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바무라3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6) -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1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조선 중기, 대동법이 시행되자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漕倉)이 설치 되었다. 경남에는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駕山倉)이, 1765년에는 밀양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마산포구에 석두창이란 조창이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없어지고 이때 다시 신설되었다.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파출소 주변 1,700여 평의 부지에 총 8동, 53칸(間) 규모에 ㄷ자 형태로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창이 설치되자 먼저 관원과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이들을 상대로 생업을 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동리를 이루었다. 동성, 중성, 오.. 2015. 1.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2) - 강점제3시기 일본제국주의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년)에 이어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킨 1941년, 조선총독부는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마산에 결핵전문병원을 세웠습니다. 마산 가포지역에 있는 현 국립마산결핵병원의 전신입니다. 시작은 상이군인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 변화를 거듭해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 되었습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지역은 한 많은 땅입니다. 110여 년 전, 한반도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며 ‘지바무라(千葉村)’라는 이름으로 일본 어업이민의 전진기지가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포는 20세기 초입에 강대국의 발톱에.. 2013. 5. 20.
마른 멸치 언제부터 먹었을까? 최초 멸치생산 : 일본의 어업이민 우리나라에서 마른멸치(이하 멸치)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1905년 맺은 을사조약에 의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불법, 합법적으로 어로작업을 해오던 일본어민들에게 집단이주를 권유해 그결과 1909년까지 총1,146호 4,820명이 한국연안 40개 마을에 이주하였는데, 이중 60%이상이 남해안 연안마을에 이주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선진수산업을 전개하면서 마른 멸치를 선 보이게 되는데 멸치어장은 1910년 전후시기에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사람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경영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잡아서 그냥 먹거나 멸치젓갈이나, 말린 포로 먹는 정도였기 때문에지금.. 2009.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