟 개 하고 반 정도로 큽니다.

콩나물 공장 말고는 지금 현재로 바로 밑에 고물상이 있습니다. 그 집이 고물상 한 지가 한 칠팔 년 됐나 그럴 겁니다.

- 이 무학상가가 오래된 상가라고 들었는데 그 얘기를 좀 해 주십시오. 상가를 불하 받으신 겁니까?

= 예. 이 상가를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아파트를 지었거든요. 상가를 다 짓고 불하를 했는데 그때 가게 하나에 여덟 평 몇 홉인가 그럴 깁니다.

그때 가게가 총 39개였어요. 불하받을 때 평당에 얼마나 주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가게 하나에 2백만 원인가 주고 샀어요. 그래가지고 쌀집을 낸 거지요.

여기에 처음 상가가 형성이 될 때에는 생선장사, 식육점, 참기름집도 있었고 철물점도 있었고 잡화가게도 있었고 연쇄점도 있었고요. 이 무학상가를 지어서 분양한 업체는 개인이 했는데 그 사람도 세상 버리고 없고... 오래되니까 이름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여기 상가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다 가버리고 지금은 내 혼자 뿐이라예. 연쇄점이 있었는데 그 뒤에 받아서 한 사람이 감천슈퍼라고 있었거든요. 앞에 한 사람은 모르겠고요.

상가는 형성이 됐는데 장사가 잘 안됐어예. 밑에 시장이 가깝고 하니까 상가가 잘 안됐어요. 하나씩 하나씩 문을 닫았는데 한 이삼년간에 다 없어졌어예. 지금은 다 빈 가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파트는 상가 들어서고 난 뒤에 같은 업자가 올린 건데 2층 3층을 증축을 했지예. 처음에 모두 16가구가 들어왔는데 지금은 15가구만 살고 있어요. 한 집만 비어 있고 주인은 다 있고예. 지금 건물이 그냥 낡은 정도가 아닙니다.

- 이쪽 교원동으로 이사 오시게 된 거는 직장 때문이었습니까? 또 쌀가게도 오래 하셨지 않습니까?

= 그때 여기로 온 것은 남의 집이라도 새 집에 살아보자 해서 이사 온 겁니다. 직장은 우리 아저씨가 자유수출에 다녔어요.

나는 고향이 의령인데 회사 다닌다고 대구에 가 있다가 결혼해서 마산으로 왔어요. 우리 아저씨는 총각 때부터 여기에 있었고요.

아저씨 하고는 같은 동네는 아니고 나는 이병철이 생가 있는 정곡면이고 거기는 지정면이고 그래요. 그래 여기로 이사와 가지고 수출에 다니다가 거기 경기가 좀 안좋아가지고 해서 그만두고 가게를 사서 장사를 시작했지요.

그때부터 여기서 쌀집을 했습니다. 이름이 칠원쌀상회인데 태풍에 간판이 날아가버리고 나서는 그냥 간판을 안달았어요. 칠원쌀상회라고 한 거는 다른 사람이 하던 가게 허가를 우리가 받았기 때문이지요. 칠원쌀상회는 원래 다른 데 있었어예. 거기도 교원동인데 옛날 북마산역 밑에 그 안골목에 있었어예. 하도 오래 되어서 그 사람 성도 모르겠어예.

그래도 쌀집 냈을 때는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개업한 날이 78년 4월 10일입니다.

그때 개업잔치도 하고 떡도 하고 그랬어요. 십몇년 지나고 우리 아저씨가 기술을 배워서 도배를 했거든요. 옆에 가게를 세 얻어서 도배도 하고 장판도 팔고 하는 가게를 했어예. 그 가게 이름이 무학장식인데 지금은 안합니다. 안한 지가 육 년 정도 됐나 그렇습니다.

쌀가게는 그대로 하고 그때 장사는 잘 됐어요. 그때 쌀은 주로 함안 대산장에서 사왔어요. 의령하고 경계선이고 고향이 가깝다보니까요.

또 촌에서 누가 방아 찧어놨다고 연락오면 거기 가서 사오고 그랬어요. 그때 장날 쌀을 사놓으면 쌀집마다 배달해 주는 트럭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장날마다 배달하는 장차가 있었거든요. 그때는 정부미 취급을 많이 했는데, 조합에 신청을 하고 한 이삼일 있으면 배달이 됩니다. 또 쌀집은 보통 소금을 다 취급하는데 우리도 소금도 하고 잡곡도 하고 그랬어요.

- 한때는 쌀가게를 크게 하셨네요? 요즘은 어떻습니까?

= 할 때는 많이 했어요. 그때는 일반 쌀은 그렇지만 떡집에 들어가는 정부미가 억수로 많았어요. 정부미 한 창고 들여 놓으면 일주일만에 다 나가고 그랬거든요.

이 칠원쌀상회가 제일 잘 될 때는 이십년 전쯤 되겠네요. 우리가 78년도에 했으니까 85년부터 95년 그 사이에 최고 잘 되었을 때라고 봐야 되겠네요.

쌀이 많이 나가는 데는 떡집인데 우리가 주로 거래한 데는 어시장 지금 농협 있는 맞은편 골목에 서울떡방앗간 부산떡방앗간 그런 데 였어요. 이 근처에는 삼양떡방앗간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회원1동 파출소 있는 데로 이사를 갔어요.

우리가 취급한 쌀도 옛날에는 통일벼, 밀양3호... 또 정부미, 납딱보리쌀, 혼합미 그런 종류가 많았어요. 지금은 아예 정부미라고는 없습니다.

지금은 주로 함안 산인 정미소서 바로 찧어 오거든요. 지금은 납품은 없고 오는 사람 있으면 조금 팔고 그렇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하면 장사도 아닙니다. 옛날에는 되로 팔고 그랬는데 지금은 소포장이 많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시장에 가서 달랑 사오고 그렇거든요. 지금은 내가 재개발이 아니면 진작 그만두었을 겁니다.

- 예전에 큰 홍수가 난 적이 있다면서요?

= 쌀집 하면서 홍수 난 것은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쌀가게 차리고 나서 얼마 안됐을 때입니다. 비가 엄청나게 와가지고 이 상가 앞에 돌다리도 다 떠내려가고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기둥도 비석 만드는 돌이고 그랬는데 그때 떠내려가고 나서 일년 동안 외나무다리로 다녔어요. 그때 우리 집 앞에 땅이 일 미터 놔두고 다 파여 내려가 버렸습니다.

저 산 위에서 나무뿌리며 나뭇가지 같은 것이 떠내려 와서 다리발에 엉켜서 못내려가니까 물이 차올라서... 그때 여기 서서 땅이 막 파여 쓸려내려가는 것을 봤어요.

또 저 위 축사에서 돼지도 떠내려오고 냉장고도 떠내려가고... 큰 바윗돌도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구경한다고 와글와글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혹시나 싶어서 쌀을 마루 위에다 재어 놔서 쌀 피해는 없었어요. 또 이 동네는 집이 떠내려간 거는 없었는데 이 밑에 전당포 있는 그 근처 집들이 다 떠내려갔습니다.

- 홍수로 큰 피해를 입힌 하천이지만 옛날에는 물이 맑았지요?

= 지금은 회원천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회원도랑이라 했거든요. 이사 오고 나서도 다리 밑에 내려가서 빨래 많이 했습니다. 물이 참 좋았어요. 위에 사람들이 많이 안사니까 깨끗한 물이 내려왔거든요. 꼬맹이들 목욕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때부터 물리 더러워졌더라고예.

또 수도물이 하루 나오고 하루 안나오고 할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빨래를 주로 앵기밭골 위에 가서 하고 아니면 서원골 큰 은행나무 있는 그 옆에 가서 씻고 그랬어요.

목욕은 건너편 현대탕에도 가고 태양목욕탕에도 가고 또 옛날에는 지금 자이아파트 들어선 그 자리에 보성탕이라고 있었는데 거기도 가고 그랬지요.

- 이 동네 살아보니까 어떻습니까? 오래 사셨는데요.

= 다른 동네는 살려고 아예 생각도 안해 봤습니다. 그냥 이 동네에서만 쭉 살아왔으니까 쉽게 말하자면 찌끼미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상가를 내가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게가 서른아홉 개인 줄 퍼떡 알지요.

리고 내가 이 동네서 통장을 오래 했어요. 1통 통장을 12년 전에 8년을 했거든요. 이번 1월 1일부로 또 통장 임명을 받았습니다.

- 재개발이 잘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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