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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박문7

마산항지(1926년) - 9 - 건권(乾卷) /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4. 융희 황제의 행차 명치 42년(1909) 즉 대한 융희 2년(3년의 誤植) 1월 10일, 부왕인 광무(光武) 황제의 선양을 받으신 한황 이척(李坧)폐하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남쪽 순행(순종황제는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대구, 부산, 마산을 순행했는데 이를 남순행(南巡幸),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평양, 신의주, 의주, 개성 등지를 순행했는데 이를 서북순행(西北巡幸)이라 했다) 길에 올라 부산에서 철도로 마산으로 오시고 마산 이사청을 행재소(行在所)로 삼으셨다. 이에 앞서 어가(御駕)가 남순 하신다는 소식에 관계당국은 밤낮 가리지 않고 봉영(奉迎) 준비에 분주하고 청록의 물방울이 그려진 큰 봉영문(奉迎門)이 마산역전, 교마치2정목, 반룡교 부근(현 교바시, 京橋), 동 1.. 2022. 8.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조선 왕조 최후의 황제인 순종 이척(李拓)은 1909년 1월 10일~12일(원문에는 '등극한 1907년(융희 원년) 10월'로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에 소위 경부·경의선 철도부설 시찰이라는 명목 아래 마산포를 순행하였다. 이 순행을 축하하는 뜻에서 일본의 연합 함대가 마산만에 투묘(投錨)하고 101발의 축포를 터뜨렸다. 한편 마산 이사청(현 경남대 평생교육원) 정문과 숙사(宿舍)인 이사관사(부윤관사-현 마산종합복지관) 앞 그리고 경교(京橋, 제일각 앞)와 창원교(전 럭키회관 앞)에는 한제폐하(韓帝陛下)의 어남순(御南巡) 환영대송문(歡迎大松門)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수행원은 통감 이등박문, 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등 외교 문무백관이었다. 숙소는 삼증(三增) 이사관.. 2016. 10. 3.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5. 이등방망이 피살보 115. 이등(伊藤)방망이 피살보(被殺報) 1909년 10월 27일(이등 피살 이튿날) 마산공립보통학교 제4학년 정영관(본교 3회 졸업생)은 완월 의숙(義塾)학원 생도들과 하학 도중 성지학원 앞에서 만났다. 그는 이등박문이 북만주 ‘하르빈’이라는 정거장에서 한인 독립군 안중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전했다. 전보 통신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인 만큼 신문보도인 경성일보를 본 흑목원이(黑木源二) 교장이 전교생을 모은 가운데 울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등이 어떠한 위치에서 무엇을 하는 위인인가는 확실히 모르면서도 한인의 원수라는 것만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일부 국민들은 덮어놓고 통쾌하게 생각했으며, 이등박문이라는 것이 와전되어 이등방망이가 한국인의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고들 하였던 것이다... 2016. 9. 26.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 2011. 12. 28.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2011. 11.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마산전도(馬山全圖)*- 1907년 / 청목항삼랑(靑木恒三郞) / 율원경포당(栗原耕浦堂) / 1 : 4,500 / / 일본국회도서관 한일병합 직전 시기의 신마산 조계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제목인「마산전도」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을 ‘신마산’ 혹은 그냥 ‘마산’이라고 불렀으며 원래부터 한국사람들이 살았던 원마산(마산포)을 ‘구마산’이라 불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마산 최초로 개설된 중앙에 있는 도로를 진해본통(鎭海本通)으로 표기하는 등 도로의 명칭을 일본식으로 지어 사용하고 있으며 조계지 주변의 산 이름까지 일화산(日和山), 영성둔산(影星屯山) 등 그들 멋대로 지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지도가 제작된 시기에는 아직 개설되지.. 2011. 1.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2010.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