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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형량에 있어서 이교재보다 적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많은 1년 형이다.

다음으로 서석천의 경우, 1949년 4월에 발간된 한 언론에 실린 19명의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이 있다.(민주중보 제1034호(7권) 1949년 4월 29일자. 이곳에 실린 명단은 沈倫, 金義植, 南海, 咸陽 金守東, 洪源轍, 徐錫天, 孫吉童, 朴洙東, 統營 金宜錫, 洪鍾濟, 宋孟守, 朴○漢, 馬山 金浩鉉, 高昇柱, 卞甲섭, 金英煥, 洪斗益, 卞相福, 李基鳳 등이다.)

들 중에서 예컨대 마산지역 출신으로 구분된 金浩鉉, 高昇柱, 卞甲燮, 金英煥, 洪斗益,卞相福, 李基鳳 등은 모두 삼진의거 때 피살당한 8의사들이다.

서석천은 남해와 함양 지역의 인물로 속해 있는데, 이로 보아 이교재와 같은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49년에 반민특위경남조사부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을 때, 당시 조사관들은 진동의 창의비에 참배를 하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기미독립운동 당시 피체포자인 서석천도 동행하였다.(이때 체포된 인물 중 삼진의거 때 일본헌병의 일원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았던 심의경이 포함되어 있다. 62세였던 그는 함안군 법수면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죄로 체포된 인물 중에 진동면 고현의 송도에 사는 金尙圭도 포함되어 있다.)

徐正奎(1889~1949)는 창원의 진동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고현의 만세시위 참여하였고, 이어 4.3시위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그 역시 제령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이교재와 같이 진주지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인터넷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관리번호 31950) 

출신지가 진동이고 고현과 4.3의거에 잇따라 참여하였음에도 의거 직후에 피체를 피한 채 다시 진주에 가서 활동한 것을 보면, 이교재 역시 이러한 궤적을 밟았으리라고 본다.

李炳秀(1896~1960)의 출생지 주소는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97번지이다. 이 주소는 현재 동대 마을에 있는 진전우체국 옆으로, 이교재와 바로 이웃한 곳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이병수는 이교재가 통영에서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을 당시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에”라는 김형윤 기자의 회고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두 사람은 친밀한 동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전면 오서리가 고향인 권영한의 죄명도 집행원부에 따르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이며 이교재와 같이 9월 25일에 최종적으로 6개월 징역형이 확정되었다.(이들은 범죄인명부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인 형명이나 형기를 알 수는 없으나 이병수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동·진전·진북의 3개 면을 일컫는 삼진지역에서는 4.3삼진의거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못지않게 체포 투옥된 이들이 있지만,(「창원소요판결, 징역 1년 이하」, 매일신보, 1919년 5월 29일자 기사에 인명 朴和烈, 甘泰舜, 具在均, 薛灌銖, 裵龍文, 曹潤鎬, 孔道守, 張相五, 金相鎭, 金世元, 沈相璘, 申甲先, 曹喜舜, 史致洪, 金道根, 李大鎬, 金斯文, 金介同, 孔仕千, 金昌實, 崔介同, 申壽鉉, 安相錫, 金瀅源, 崔世植, 趙鏞瑨, 徐鎔守, 金南守, 許鎭, 權寧祚, 權寧震, 權五奎, 權泰濬, 白承仁, 盧秀?, 朴淳祚, 金鍾顥, 權五成, 李敎瑛 등의 이름이 보인다. ) 이들은 대부분 경성지방법원이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와 달리 위의 6인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날에 같은 죄명으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1923년의 통영사건 때에도 오서리 출신의 이만갑이라는 진주경찰서 고등형사에게 체포되었다고 알려졌는데,(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3.1운동 때에도 진주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에 삼진지역의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법정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컨대 이교재 일행은 삼진지역의 면민들이 연합대를 구성하여 진행한 3.1운동에 참여한 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진주에 가서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다 그곳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복심법원에서의 형기를 마쳤다면 이교재는 1922년 3월 24일에 출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는 1년 3개월간의 형기를 마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1920년 12월 24일에 출옥한 셈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이교재는 출옥 직후에 상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아직껏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건이 있다. 1922년 4월 18일이 판결 날짜로 되어 있는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이름은 이교재, 나이는 37세, 본적/주소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이며, 죄명은 ‘대정 8년 제령제7호 위반’”이다.

판결기관은 마산지검 충무지청으로서 주문은 ‘죄가 되지 않음’이었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622&evntId= &evntdowngbn=N&indpnId=000014584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앞에서 본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인한 복역기간이 1년 3개월이었다면 출옥 이후 1년 4개월여 만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달리 진동면사무소 소장의 범죄인 명부에 기재된 죄명은 ‘기부금품모집취제규칙위반’이며, 형명과 형기는 ‘벌금 30원’, 판결청은 ‘마산분국’이다.

국가기록원 기록과 달리 죄명이 구체적이며 그에 따른 벌금까지 부과한 것이다.

이 「기부금품취체규칙」은 융희 3년(1909) 3월 1일에 각령 제2호로 관보에 실렸는데, 기부금품을 모집할 경우에는 모집 목적 및 방법, 모집 금품의 종류, 수량 및 보관 방법, 모집자의 주소· 직업· 성명· 연령 등을 갖춰 내부대신 및 사업 주무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는 통감부가 당시에 불기 시작한 민립학교의 기부금 모집을 통제하여 학교 설립을 차단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김효정, 「韓末 民立 師範學校의 設立과 敎育救國運動」,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석사논문, 2015.2, 31쪽)

이 규칙이 이교재에게도 적용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기부금을 모집하여 어떤 용도로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해에 통영에서 실제로 일어났듯이 독립군자금 모집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라고 짐작해 보지만, 결정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다면 이 기부금 사건도 이교재가 단독으로 실행한 것이라기보다 임정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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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건들을 道內 일원에 배부하다가 오서리 출신의 경찰인 이만갑에 의해 체포되어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졌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참여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919년 7월 3일에 경상남도 장관인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낸 「소요에 관한 건(제7보)」에 따르면(문서제목,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문서철명, 大正8年 騷擾事件に關する道長官報告綴 7冊內の7, 문서번호, 「慶南地親第491號朝鮮總督府 內秘補 135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세가 점차 안정되어 가지만 아직도 강박문서가 때때로 각 방면에 배부되며 지난달(6월) 11일에 종래 李彰東의 명의로 진주에서 강박장을 배부하고 있던 이교재 체포(밑줄 필자)에 의해 금후는 화근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뒤 지난달 24일에 도청 및 진주군청에서도 강박문서를 송부…”하고 있다면서 군내 유력자 77명을 진주문묘에 모아 놓고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교재는 6월 초순에도 이른바 강박문서를 진주에서 배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이창동의 명의’라는 것이 이창동의 이름으로 활동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교재가 저 이름으로 독립 관련 문서를 배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3.1만세시위 직후부터 죽 계속된 것인지의 여부도 역시 확인하기 어렵지만,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과 6월 초순까지 진주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다.

진주경찰서에 잡혀간 이교재는 진주재판소를 거쳐 1919년 9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고 상소를 취하한 다음 9월 25일에 형이 확정되어 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大正 8年(1919) 執行原簿(大邱覆審法院),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752. 그러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정보에는 “삼일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 배부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로 기술되어 있다.h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 do?goTocode=20001 “경남북 일대”라는 부분도, 3년 복역이란 부분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교재」항에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이 역시 오류이다.)

당시 이교재와 같은 날에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을 언도받은 인물과 구형량은 다음과 같다.

<표 1> 3.1운동 당시 이교재와 일행의 재판 기록

성명 형량 죄명 재판소 형 확정일 형무소
李敎載 2년6개월 대정 8년 제령제7호 및 출판법 위반 대구복심법원 1919년9월25일 진주
沈相沅 1년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錫天 10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正奎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李炳秀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權寧漢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일제 당국이 이교재와 일행에게 언도한 죄명은 ‘대정 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출판법 위반의 구체적 내용은 ‘제1항 國交를 저해하고 政體를 붕괴케 하거나 국헌을 문란시키는 문서 및 도서를 출판했을 때는 3년 이하의 役刑에 처한다. 제2항 외교 및 군사의 기밀에 관한 문서 및 도화를 출판했을 때는 2년 이하의 역형에 처한다’ 등이었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역사문제연구 18, 2007, 14쪽)이었다.

잘 알다시피 制令이란 일본의 식민지배의 효율성과 자의성의 극대화를 위해 조선총독에게 부여된 제령제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법률을 말한다.

일본정부는 1910년 8월 29일의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라는 긴급칙령 324호를 발포하여 일제하 조선의 법률은 조선총독부령, 곧 제령의 형식으로 제정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김창록, 「제령에 관한 연구」, 법사학연구 26, 2002, 109~171쪽)

강점기 35년간 제정된 제령은 모두 681건으로 분야별로는 경제와 산업이 466건, 사법·경찰이 157건, 기타 사회, 문화, 행정 순이다.(한승연, 「제령을 통해 본 총독정치의 목표와 조선 총독의 행정적 권한 연구」, 정부학연구 제15권 제2호, 2009, 180~183쪽)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인사들을 처벌하는데 사용된 ‘대정8년제령제7호’는 이 운동이 발발된 직후에 제정된 것이다.

대정8년제령제7호는 3.1운동 참가자에 대하여 보안법 대신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총독부내 사법부 장관의 제언으로 제령을 작성한 뒤 도쿄의 법제국과 교섭하여 이것을 완성하였다.

이를 4월 15일에 ‘정치와 관한 범죄처벌의 건’으로 공포 시행하게 된 것이 이른바 대정8년제령제7호이다.(최고 2년형으로 제한되어 있는 기존의 보안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은 제1호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제2조 전조의 죄를 범한 자가 발각 전에 자수하였을 때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다만 내란죄에 해당하는 자는 제령제7호를 적용하지 않는다. 제3조 본령은 제국 밖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제국신민에게도 이를 적용한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50~152쪽). 내란죄를 적용한 시위는 48인 사건, 안성사건, 의주사건, 수안사건 등이었다. 이는 주재소를 습격 방화하거나 관공서를 파괴, 공문서기 집기류를 훼손한 행위, 일본인 상점을 부수거나 호적원부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였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155~156쪽)

3.1운동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은 총 7,816명 중에서 보안법 위반자가 5,601명으로 가장 많고 소요·출판법 276명, 제령제7호 위반자는 161명에 달하였다.

이교재의 경우 출판법과 제령제7호를 동시에 위반함으로써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인원수는 각각 74명과 13명이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4~146쪽)

출판법 위반의 내용은 독립선언서, 곧 허가받지 않은 문서의 작성과 출판에 관여했는지, 독립선언서를 교부, 반포했는지에 따라 6개월의 형량차가 있었다. 또한 이교재는 피검자의 6.2%에 해당하는 제령제7호로 처벌을 받았다.

제령 위반으로 2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이는 모두 13명인데, 그에 포함된 것이다.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시위를 계획한 이른바 ‘48인 사건’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이는 최남선과 이갑성 등 24명이다.

이들 중 최남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5~148쪽). 말하자면 48인도 보안법 제7조로 처벌을 받은데 비해 이교재와 그 일행은 3.1운동 이후에 만들어진 제령제7호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교재 일행이 진주에서 체포된 시기는 6월이었기 때문에 4월에 제정된 제령제7호를 적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 행위가 제령 제정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령제7호를 소급하여 적용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윤상태와 같은 국권회복단 멤버들도 대정 8년 7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피고’로 재판을 받았으므로(「윤상태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99권-삼일운동과 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p:/db.history.go.kr/id/hd_009_0040_0080_0140 참조) 이교재 일행만이 제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무거운 죄를 우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죄명과 형기는 진전면 소장의 범죄인명부와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명부에도 확정 일자는 대정 8년 9월 25일이지만, 대면 재판이라는 사실을 명기하였고, 거기에 죄명은 ‘출판법 위반’이었다. 아울러 형명과 형기는 징역 1년 3개월로 적혀 있다.(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교재항, 이 명부는 삼진독립운동사, 252쪽에도 게재되어 있다.) 

제령제7호 위반은 해당되지 않았고, 출판법으로만 징역형을 언도한 셈이다.

출판법 위반으로도 1년 3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것도 비교적 무거운 것이지만, 대구복심법원의 형기가 2년 6개월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년 3개월의 형량이 줄어든 것이다.

대구복심법원에서 결정한 판결내용과 범죄인명부의 그것이 다른 것은 궁금한 부분이지만, 출판법만 적용한 것은 다른 지역의 시위대와 달리 관청을 공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문서를 불태웠다거나 하는 등의 보안법 위반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병수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형을 받았으므로(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병수항 : 삼진독립운동사, 267쪽) 복심법원의 집행원부에서 보이는 제령제7호 위반은 잘못 적용된 법령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시 3.1운동 참가자에 대한 재판에서 법리상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변호인측에서 제기한 ‘공소불수리’, 곧 검찰이 독립운동가들을 제령제7호위반으로 공소한 것은 잘못이며 따라서 그들은 무죄라는 주장이었다.(「獨立宣言事件의 控訴公判 急轉直下로 事實審問에, 問題의 核心인 「公訴不受理」은 自歸水泡」, 동아일보, 1920년 9월 21일자)

결국 법원은 검찰의 공소가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기왕의 치안법이나 출판법을 적용하여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교재에게도 이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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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3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들이었다는 기술이 있지만(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2001, 234쪽) 어느 정도의 부농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서리 578번지의 대지 규모를 보면 적어도 중농 이상의 농가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세 필지로 구획된 이곳에는 1931년 당시 목조 초가 본채 건물 3평과 부속의 목조 초가 3평, 그리고 물건적치용 건물 각각 1평 5홉, 1평 2홉 등 모두 4채가 있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 고유번호 1901-1996-359486, 2017년 10월 21일 발행) 평수가 작은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기보다 축소해서 신고하는 당시의 관행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서리 중에서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동대 마을이었다.

오서리는 조선시대 진해현 서면에 있던 다섯 개 마을, 곧 동대, 서대, 회동, 탑동, 월안이라는 마을을 행정적으로 통합하여 만든 동리이다.(진전면과 오서리라는 행정구역명의 탄생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이후의 일이다. 창원군 진서면과 진주군의 양전면이 통합되어 창원군 진전면으로, 서면에 있는 다섯 개 마을을 통합하여 오서리가 되었다고 한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오서리 참조. 그러나 1872년에 편찬된 진해현지에는 서면 10개리 중에 월안리, 탑동리, 회동리, 대곡리가 각각 병기되어 있으며, 1992년에 펴낸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의 「진해현지편에는 진전면 13개리 중에 오서리가 있으나 이에는 竹谷, 虎山, 月安, 塔洞, 檜洞, 牛色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금란계편집위원회,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 4~8쪽. 그러므로 죽곡-혹은 대곡-이 언제 동대와 서대로 나누어졌는지, 또 우색과 호산이 언제, 왜 빠져나갔고, 오서리라는 행정명이 탄생하였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우색은 현재 울빛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이곳의 한글 지명이 대실[竹谷]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오서리의 전체 인구는 345세대에 957명이고, 남녀는 각각 486명과 471명이었다.(진전면지편찬위원회, 진전면지, 2001, 31쪽. 이 수치는 약간 줄기는 했지만 현재에도 비슷하다 - 동대리 이장 권오익과의 인터뷰, 2018.4.12. 동대마을회관.  호수/인구, 남/녀 = 동대 176/530, 272/258   서대 76/204, 105/99   회동 40/94, 48/46   탑동 22/57, 29/28   월안 31/72, 32/40  총계 345/957, 486/471)

이 마을은 대개 동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대에는 안동권씨가, 서대마을에는 밀양박씨가 세거지로 삼았으며, 회동과 탑동, 그리고 월안에도 권씨와 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곧 오서리의 동성집단은 권씨와 박씨가 다수이며, 나머지는 다른 성씨가 뒤섞여 있는 양성 중심의 농촌이라 할만하다.

성주이씨인 이교재가 동대리에서 출생하여 왜 이곳에서 활동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성주이씨의 세거지는 오서리에서 북쪽의 진전천과 뜰을 건너 자리하고 있는 곡안리이다.

그럼에도 이교재의 선대들은 오서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이조년을 중시조로 삼고 있는 성주이씨문열공파보에 따르면, (星州李氏文烈公派譜 권지2, (대구:고전출판사, 1991),  825쪽. 물론 이 족보는 1990년대에 편찬된 것이라서 이교재의 거주지를 곡안으로 기록하였다.) 그의 증조부인 應斗(1753~?. 9. 15)의 묘가 竹谷 兩岩間인 곧 오서리이며, 부친인 鳳華(1852~ ?.11. 5)의 묘지도 진전면 오서리 앞산 선영 아래로 기록되어 있다.

조부인 亨愚(1827~1904. 6.17)의 무덤을 고성에 쓴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여하튼 부친이나 이교재가 오서리에서 살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랫동안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생활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동족 마을이 우세한 이 지역에서 이교재의 출생과 생업, 그리고 사회 활동은 조금 독특한 부분이며, 특히 동대 마을에서도 안동권씨들이 진사를 많이 배출하였다고 하여 ‘진사골목’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뿌리를 내렸던 사실도 앞으로 궁구해 볼 과제이다.

그가 홍순영의 딸인 洪泰出(이 이름은 김형윤의 기행문에 출현한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과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홍태출은 정해(1887) 8월 14일에 출생하여 계축(1973) 9월 19일에 사망한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교재와 동갑이다.

부부 사이에 아들은 없고 1928년 11월 6일 생의 泰淳이란 이름의 딸이 한 명 있다. 나이 40을 넘어 첫 딸을 본 것이다.

이교재가 통영군자금 사건으로 4년형을 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한 것이 1928년 1월 28일의 일이니, 그 해 말쯤에 딸을 얻은 셈이다. 딸의 출생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들의 결혼 연도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또 사망 이후, 언제인지 역시 알 수 없으나 李正淳을 양자로 두었고, 딸인 태순은 韓禎鶴과 결혼하였다. (태순의 자녀인 한철수는 창원에 소재한 고려철강의 회장이자 현재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의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동대리는 특색 있는 동족 중심의 연하 마을로 분류되어 있다. 멀지 않은 동쪽에 창포 바다가 있지만, 연하 촌락으로 구분한 이유는 진전면 최북단의 여양리에서 발원한 진전천이 이 동네의 외곽지대를 흘러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으면서 진전면 시락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평탄한 지형의 남쪽은 상당 부분 광활한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 초에 동대 마을에는 안동권씨가 102호, 417명, 동성 이외의 호수 및 인구수는 39호와 122인으로서, 권씨는 총인구의 약 77%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이들은 19세기에 진해현의 행정치소가 있던 동면에는 한 명도 살지 않았다. 동면에는 김해김씨와 완산이씨가 대성이었다(武田幸男, 學習院大學藏 朝鮮戶籍大帳の基礎的硏究 –19世紀, 慶尙南道鎭海縣の戶籍大帳をじて-, 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 1983, 56쪽).

마을 내의 주된 직업은 농업이었다. 같은 시기의 토지를 기준으로 한 소유형태는 지주 6호, 자작 12호, 자작 겸 소작 28호, 소작인 80호, 기타 직업 15호였다. 기타는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였다.

세족인 안동권씨는 대략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에 경북의 안동에서 이곳으로 와서 뿌리를 내렸고, 숙종조(1674~1720 재위)에는 이조참판 권용견을 배출하면서 100여 년만에 타성을 압도할 만큼 번영하였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1933, 862쪽)

이 점에서 오서리, 특히 동대 마을은 권씨 중심의 비옥한 농업지대였고, 그를 바탕으로 지주 소작제도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최씨들이 집거하고 있는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도 문중 자산을 비교적 빈곤한 동족에게 유리하게 소작토록 하고, 그 수익은 문중 자산 이용법 및 동족 구제 시설, 조상제사 비용으로 충당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 -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81쪽).

1930년대의 마을 내 자치 상황을 보면 다소 특이한 점들이 보인다.

당시까지도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門罰이라 칭하는 공동제제가 작동하였으며, 융화성이 많고 단결 역강하는 예절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78~879쪽)

또한 문중 재산이 있어서 자산의 경우 동족에게 대부를 해주는 방식으로 이식을 도모하였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사설학술강습회의 경비, 조상제사 비용, 동족 구제에 필요한 경비 등에 사용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일제 당국은 오서리에 부업장려회를 조직하여 가마니짜기와 양잠을 장려하면서 산업진흥을 꾀하였는데, 이를 통해 마을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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