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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28.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7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1) 사업구역 내 삶터의 흔적 - 5

 

● 공동우물

집 안으로 수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모두 물을 길어 먹었다. 

자연적으로 솟는 약수터나 샘터의 물을 먹거나 아니면 우물을 팠다. 대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지의 동리에는 그런 샘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우물을 파지 않을 수 없었다. 

드물게 집안에 우물을 판 경우도 있지만, 우물 파는 데는 비용도 많이 들고 또 아무데나 물이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개의 우물은 공동이었다. 

우물이 있어야 사람들이 살 수 있기 때문에 마을이 형성되는 데에는 우물이 필수적이다. 

우물은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한다. 그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공간이 아마 우물일 것이다. 

우물은 공동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공간이다. 

그 우물물로 공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들의 공동체적 의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 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산에서는 1927년부터 추산정수장과 봉암수원지 공사를 해서 1930 5월부터 수돗물을 공급한 것이 시초이다. 하지만 당시 일부에게만 수돗물이 공급되는데 그쳤다. 

해방 이후에도 공업도시화에 따른 인구증가와 시설부족으로 만성적인 수돗물 부족 현상을 겪었다. 

그러다가 1985년에 마산권광역상수도확장 1차사업이 완료되고 마산의 수도보귭율이 90%를 넘어서면서 물부족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전에는,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공동우물이나 개인 지하수나 간이상수도를 이용했다. 또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거의가 공동우물을 이용했다.

사업구역 내에도 여러 군데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오래된 골목인 회원남29길과 노산서25길로 이어지는 주위 동네에는 네 군데의 공동새미(우물)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수도가 들어오고 난 뒤에도 주민들은 이 공동새미의 물을 오랫동안 이용했다고 한다. 현재는 거의 막히거나 덮인 상태이다.

 

● 공장들

현재의 사업구역은 예전부터 오래된 주거지와 논밭으로 이뤄진 지역으로 공장은 거의 없었던 지역이다. 

과거에 이 구역에 있었던 공장으로는 우선 우피공장을 들 수 있다. 

현재의 회합교 주변의 대창고물상과 그 아래 주차장(교원동 21번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대에 있었던 큰 공장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40 9, 일본인 시네마시(常松泰), 카미하루(上原作太郞) 등에 의해 자본금 195천 원으로 설립된 마산피혁흥업(馬山皮革興業())은 각종 피혁류의 제유(製鞣) 및 각종 원()모피 부산물을 가공 판매하는 회사였다. 

 

마산피혁공장에 대한 당시 보도 (부산일보, 1940.4.3.)

 

또 이 회사는 햄과 쏘세지를 만드는 돈육가공공장을 자매 회사로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40 4 27일 기사). 

해방 후에도 마산피혁흥업이란 이름으로 운영하다가 1956경부터는 마산피혁공장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주로 소가죽과 돼지가죽을 가공 생산했는데 폐업 시기는 알 수 없다. 

한편 이 공장에서는 소가죽을 가공하여 공업용 아교를 생산하기도 했는데 동네 주민들은 이를 부리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무학상가아파트 자리는 원래 요꼬 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요꼬는 일본어로 횡편, 즉 가로를 뜻하는데 편물기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직물을 짜는 것을 말한다. 

요꼬는 일반적으로는 스웨터 짜는 것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요코를 짜는 가내공장이 교원동, 회원동 일대에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 요꼬 공장은 꽤 큰 편이었다고 한다. 1978년에 이 공장이 헐리고 난 자리에 무학상가가 들어섰다.

무학상가 옆의 교원동 3-24번지와 3-25번지 일대에는 영일공업사라고 철공장이 있었는데 무학상가가 들어선 이후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학상가 지하에는 수정식품이라고 하는 콩나물공장이 지금도 콩나물을 생산하고 있다. 

이 콩나물공장은 현재 사업구역 내에서는 유일한 공장이다. 

현재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 1981년경에 다른 사람이 하던 공장을 인수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하니 그때부터만 하더라도 34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콩나물 공장 자리는 원래 물이 많은 무렁논이어서인지 지금도 수량이 풍부해서 콩나물을 기르기에는 아주 좋다고 한다.

 

 무학상가

현재의 무학상가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요꼬공장이 있었는데 그 공장을 헐어낸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무학상가가 들어선 것은 1978년 3월이라고 한다. 

처음 상가가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분양이 잘 되었다고 한다. 상가 점포는 모두 39개였는데 쌀가게를 비롯해 생선장사, 식육점, 참기름집, 철물점, 잡화가게, 연쇄점 등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장사가 좀 되는 듯 했으나 회산다리 쪽에 시장이 생기고 하면서 차츰 장사가 잘 안됐다고 한다. 결국 세월이 지나며 가게가 하나둘 비게 되었고 상가 위에다 2층 3층의 아파트를 증축해 주상복합 건물이 되었다. 

한때 이 상가 지하는 민방위 대피소로도 쓰였다고 한다. 

현재 이 아파트에는 모두 16가구가 주소를 두고 있고 지하에는 수정식품이라는 오래된 콩나물 공장이 있다. 1층에 있는 칠원쌀상회라는 쌀가게는 37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목욕탕

사업구역 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으로는 교원동 26번지 하천가의 남일탕(대표 남현우, 남상발)이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지하수가 좋다는 소문이 났던 남일탕은 몇 년 전에 헐리고 그 자리에는 노산 어린이집이 들어서 있다.

그 다음으로 교방동의 태양탕, 황금탕, 회원동의 주공탕 등이 들어섰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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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23.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

 2. 봉암동 형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년 말까지 마산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수원지 물은 송수관을 타고 추산동 산중턱에 있었던 정수장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50년대 후반에 민원을 받아 송수관 중간에 지관시설을 하여 정수장으로 가기 전의 원수를 봉암동 주민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수원지 길 들머리에서 백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여럿 늘려있고, 오른쪽 석벽엔 아직도 홈을 새긴 것 같은 길쭉한 다이너마이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당시 난공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산악타기 초보자들의 암벽등반 연습장처럼 활용되고 있는 그곳의 암벽도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백여 미터 더 오르면 수원지지역 출입문이 나오고,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십여 미터 다리 너머(지금 운동기구 놓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인 산지기집 두 채가 있었다. 삼사십 평짜리들로 잘 지어진 집들이었다.

해방 후에도 이전 체제를 이어받아 산을 잘 관리하여 도회지 복판의 산인데도 많은 짐승들이 살았었다. 고라니, 노루, 여우, , 늑대, 오소리, 산돼지, 산토끼 등이었다.

정문에서 백 수십여 미터 안에 있는 둑 문 위엔 여천무극(與天無極, 댐 높이를 비유적으로 표한 듯)’이란 글이 시멘트 바탕에 음각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봉암수원지(鳳岩水源池)’라고 써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름 1m 정도의 원통형 공간이 댐 꼭대기까지 뚫려있고, 그 벽엔 쇠사다리, 그 옆엔 눈금 따라 깊이 표시가 씌어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철판덮개를 밀고 나와 둑 위에 섰던 일이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볼 때의 아찔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둑은 195312월에 증축되었는데 상단 직립부분이 그것이다.

수원지 길을 다 내려오면 마진국도와 맞닿는데, 왼쪽은 봉암다리로 오른쪽은 마산으로 향한다. 지금의 작은 공장들 사이 도로가 그것이다.

오른쪽 길 아래 이삼십 마지기 논 옆엔 청수들(청수淸水는 일본인 매축공사자의 이름으로 추정) 농수 공급용의 오륙천 평 저수지가 있었고(지금 영락원 일대), 서쪽으로 이십여 만 평의 논과 갈대밭이 양덕천까지 전개되어 있었다.

둑길은 저수지로부터 1km쯤 직선으로 뻗었다가 자동개폐식 수문(큰 수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100m50m 정도 가다가 팔룡산에서 오는 내()를 건넌다. 이어서 또 하나의 수문(작은 수문)을 거쳐 200m쯤 나간 후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끝난다(지금 자유무역지역 후문 근처).

 

<1951년 제작된 봉암동 일대 지도>

 

둑길은 바다와 갈대밭을 끼고 있어 거닐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2차 매립공사(현 봉암동과 자유수출지역 사이의 도로, 즉 옛 마진국도를 기준으로 위쪽을 1차 매립지, 아래쪽을 2차 매립지하고 표기)는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해방을 맞은 듯 공사 현장이 1940년대 말까지 우리들의 놀이터 구실을 했다.

팔룡산 자락에 흙 파는 현장이 넓게 있었고, 흙을 싣는 수레(우리는 그것 흙구루마라 불렀다)도 있었으며, 레일도 한길을 가로 건너 바다 둑 근처까지 길게 놓여있었다.

둑을 막고 팔룡산의 흙을 날라 갯바닥을 메우는 공사 방식을 짐작해 본 것은 내가 성인이 된 후였다. 그런 후에야 동네 동쪽의 팔룡산 자락이 급경사로 되어 있는 이유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수레를 위 끝까지 밀고 올라가서는 아래로 밀면서 내려와 속도감을 즐겼는데, 속도에 욕심을 내다가 수레가 탈선하는 바람에 무릎을 깬 일도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차 매립지 상단에 새로 닦다가 해방을 맞아 중단된 큰 도로로 있었다. 우리는 새 한질(새로 난 큰 길의 뜻)’이라 불렀다.

기존도로보다 넓었던 이 도로는 아직 덜 될 부분이 많아 개통은 안 되고 비어 있었기에 동네사람들이 타작마당으로 이용하거나 50년대 중후반에 많이 다녔던 떠돌이광대들이 공연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길은 1960년대 중후반에 개발되었고, 더 확장되어 지금의 마진국도가 되어 있다.

1930년대에 닦았던 도로는 봉암동 경남은행 뒤의 소방도로로써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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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마산에 상수도가 생기다>

통합 창원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팔룡산의 명칭은 원래 반룡산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산의 명칭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 지역의 지명을 연구한 민긍기 교수는 대략 1980년대 전후, 그러니까 30여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지명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니 이 글에서도 팔룡산이라 부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 산은 무학산과 함께 선재봉산(船材封山), 즉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산이었습니다. 마산포 해안가에 있던 전선소(戰船所)에서 무학산과 팔룡산의 재목으로 선박을 건조했던 겁니다. 두 산에 곧고 굵은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일제는 마산부에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1927년 5월 이 산의 정상부에 수원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30년 3월에 준공하였습니다. 수원지용 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가격 문제로 마산부와 창원군 창원면이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낮은 쪽만 막으면 간단히 저수지가 되는 조건을 이용한 겁니다.

 

 

이 수원지 공사는 1919년-1920년 동아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고 간 콜레라 대재앙 이후 근대식 식수정책을 모색하던 일제의 大건설사업이었습니다.

“근대도시는 콜레라에 의해 시작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근대식 도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라는 뜻이겠죠. 유럽의 유수한 도시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1920년대 중반 마산의 인구는 대략 22,000명 정도였고 그 중 일본인은 5천여 명이었습니다. 그 후 지속적인 인구 증가로 1930년경에는 2만5천명에 이르렀습니다. 마산의 상수도 시설은 도시위생제도 확립 외에 이와 같은 인구증가도 원인이었습니다. 

팔룡산수원지는 인구 6만명을 예상하고 건설하였지만, 초기에 계획된 급수인구는 16,000명으로 1인 1일 170리터, 1일 최대급수량 2,720㎥이었습니다. 급수방식은 저수지를 이용한 자연유하식(自然流下式)이었습니다.

하지만 1941년에 편찬된 『약진마산의 전모』에 의하면 이 수원지가 준공된 이후에는 급수호수 800호, 급수인원 4,000명 정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신마산에 거주한 일본인 5천여명이 주 사용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용자가 적었던 초기에는 수량이 풍부한 마산지역의 자연조건을 호평하면서 적어도 1945년 경까지는 저수지의 수량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시설 등으로 30년대 후반부터 공업용수 대책을 모색해 오던 중 1940년에 찾아온 대기근으로 그 해 여름에는 저수지의 물이 한방울도 남김 없이 말라버려 큰 물난리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 수원지에 투입된 공사비는451,173엔, 공사는 1904년에 마산으로 이주해와 건설업을 하던 본전추오랑(本田搥五郞)이 하였습니다. 저수된 물은 자산동 환주산의 정수장(현 마산박물관 일대)을 거쳐 시내에 공급되었습니다. 

東京土木學會가 1982년 펴낸 『日本土木史(大正元年-昭和15年)』에는 이 상수도 설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본 수도의 본원지는 부외(府外) 창원면 반룡산의 계곡에 설치된 저수지로서 댐은 석적(石積) 콘크리트조, 제방 높이 20.2m, 제방길이 73m, 유효 수심 15.5m, 수 면적 61,000㎡, 저수량 383,000㎥이다. 댐은 반원형의 취수탑을 가지고 있으며 상중하 3단의 취수구가 있어 이곳에서 부내(府內, 마산부내) 자산동 정수장까지 도수관(導水管) 주철관경 3,000mm, 연장6,100m를 부설하고 있다. 정수장에는 양수정과 침전지, 그리고 물의 흐름을 느리게 하는 완속지 및 배수지를 설치했다. 침전지는 철근콘크리트조 3조, 용량1,215㎥, 완속지는 2곳에서 546㎡를 통과하게 하고 염소멸균(鹽素滅菌)하여 배수지에 저류한다. 배수지는 철근콘크리트조 2곳 1,413㎥이다. 배수관은 주철관을 사용하고 있고 본 관경 300mm이하, 총 연장 22,407m로 되어있다」

이 기록을 통해 건설초기의 수원지 시설구조를 잘 알 수 있습니다만, 글 중 주철관경 3,000mm는 300mm의 오자인 듯합니다.

다음 그림은 이 글에서 연장 6,100m라고 표현된 수원지에서 정수장까지의 송수관이 표시된 도면입니다. 붉은 선이 도수관이며 정수장에는 양수정, 배수지, 침전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 아래의 현 위성사진과 비교해 보면 대략 도수관이 지나간 위치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노란색 점이 팔룡산 수원지, 연두색 점이 자산동 정수장 위치)

지금은 마산박물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자산동의 정수장이 준공되어 통수식을 할 때, 도지사와 진해요항사령부 사령관까지 참석하여 성대하게 기념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산동 이 터에는 준공을 기념해서 당시 마산부윤 판원지이(板垣只二 / 제5대부윤 / 1928.3-1930.10 재임)가 석각해 놓은 「水德無疆(수덕무강)」이라는 넉자와 그 글을 庚午春(경오춘/1930년 봄)에 새겼다는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한반도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줄로 알았던 일제관료의 확신과 힘센자의 너그러움까지 서려있는 글입니다.

이 수원지 만으로는 마산에 필요한 공업용수를 해결할 수 없어서 1938년 낙동간 취수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팔룡산 수원지는 해방 8년 후인 1953년 저수량을 늘이기 위해 둑을 높여 마산시민의 식수공급을 감당했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화 때문에 1970년대에 그 기능을 낙동강 취수장으로 넘겨준 후 팔룡산 수원지는 제 수명을 마쳤습니다. 지금은 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산시민들에게 근대적인 상수도를 제공했던 이 수원지는 2005년 일제강점기가 남긴 중요 유산으로 인정되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199호'로 문화재청이 지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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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변천 - 2 순조 말기인 1832년경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따르면, 창원도호부는 부내면(府內面), 동면(東面), 북면(北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등 5개 면을 두었다. ..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

오늘부터 포스팅하는 자료는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 사업 &lsquo;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rsquo;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본 재개..

시·도 금고 관리는 탈석탄 금융기관에

박종권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공동대표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사를 포함해 총자산 규모가 4경 5000조 원(미화 39조 달러)에 이르는 전 세계 450개 기관의 투자가들은 석탄발전 사업에 대한 신규 프로젝트 금융이나 투자 중단을 선언..

<조선토목사업지>의 마산 상수도

이 글은 1928년에 펴낸 <조선토목사업지>에 기록된 마산의 '상수도' 편이다. 초벌 번역이라 글이 거칠다. 마산은 경상남도의 제일 중요한 항구로서 내지 및 연안 항해선박의 중요 기항지이다. 또한 (항구의) 뒷편으로는 마산선과..

<조선토목사업지>의 마산항만

이 글은 1928년에 펴낸 <조선토목사업지>에 기록된 마산의 '항만' 편 번역문이다. 초벌 번역이라 글이 거칠다. 그림은 책의 표지와 목차이다. 마산항은 경상남도의 중앙 진해만의 가장 안쪽에 있다. 동경 28도 33분, 북위..

학봉 산악회 진주 비봉산 산행 2

2020년 6월 6일&sim;7일(금&sim;토, 1박2일) 참가회원 8명 : 김재현&middot;서익진&middot;정규식&middot;신삼호&middot;손상락(글쓴이)&middot;임학만&middot;신성기&middot;..

학봉산악회 진주 비봉산 산행 1

2020년 6월 6일&sim;7일(금&sim;토, 1박2일) 참가회원 : 김재현&middot;서익진&middot;정규식&middot;신삼호&middot;손상락(글쓴 이)&middot;임학만&middot;신성기&middot;허정..

새로움을 꿈꾸며 - 8 / 건설 안전

<안전사고 원인은 부패 &middot;&middot;&middot; 우리 안전한가?>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저녁, 경악스러운 긴급뉴스가 전국을 뒤덮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새로움을 꿈꾸며 - 7 / 사회적 가치

<모두의 행복을 위한 길 &lsquo;사회적 가치&rsquo;> 걱정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 아니다. 저출산, 고령화, 자살률, 노인빈곤율 모두 세계 상위다. 2011년부터 OECD가 해온 '더 나은 삶의 질 지수(Better ..

새로움을 꿈꾸며 - 6 / 면책

공직자를 춤추게 하는 &lsquo;면책&rsquo; 2016년 1월, 갑작스러운 폭설로 제주공항이 마비되었다. 예상치 못하고 공항으로 나온 승객들은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공항 당국에서 모포와 편의 물품을 제공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