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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3) - 강점제1시기 일본인들이 신마산에 벚나무를 심은 것이 한일병합 직전이니 여기 나오는 벚나무는 심은지 약 10년 쯤 지난 사진입니다. 이것들이 아직 남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창원천변 벚나무입니다. 지금은 월영동 아파트 단지로 변한 육군중포병대대 벚나무입니다. 신마산의 창원천변 야경입니다. 2011. 11.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 2011. 2.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 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 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 2010.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