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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3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들이었다는 기술이 있지만(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2001, 234쪽) 어느 정도의 부농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서리 578번지의 대지 규모를 보면 적어도 중농 이상의 농가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세 필지로 구획된 이곳에는 1931년 당시 목조 초가 본채 건물 3평과 부속의 목조 초가 3평, 그리고 물건적치용 건물 각각 1평 5홉, 1평 2홉 등 모두 4채가 있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 고유번호 1901-1996-359486, 2017년 10월 21일 발행) 평수가 작은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기보다 축소해서 신고하는 당시의 관행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서리 중에서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동대 마을이었다.

오서리는 조선시대 진해현 서면에 있던 다섯 개 마을, 곧 동대, 서대, 회동, 탑동, 월안이라는 마을을 행정적으로 통합하여 만든 동리이다.(진전면과 오서리라는 행정구역명의 탄생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이후의 일이다. 창원군 진서면과 진주군의 양전면이 통합되어 창원군 진전면으로, 서면에 있는 다섯 개 마을을 통합하여 오서리가 되었다고 한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오서리 참조. 그러나 1872년에 편찬된 진해현지에는 서면 10개리 중에 월안리, 탑동리, 회동리, 대곡리가 각각 병기되어 있으며, 1992년에 펴낸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의 「진해현지편에는 진전면 13개리 중에 오서리가 있으나 이에는 竹谷, 虎山, 月安, 塔洞, 檜洞, 牛色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금란계편집위원회,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 4~8쪽. 그러므로 죽곡-혹은 대곡-이 언제 동대와 서대로 나누어졌는지, 또 우색과 호산이 언제, 왜 빠져나갔고, 오서리라는 행정명이 탄생하였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우색은 현재 울빛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이곳의 한글 지명이 대실[竹谷]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오서리의 전체 인구는 345세대에 957명이고, 남녀는 각각 486명과 471명이었다.(진전면지편찬위원회, 진전면지, 2001, 31쪽. 이 수치는 약간 줄기는 했지만 현재에도 비슷하다 - 동대리 이장 권오익과의 인터뷰, 2018.4.12. 동대마을회관.  호수/인구, 남/녀 = 동대 176/530, 272/258   서대 76/204, 105/99   회동 40/94, 48/46   탑동 22/57, 29/28   월안 31/72, 32/40  총계 345/957, 486/471)

이 마을은 대개 동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대에는 안동권씨가, 서대마을에는 밀양박씨가 세거지로 삼았으며, 회동과 탑동, 그리고 월안에도 권씨와 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곧 오서리의 동성집단은 권씨와 박씨가 다수이며, 나머지는 다른 성씨가 뒤섞여 있는 양성 중심의 농촌이라 할만하다.

성주이씨인 이교재가 동대리에서 출생하여 왜 이곳에서 활동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성주이씨의 세거지는 오서리에서 북쪽의 진전천과 뜰을 건너 자리하고 있는 곡안리이다.

그럼에도 이교재의 선대들은 오서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이조년을 중시조로 삼고 있는 성주이씨문열공파보에 따르면, (星州李氏文烈公派譜 권지2, (대구:고전출판사, 1991),  825쪽. 물론 이 족보는 1990년대에 편찬된 것이라서 이교재의 거주지를 곡안으로 기록하였다.) 그의 증조부인 應斗(1753~?. 9. 15)의 묘가 竹谷 兩岩間인 곧 오서리이며, 부친인 鳳華(1852~ ?.11. 5)의 묘지도 진전면 오서리 앞산 선영 아래로 기록되어 있다.

조부인 亨愚(1827~1904. 6.17)의 무덤을 고성에 쓴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여하튼 부친이나 이교재가 오서리에서 살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랫동안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생활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동족 마을이 우세한 이 지역에서 이교재의 출생과 생업, 그리고 사회 활동은 조금 독특한 부분이며, 특히 동대 마을에서도 안동권씨들이 진사를 많이 배출하였다고 하여 ‘진사골목’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뿌리를 내렸던 사실도 앞으로 궁구해 볼 과제이다.

그가 홍순영의 딸인 洪泰出(이 이름은 김형윤의 기행문에 출현한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과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홍태출은 정해(1887) 8월 14일에 출생하여 계축(1973) 9월 19일에 사망한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교재와 동갑이다.

부부 사이에 아들은 없고 1928년 11월 6일 생의 泰淳이란 이름의 딸이 한 명 있다. 나이 40을 넘어 첫 딸을 본 것이다.

이교재가 통영군자금 사건으로 4년형을 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한 것이 1928년 1월 28일의 일이니, 그 해 말쯤에 딸을 얻은 셈이다. 딸의 출생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들의 결혼 연도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또 사망 이후, 언제인지 역시 알 수 없으나 李正淳을 양자로 두었고, 딸인 태순은 韓禎鶴과 결혼하였다. (태순의 자녀인 한철수는 창원에 소재한 고려철강의 회장이자 현재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의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동대리는 특색 있는 동족 중심의 연하 마을로 분류되어 있다. 멀지 않은 동쪽에 창포 바다가 있지만, 연하 촌락으로 구분한 이유는 진전면 최북단의 여양리에서 발원한 진전천이 이 동네의 외곽지대를 흘러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으면서 진전면 시락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평탄한 지형의 남쪽은 상당 부분 광활한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 초에 동대 마을에는 안동권씨가 102호, 417명, 동성 이외의 호수 및 인구수는 39호와 122인으로서, 권씨는 총인구의 약 77%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이들은 19세기에 진해현의 행정치소가 있던 동면에는 한 명도 살지 않았다. 동면에는 김해김씨와 완산이씨가 대성이었다(武田幸男, 學習院大學藏 朝鮮戶籍大帳の基礎的硏究 –19世紀, 慶尙南道鎭海縣の戶籍大帳をじて-, 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 1983, 56쪽).

마을 내의 주된 직업은 농업이었다. 같은 시기의 토지를 기준으로 한 소유형태는 지주 6호, 자작 12호, 자작 겸 소작 28호, 소작인 80호, 기타 직업 15호였다. 기타는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였다.

세족인 안동권씨는 대략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에 경북의 안동에서 이곳으로 와서 뿌리를 내렸고, 숙종조(1674~1720 재위)에는 이조참판 권용견을 배출하면서 100여 년만에 타성을 압도할 만큼 번영하였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1933, 862쪽)

이 점에서 오서리, 특히 동대 마을은 권씨 중심의 비옥한 농업지대였고, 그를 바탕으로 지주 소작제도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최씨들이 집거하고 있는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도 문중 자산을 비교적 빈곤한 동족에게 유리하게 소작토록 하고, 그 수익은 문중 자산 이용법 및 동족 구제 시설, 조상제사 비용으로 충당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 -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81쪽).

1930년대의 마을 내 자치 상황을 보면 다소 특이한 점들이 보인다.

당시까지도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門罰이라 칭하는 공동제제가 작동하였으며, 융화성이 많고 단결 역강하는 예절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78~879쪽)

또한 문중 재산이 있어서 자산의 경우 동족에게 대부를 해주는 방식으로 이식을 도모하였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사설학술강습회의 경비, 조상제사 비용, 동족 구제에 필요한 경비 등에 사용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일제 당국은 오서리에 부업장려회를 조직하여 가마니짜기와 양잠을 장려하면서 산업진흥을 꾀하였는데, 이를 통해 마을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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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가옥은 농촌의 공통으로, 나지막한 토장(土墻, 흙담)과 싸리(柴, 시 / 산야에 절로 나는 왜소한 잡목)문을 들어서니 선생이 거처하던 노후하였던 집은 전항(前項)의 말과 같이 소실되고 소나무 향기와 흙냄새가 나는 새(新)집으로 변하였다.

이름과 외관만은 새집이지만 찬바람이 스며드는 쓸쓸하기 한량없으니 생계야말로 과반사(過半思)가 아닐까?

선생의 계보를 들어보면 수대를 두고 독자(獨子)로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없었고 원척(遠戚, 먼 일가) 외에는 혈혈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으며 장(長)하여는 조국광복에 침식을 돌보지 않았으니 담석지저(儋石之儲, 얼마 되지 않는 액수의 저축)가 있을 리 없다.

불행한 혁명가의 후일은 천하의 통례인가?

선생이 순(殉, 목숨을 바침)한 후 유족으로서 금년 칠순의 홍태출 노온(老媼, 늙은 여인)과 일점혈육으로 당년 27세의 독녀 이태순 씨(현, 한철수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모친)가 있을 뿐!

적적황요(寂寂荒寥, 매우 외롭고 쓸쓸함)한 이 애국가의 가정은 글자 그대로 모녀 단 두 사람이 형영상조(形影相吊, 의지할 곳 없이 몹시 외로움)로 슬픈 일 즐거운 일 무슨 일이고 간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두 사람 외에 논하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3·1운동 후 애국하는 열혈열사의 탄압이 그(其) 극에 달하자 옛날 친근자(親近者)도 종기가 다치는 듯 전부가 이들 유가족을 기피하고 소원(疎遠)이하였다.

이런 일을 지금 애국자로서 기세 올리는 자는 한번 자야(子夜, 밤 12시경의 한밤중) 사방이 고요할 때 남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 살펴 보아라.

양심 있는 자면 똥물에라도 빠져 죽어야할 것이어늘 어찌하여서 이 자들이 감히 두천족지(頭天足地)하는가?

지금 원척(遠戚)의 이정순 군이 양자로 입가하여 노부인을 돕고 있으나 부락민들까지도 선생의 구거(舊居)에 위문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다.

왕년 백범 김구 선생이 일차 고(故) 동지의 유족을 위문한 외 사회·민간할 것 없이 금반 우리 일행이 최초인 모양이다.

홍 노온(老媼)은 우리 일행을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가졌든 조완구·김구 양 선생의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이다. 노부인은 감격과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종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일행 중 마산 금조(金組, 금융조합) 허기중 씨로부터 우리를 일일이 소개하고 위문금으로써 윤 군의교장(軍醫校長), 최 65육군병원장, 유 항공수리창장, 김 동양주정사장, 이 마고교장, 손 마산교육감, 주 창원교육감, 이 마산시장 제씨로부터 각기 금일봉을 드리고 곧 이어서 열사가 고이 잠든 오서리 오리허(許, 오리쯤 떨어진)에 있는 대실골(竹谷山, 죽곡산) 묘지로 향하였다.

묘소로 향할 제(際)에 고인과 청년시절에 막역하였던 친우 오륙 명과 미망인 그리고 양자인 이 군 등의 길안내로 굽은 밭길을 지나 산기슭을 둘러서 안치된 분묘 앞에 도착되었을 시에는 시간은 벌써 4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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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마산상공회>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와해되고 1908년에 설립된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그 뒤 흐지부지된 후 1920년대까지 지역의 상공인들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마산간담회」「마산경제회」「마산번영회」라는 상공인 모임이 있긴 했지만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2일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에서 개최된 마구(馬邱/마산대구)철도촉진기성회를 조직하기 위한 부민대회에서 지역의 상공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제안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이 1929년 4월 24일「마산상공회」가 창립되었고, 이후 마산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1938년「조선상공회의소령」에 의한 마산상공회의소의 설립인가가 나던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최근 마산상공회의소가 펴낸 '사진으로 본 마산상의 111년의 흐름'이라는 책에도 마산상공회의소라는 이름으로 마산의 상공인들이 단체를 만든 때가 1938년 7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회장으로 표기된 서전목총시(西田木惣市, 西田嘉惣市로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는 1907년 홍문동에 설립한 서전주조장의 창업자입니다.



「마산상공회」의 회칙에 기록된 사업내용을 통해 당시의 마산상황과 주요현안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馬邱철도 부설 촉진
2) 長尾半兵衛氏 계획의 통영선 실현 촉진
3) 마산상업학교의 학년연장, 학급증가 건
4) 경전남부선 중 순천 경유를 하동, 화개, 구례 경유로 변경 청원
5) 마산-부산간 직통열차 운행 증발 건
6) 일본과의 직통항로선 운임 인하 건
7) 마산중학교 설립 촉진
8) 남지교의 架橋等背面 교통 확충 건
9) 마산항 선차(船車)연결시설 확충 건
10) 상업은행지점 설치 건
11) 일본 북구주(北九州)와의 선로 개설 건
12) 마산세관 출장소 승격 건
13) 합천 직통통로 개설 건
14) 전력요금 인하 건
15) 창원 추도(墜道) 촉진 건
16) 마산-거제도 연안 연결 항로 개설 건
17) 마산-삼랑진간 기동차 운행 건
18) 된장, 간장 운임 할인 건
19) 청주 운임 할인 청원
20) 석발미(石拔米) 증산 건의
21) 상업창고 설치 건의

이미 식민지배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는 상황이라 다음 세대의 교육에 관한 내용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 마산의 경제역량을 외부로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마산 창원 진해가 통합된 후 세 도시의 상공회의소도 ‘창원상공회의소’ 간판을 달았는데 마산상공회의소는 ‘마산상공회’로 이름을 바꾸어 마산지역을 커버한다고 합니다.
우연의 결과겠지만 1929년부터 사용했던 그 명칭이 되살아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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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rv1fhvg4y3 2013.12.11 04:56 address edit & del reply

    空調 対角 で候 縁起物 爆撃機 泊 接近 キーワード グッズ 介護 あんま 錯誤 読みやすい 先見 別れを惜しむ ギックリ腰 ストレート 初釜 見渡す 詠む 聴牌 最善 戦国時代 漁り 尊厳 すっかり 狂い咲き |正体不明 あいさつ 病名 穴孔 服喪 命の洗濯 戒告 口に合う 自家製 巨編 入刀 付託 読破 挿入歌 凄惨 大金持ち 危険性 殺人者 中華料理 お話し 健実 急病 におきまして http://www.svensklapphund.se/filmer/newbalance-c-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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