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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2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마지막 조선 왕, 순종의 방문>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즉위 후 몇 차례에 걸쳐 지방 순행에 나섰습니다.
순종의 남부지방 순행은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간이었습니다.

마산 순행 일정에 대한 『승정원일기』순종 3년 1월 5일자 기록입니다.

「…… 9일에는 부산에 머무르고, 10일 오전 9시에 부산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25분에 마산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11일에는 마산에 머무르고, 12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 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45분에 대구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원래 통치자의 순행은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내각과 통감부 관원들을 대거 수행하고 순행에 나선 것은 순종의 권위와 권력을 내세워 지방민들을 통제하려는 일제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 아닌가싶습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순행의 정치적 해석보다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이곳 마산에 왔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에 오기 직전 부산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마산방문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내걸려있어 당시의 정세를 잘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궁정열차를 탄 순종은 1월 10일 아침 9시에 부산역을 출발하여 9시 59분 삼랑진에 도착하여 마산이사청 이사관과 동래부윤의 알현을 받았습니다.

11시 25분 마산역(마산중부경찰서 건너 편 벽산 아파트 자리)에 도착하여 역내에 마련된 편전에서 잠시 쉰 후에 12시쯤 이토 통감 이하 수행 관원들을 거느리고 어교를 이용하여 행재소가 마련되어 있는 마산이사청(현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행재소에서 마산의 중요한 관민으로부터 인사를 받았는데 모두 일제 관리와 군인들이었습니다.

  오후에는 창원부청(지금의 남성동파출소와 제일은행 일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경상남도 각 군 군수, 기타 고등관, 민간인 등을 만났습니다.

 

순종은 11일 하루를 마산에 더 머문 후 12일 화요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역을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에서 파견한 제1, 2함대에서 예포를 각 21발을 발사하며 지배자의 마산방문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왕의 행렬을 보기 위해 마산에 이르는 철도변과 각 역에는 사람들로 넘쳤다고 합니다.
약 3만 여명의 군중들이 모여 순종 일행을 맞이하였으며 떠날 때에도 연도에 모인 관민들이 각 역과 역 인근에서 만세를 외치며 순종과 일행을 봉송하였습니다.

2박 3일 간의 순종 마산순행 중, 행재소와 창원부청 간이 가장 긴 이동로였습니다.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남성동 파출소까지의 길입니다.

당시에는 신마산 일부에만 근대식 직선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신마산에서 장군동 다리까지는 일제가 놓은 근대식도로를 이용했고, 장군동 다리부터는 ‘진주가도’라 불렀던 옛 크리스탈호텔 정문 앞길을 지났습니다.

‘진주가도’는 근대기 이전에 진주와 창원을 잇는 큰길이었습니다.
현재의 창원 소답동에 위치했던 창원도호부에서 마산포를 거쳐 자산리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를 지나 밤밭 고개를 넘어 진동 양촌을 거쳐 진주로 가던 길입니다.

'진주가도' 중 장군동 중앙동 신월동까지의 길은 지금도 대부분 옛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봉건왕조 시대에 통치자가 마산을 방문한 것은 단 두 번입니다.
고려시대 일본정벌을 준비하던 여몽연합군을 격려하기 위해 마산에 왔던 충렬왕과 101년 전의 대한제국 순종, 융희황제입니다.

충렬왕이 마산에 머물 때의 기록은 상세하지 않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281년 5월 3일, 제2차 일본정벌을 준비하던 정동군을 격려차 마산에 내려와 3개월 가량 머물렀는데 우부승지 정가신을 대동하였고, 환주산에 있었던 현재의 자산동에 머물면서 중간에 김해에 다녀오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은 이와 달리 수행자의 숫자와 직위, 어가 행렬, 궁정열차의 배치까지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지났던 길,,,,
그 흔적의 가치는 없는 것일까요?
이 도시에 남겨진 과제는 없는 것일까요?
마지막 황제가 지났던 그 길을 기려 「순종로」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작년 10월 26일 포스팅했던 글이지만 연재라서 약간 수정해 다시 올렸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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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래 2010.11.29 20:06 address edit & del reply

    자주권도 없는 허울좋은 이름만의 허수아비 황제
    그깟놈의 일을 뭐하러 기념한단 말이오.
    치욕을 경계하는 역사로 남기려면 모를까?

    • 허정도 2010.11.29 21:39 address edit & del

      뜻은 님과 함께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고 자랑스런 역사도 우리 역사니 어쩝니까?

2010. 10. 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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