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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 마산의 양조산업>

1904년에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東)주조장을 시작으로 마산에는 일찌감치 양조산업이 들어왔습니다.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주조장은 나중에 원전(原田)주조장으로 회사명을 바꿨는데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 1930년대 중반의 원전(原田)주조장입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마산양조산업은 1928년 그 생산량이 11,000석으로 늘어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드디어 국내 지역별 술 생산량에서 제1위를 차지했습니다.

마산청주업계의 호황은 이후에도 계속되면서 생산량이 해마다 증가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에 까지 그 이름을 떨쳤고, 1938년에는 양조량이 20,000석을 넘었습니다.

마산의 청주업자 조합에서 현 제일여고 자리에 있던 신사(神社)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본전 외에 자신들의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두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주류산업은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습니다.

아래사진은 마산 중앙동에 있던 양조공장(해방 후 삼광청주)입니다. 좌측 네모안 굴뚝 쪽이 천도원 주조장, 우측 원형 굴뚝 쪽이 나중에 삼광청주가 인수한 이데(井手)주조장입니다.

1930년대 건축된 건물로 보존 가치가 충분했지만 아깝게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그 아래 또 다른 사진은 미생(彌生)이라는 이름으로 제조했던 천도원 주조장의 술통과 마쯔모도주조장의 술통입니다. 

 

대규모 양조장은 대부분 1930년 이전에 설립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1930년대 이후에 신설된 양조회사는 많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주인 청주회사 외의 주조회사 설립은 약간 있었습니다.

먼저, 1937년 중앙동에 소주전문회사로 설립한 합자회사 마산중앙조선소주공장이 있습니다. 이 공장은 자본금 3만원으로 1937년 1월 1일 중앙동 3가 2-4번지에 설립한 회사로, 소주를 전문으로 생산 판매하였으며 사장은 일본인 산근재길(山根才吉)이었습니다.

이 밖에 한국인들이 즐겨 마셨던 탁주양조회사로 낙동양조소(1932년)과 동일양조장(1938년)이 설립되었습니다.

낙동양조소(대표 한국인 이달영)는 중성동 130번지에서 1932년 1월 28일 자본금 5천엔으로 설립되었으며, 동일양조장(대표 한국인 탁응조)은 1938년 1월 1일 오동동 149-28번지에 자본금 6천엔으로 설립된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 양조업계도 생산에서 판로에 이르기까지 전시 통제령의 구속을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각 양조회사는 생산능력에 따라 배정된 원료로 한정된 양만을 생산했고 생산품은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그 양이 지정 구분되어 공급되었습니다. 당연히 마산의 양조산업에도 그 영향이 미쳤습니다.

마산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포스팅하겠습니다.

간장 된장 등을 생산하는 장유산업도 마산을 대표하는 산업이어서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초 신포동 해안 매축지에 6,000평 규모의 부지를 확보하여 건립한 대형공장인 환금장유주식회사가 들어섰습니다. 이 거대한 회사 때문에 마산의 장유산업은 그 규모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생산량이 무려 3만 석이나 되었습니다.

환금장유(주)는 공장․건물․기계기구 일체를 일본의 유휴설비와 건물 등을 이전하여 설립한 회사로, 이곳에서 생산한 물품은 대부분 군수용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시작된 마산의 장유산업은, 전국에서 명성이 높은 몽고간장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외 식품가공업으로 1941년 3월 자본금 19만 5천원으로 마산에 있던 일본인들이 마산햄제조주식회사(1941년, 사장 常松泰)를 설립하여 월 평균 600마리의 돼지로 햄과 소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원식품공업소(1931년)가 남성동에 85평 규모로 설립되었습니다.

일본인 원자부(原紫部)가 설립한 원식품공업소는 어류통조림회사로 1936년 3,980상자, 1937년 4,796상자, 1938년 7,121상자, 1940년 6,828상자를 생산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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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산업>

1920년대 마산항의 물동량은 일본 국내의 불황과는 달리 오히려 더 늘어만 갔습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미곡이었으며 전체 수․이출액의 80%를 차지했습니다.
1925년 마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약 15만석이었는데 1928년에는 65%가 증가한 25만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곡 수․이출의 증가는 수치상으로는 무역의 증대였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한 미곡의 약탈적 반출이 점점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미업은 1911년 하목철삼(夏目哲三)에 의해 전기모터를 설치한 것이 기계화된 정미소의 시작인데 그 후 많이 늘어나 1924년 현재 25개소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의 것이 12개소, 일본인의 것은 13개소였습니다.

섬유공업은 회사령 폐지 이후부터 마산에 유치되기 시작한 업종입니다.
특히 1923년 6월 일본 오사카의 본전안오랑(本田安五郞)이 전 조선면화 마산공장을 매수하여 그 해 10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주식회사 마산조면공장이 1924년 1,300평의 부지에 280평의 공장과 50평의 하치장을 신축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그 후 1927년에는 태전성일(太田誠一)에 의해 창립된 태전마사(太田麻糸) 공장이 부지 5,000평에 건평 1,000평의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1920년대는 마산-진주 간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서부 경남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북마산 역 주변에 역세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제법 규모 있는 점포들이 원마산에 들어서게 되면서 상가지역이 두드러지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마산은 창동․남성동․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부근과 남성동 해안 매축지에서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이 즐비했습니다.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영했던 것입니다.

신마산의 상가는 京町(두월동) 거리의 양쪽에 형성되었지만 일본인조차도 값이 싼 원마산에서 구매를 하였으니 상거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상인들은 판매업보다는 여관․요식업․대금업 등으로 업종을 바꾸거나 대상(大商) 중에는 원마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도 있었습니다.

금융기관으로는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지방 농공은행이 통합하여 창설되어 전 경상농공은행이 있던 자리에 1918년 10월 개설되었다)이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으며 이 외에 마산금융조합이 신마산에, 구마산 금융조합이 척산천 이동(以東)으로 구역을 분할하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밖에 농민을 대상으로 한 내서금융조합과 사금융(私金融)인 마산금융회사 등도 있었다.

1910년 신설된 구마산 역은 도시 범역의 확산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구마산 역 부근 시장통에는 상업조사자가 4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승객의 숫자도 마산 역보다 많아 부산 대구에 이어 번성했던 역이었습니다.
화물은 경부선․호남선․경의선․진해선 등과 연결되었으며 1년간의 승차인원이 176,104명, 하차인원은 153,495명이었습니다.
부근에는 상업학교․형무소지소․보통학교․식은지점․내서와 구마산 양 금융조합․금융회사․기업전습소․조면공장․정미소 2개․양조장 4개 등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 구마산 역에는 신마산과 다니는 승합차가 27대 있었으며 부외(府外)와 연결되는 자동차가 준행되고 있었다.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양조산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산전 장유양조장 / 현 몽고간장 / 1950년대 촬영>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 1920년대>

 

                                  <소화주류주식회사 / 무학주조 전신>

1926년에는 약 7,450석을 생산했으나 역시 부산의 생산량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8년에는 당시의 조합원 12개 공장에서 세운 계획량 9,853석 보다도 1,200석이 더 많은 11,000석을 생산하여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한국의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제1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후 마산의 청주업계는 호황을 지속했고 생산량은 해마다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산의 청주는 국내 시장에 이어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 팔려 나갔습니다.

1920년대에 설립된 마산의 양조회사는 합자회사淸水양조장(1921년), 濱田주조장(1923년), 村崎주조장(1923년), 千島園주조장(1925년), 山邑주조주식회사마산공장(1929년), 昭和주류주식회사(1929년, 현 무학주조) 등입니다.

이 중 천도원주조장이 최근 철거된 삼광청주의 전신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일제는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전환하면서 면허를 발급했습니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와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영세했습니다.
한 예로 1928년 마산의 탁주 생산량은 불과 1,500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마산에서 생산된 장유는 그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일원뿐만 아니라 멀리 원산과 청진에 까지 판매되었습니다.
장유업은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마산의 장유 생산량은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였습니다.

일제시대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술과 간장 된장 제조업은 지금까지 무학주조와 몽고장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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