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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4

기억을 찾아가다 - 4 4.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Ⅱ - 미군들 미군들에 대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졸저 『상식의 서식처』에서 빌어 오고자한다. 「피난처에서 돌아온 날부터 나는 참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땅 흔들림을 발로 느낄 정도로 요란스레 굴러가는 탱크와, 탱크 위에 달린 대포보다 훨씬 큰 포를 끌고 가는 차, 엄청나게 크면서도 쇠뭉치로 만든 것 같이 견고해 보이고, 그러면서 간혹 꽝하고 큰 방귀를 뀌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달리는(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방귀쟁이 차’라 불렀다) 큰 군용차 등이 모두 신기하게 보였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그 위에 앉은 모든 군인들이 희고 검은 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란 사실이었다. 우리 집은 마진국도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광경들을 많이 볼.. 2017. 11.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두 번의 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 2010. 5. 3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왜? 원 세조 쿠빌라이와 고려 충렬왕은 대일본 원정기지로 남도의 작은 포구 합포를 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당시 이 도시가 가졌던 자연적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정리된 내용은 대략 다음의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위치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합포가 해로(海路)상 일본과의 최단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리고 거제도와 쓰시마 사이를 지나는 쓰시마 난류를 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첩경(합포-거제도-대마도-이키-일본본토)이라는 점입니다. 해로 뿐 아니라 육로도 수도 개경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에 위치한 항구가 합포였습니다. 둘째는 항구시설입니다. 합포에는 이미 조창이었던 석두창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다른 포구보다 양호한 항구시설을 가지고 .. 2010. 5.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13세기 후반, 고려의 남쪽 해안에 있던 합포는 행정상으로 경상도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의안군 관할의 영현(領縣)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 현종 군현체제 개편 때 지금의 양산인 양주에서 금주로 이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합포는 동아시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국제군사도시였습니다. 당시 세계최대 강국이었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이곳 합포를 일본정벌기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때는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여원연합군은 지금의 합포고등학교 남쪽 일대를 싸고 있던 현 자산성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전함건조(戰艦建造) 및 군사훈련을 비롯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둔전은 황해도 봉주(봉산)과 경상도 금주(김해)에, 선박건조는 제주도와 전라도 쪽에서 맡았습니다. 군사.. 2010.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