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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1. 00:00

마산번창기(1908) - 11

마산의 관공서 - 5

 

□ 민의소(民議所)-마산포 소재(전 마산보통학교 터)

이것은 한인(韓人) 측의 자치기관이며 마산포 읍내 6개 동의 하급 행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이 사무소에도 역시 민의소장과 부소장이 있고 의원도 있지만 그 의사(議事)나 역소(役所)의 모양새는 볼 것이 없다.

명치유신 때 일본에서 이루어진 그것보다 더 유치한 것이거니와 사무소는 담배 피우는 휴게실 모양이다.

 

 

□ 창원재무서(昌原財務署)-마산포 소재

한국정보의 탁지부(度支部) 직할로 지방의 조세 등을 정리하는 기관이며 서장은 재무관인 한인인데 재무보좌관으로서는 일본인이 주로 책임지고 집무하고 있다.

그 위치는 오산으로 명태어 회사 남쪽 앞에 있는, 전에 한국척식회사 마산출장소 건물이었던 곳에 건물을 빌려 쓰고 있는데 현재 마산포 신마치(新町)에 새로 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다.

 

□ 창원금융조합-마산포 소재

한국정부의 탁지부가 자본금 1만 엔을 지출해 한인에 대한 소규모의 금융기관으로 만든 것이며 재무서에 부속되어 있으며 상당한 저당을 잡아서 저리로 대부를 해주는 곳이다.

말하자면 농공은행의 소규모 판인데 그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들여온다. 이 조합은 창원부는 물론이고 함안, 진해, 고성, 진남(鎭男, 진남군 1900년-1909년. 현재의 통영시),웅천 등지까지 설쳐 활동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한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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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도시계획에 따라 허물어지고 없어진 시내에 점재(點在)하던 이름난 건축물을 살펴본다. 

동척(東拓)지점(와가 / 瓦家 - 목조단층) - 오동동 삼각상점에서 동으로 신작로가 남으로써 건물과 정원의 2/3 이상이 철훼(撤毁)되는 동시에 지점도 폐쇄되고 그 자리가 중화요정 봉래관(蓬萊館)이 되었다.

명태창고 - 이 건물은 1920년 여름 남한을 휩쓸던 호열자(虎列刺) 때 환자 수용소로 일시 이용한 때도 있었으나 역시 도로 확장에 따라 반 이상이 철훼(撤毁)되고 지금은 잔영만이 있을 뿐이다.

박간(迫間) 창고 - 이곳은 창고와 광장이 있어서 그때는 환등(幻燈)과 활동사진을 공개하였고, 창고는 농구상(農具商), 보덕상회(報德商會)와 서야도기(西野陶器) 창고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국민은행 지점과 경남은행 본점이 자리 잡고 있다.

마산재무서(財務署) - 철제 아치형 현대식 건물로서 금융조합과 비등한 업체였던 것이 그 후 김종신이 경영하던 약주회사로 바뀌었다.

조창(漕倉)과 감리서(監理署) - 현재 제일은행이 들어선 곳인데 대한제국이 말소(抹消)되자 운명을 같이 한 건물인바 한때는 경상남도 기업전습소(1921년경 / 다른 기록에 의하면 1912년 경 ; 옮긴이)가 대치되어 부녀자들에게 방직기술을 전수하다가 농공은행 지점과 포목도매상인 길전(吉田)상점이란 목조 2층이 들어앉았다가 1926년 식은(殖銀)지점이 설치되자 길전상점은 동아연초(東亞煙草) 총판소로 바뀌었다가 1921년 조선 전매서가 발족함으로써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길전건물은 식은(殖銀)이 흡수하여 종전 후는 한때 저축은행이었던 것을 제일은행으로 명의 변경하였다.

구 사옥은 노동자의 쇠망치로 만신창이가 되어 석일(昔日)의 면모는 일장(一場)의 회상에 그칠 뿐이다.

<1760년에 건축된 조창 마산창>

 

경무청 - 부림시장 입구의 목조 와가(瓦家) 상하 3동이었는데 이곳을 경무청이라 했고, 그 둘레에 있었던 조그마한 일용품 저자가 오늘날 대규모 공설시장의 전신이다.

경무청은 감옥 구실을 했고, 병합 후 오동동 감옥이 설치될 때까지 부산감옥 마산분서(分署)란 간판으로 순사(巡査) 주재소 행세를 하다가 1926년 여름 현재 남성동 파출소로 이전했는데 당시 위치 문제를 둘러싸고 마산부윤과 경찰서장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던 상보(詳報)는 별항으로 미룬다.

아래학교 - 매우 오래된 명사로서 당시 아래학교의 생도는 불과 수인(數人)이었을 뿐 아니라 생존자 중에서도 그 이름을 망각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해방 후 삼·일주조장 좌후편 언덕 위에 단층 목조 와가 2동에 운동장이 있었다.

높이는 현재 철로 높이였으나 도로 높이에 준해서 깎아 내린 곳인데 창건 초에는 개화기의 영향을 받아 서당과 학교의 중간격인 의숙(義塾)으로 출족(出足)하였다가 성호동에 공립 보통학교가 개교됨으로써 전기 구교사(舊校舍)를 아래 학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구교사(舊校舍)는 편발(編髮)한 처녀들만을 교육하는 여학교로서 출발하였던 것인데 몇 해 후 성호보통학교에서 남녀공학을 함으로써 자연 폐쇄가 되었고, 그 자리는 법원 건물이 준공되기까지 임시 청사로 사용하였다.

부기(附記)하지만 당시 아래 학교 제141번 졸업생은 김노전(金魯全)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민의소(民議所) - 민의소는 서울 청년회관에 버금가는 건물로서 마산 한민(韓民)의 유일한 공회당인 동시에 대일 투쟁시에는 한민의 인권과 이해(利害)를 옹호하는 자치기관, 말하자면 항민(港民)의 의사가 결집한 대변기관으로서 1908(광무2)에 준공된 것이다.

병합과 동시에 해산되었으나 한민들의 용솟음치는 혈맥(血脈)은 조금도 냉각함이 없이 대소 사회문제, 항민 이해관계, 민족문제 등이 여기서 논의되었으며 청년들의 토론과 외래 명사들의 강연회도 여기서 행해졌는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19237월에 개최한 동경자유법조회 중진인 포시진치(布施辰治)’ 변호사의 강연(통역은 김형두 변호사였는데 미개업으로 종료)1924115일에 있었던 강연회였는데 연사는 김종명(), 서정희, 송봉우, 신철 등 4명으로 송봉우의 연제(演題)인간운동과 유영운동(幽靈運動 / 종교를 지적)’이었다.

그런데 연설 도중에 질문이 있었다.

문제가 되었던 내용인즉, 일인 행덕추수(幸德秋水 / 명치천황 암살 음모의 대역죄로 1910년에 사형을 당함)의 유저(遺著) 기독교 말살론의 서문 중 십자가는 남녀 생식기의 상징이란 대목이었는데 당시 창신학교에 봉직 중인 최 모라는 신진 목사의 질문에서부터 논쟁이 벌어져 강연장에서 끝을 내지 못하고 연사들의 숙소에까지 연장되었던 일도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서울에서 안서(岸曙) 김억이 내마(來馬)하여 민의소에서 2주간 에스페란트어 강좌를 열었던 일이며 김명규, 김종신, 팽삼진 등이 무산자제(無産子弟)를 가르치던 마산학원도 여기에 있었다.

뜰 앞 출입구 좌편 숙직실을 허물고 이정찬이 주간이 되어 유도도장 숭무관(崇武館)을 건립하였다가 박삼조 사범의 주장으로 정무관(正武館)으로 개칭하여 유망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관원들에게 일섬벽력(一閃霹靂)이 떨어졌다. 19357월경 신마산 마산극장 주인이며 청부업자이던 본전퇴오랑(本田五郞, 부회의원)이란 자와 부회의원 구() 모가 비밀리에 정무관 대지를 매매 계약을 하여 시가보다 헐값인 평당 40원에 낙착했다는 것이다.

통분한 부민들은 매매 무효 부민대회까지 열었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며, 정무관 유도 선수들은 울분을 못 참고 울부짖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뒤라 어찌할 수 없이 수많은 우여곡절과 애환을 지닌 채 38년 역사의 전통은 자취도 없어지고 그 자리에 버젓이 공락관이란 철근 3층의 극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추산정(騶山亭) - 구마산 주민들의 하절(夏節) 납량처(納涼處)로서 추산정은 공기가 맑고 춘하추동 할 것 없이 등산객들이 부절(不絶)하여 위장병, 신경통, 고혈압 등의 치유에 효험이 많았다는 선전이 대단하였다.

<마산 3.1만세의거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추산정>

 

추산정은 일면 사정(射亭)이라고도 하는데, 많은 한량재녀(閑良才女)들이 모여 들었고 스포츠맨들은 건강의 도장이라고까지 하였다.

설치 연대는 미상이나 고로(故老)들의 말에 의하면 2백년 내지 3백년은 될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추산정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노목들의 수령을 보아 어느 정도 과학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고로(故老)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각종 각색의 행사가 많았는데 정자를 중심으로 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시음회(詩吟會)는 물론 춘계(春季)에는 사우(射友)들의 경사대회(競射大會), 하절(夏節)에는 피서객들이 모여 들었고, 추계(秋季)의 백일장과 추석의 추천놀이에는 궁벽하고 답답한 규방의 부녀자들이 아끼던 고까옷에다 아미를 단장하고 모여들어 이를 구경하는 부녀자들과 어울려 마치 유록(柳綠) 화홍(花紅) 수백 종의 꽃과 나비들의 원무를 연상케 하였으며 저 유명한 3·1 독립선언서를 발표(낭독 일파一波 김용환 씨)한 곳이 또한 이 추산정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추산정이 어떠한 경로로 하여 천리교라는 하필이면 일본 종파의 손으로 넘어갔던 것인지 조선인 공유재산을 잘 관리할 줄 알았던 부()가 무슨 권한으로 일개인에게 매각 처분을 하였으며, 정부에서 보호하라는 노목(老木)들은 어찌하여 남벌해 버렸던 것인지 지금은 만목(滿目) 황량(荒凉)하여 부민들의 원정조차 묵살하고 있는 처사가 석연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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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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