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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홋카이도(北海道) 여행기 2 – 다이세쓰산(大雪山), 비에이(美瑛)

by 운무허정도 2019. 6. 24.

4. 26 (금, 둘째 날) - 오전에 흐리다가 오후에 눈

 

모두들 새벽같이 일어났나 보다. 새벽 4시부터 동이 훤하니까.

홋카이도는 한국보다 비행기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동쪽에 위치해 있음에도 같은 표준시를 쓰니까 생긴 현상이다.

사우나 하고 호텔 뷔페 간편식으로 조식을 먹고, 짐 다 싸들고 나와 차에다 싣는다.

9시 경 아사히다케 호텔에서 눈앞에 보이는 걸어서 5분 정도 걸릴 것 같은 위치에 있는 케이블카 정거장을 향해 간다.

호텔 정문 맞은편에 ‘비지터 센터’(방문자의 집)가 있다. 아직 문이 잠겨 있어 그냥 지나치고 케이블카 정거장으로 직진한다.

우측으로 대설산 정상이 정면으로 나타난다. 사진들 찍으라고 큰 푯말까지 박아놓았다. 바쁘게 사진들 찍는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오늘 날씨들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히 쾌청하다.

허 원로, 어제 밤에 내가 향(?) 피우며 올린 기도가 통했다며 고맙다 한다. 나도 박자를 맞추어 마침 마산에는 비가 온다는데 내가 염력으로 여기 있던 비구름을 마산 쪽으로 보내버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설산의 진면목이 서서히 나타난다. 케이블카 뒤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쪽 방향으로 평야가 갈수록 더 넓어지고, 어제 이곳으로 올 때 사진 찍느라 되돌아가서 멈추었던 장소 옆에 있는 저수지도 보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좌측과 우측으로 길게 늘어진 산맥들의 흰 연봉들도 더 길어져간다. 내 눈에는 좌측 연봉이 훨씬 더 길어 보인다.

해발 1,600미터에 있는 스가타미역(姿見驛)에 내리다. 그래봤자 이 케이블카에는 시점과 종점밖에 없다. 가이드가 눈에 발이 빠질 우려가 있다며 장화를 빌려야 한다 했지만, 다들 그냥 산으로 다가가 사진들 찍느라 분주하다. 60센티 이상 쌓인 눈이라지만 표면이 약간 얼어서인지 걷기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약간 경사진 오르막 위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 걸상 밖에 없는 작은 전망휴게소가 설치된 곳에 올라가 사방을 구경한다.

 

 

바로 옆에 더 이상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이 서 있다. 산책로인지 등산로인지 발자국들이 이미 나 있다. 가이드 말로는 얼마 전 실종 사건이 난 후 입산금지를 한 것 같다고 한다.

질서 잘 지키는 한국인들로서 어찌 감히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완만한 경사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대설산 주봉이 가파르게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곳에 증기기관차처럼 쉭쉭 소리를 내며 김 기둥을 뿜어내고 있는 곳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발자국도 나 있고 그 우측에는 전망휴게소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비행기 타고 예까지 왔는데, 2시간 정도 눈길 산보를 예상하고 왔는데 이게 뭐람. 게다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정상까지는 못 가더라도 그곳까지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작정 나와 몇 사람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다지 멀지도 않다. 가까이 가서보니 두 개의 분화구에서 뿜는 소리와 세기가 굉장하다. 뒤돌아보니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올라온다.

 

 

분화구와 정상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일명 죽음의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데 갑자기 김 부총무의 ‘사람 살려’라는 외침이 들린다.

돌아보니 발 하나가 눈 속에 푹 빠졌다. 숨구멍이다. 꽁꽁 언 호수에도 이런 숨구멍들이 있는데 빠지면 죽기 십상이어서 매우 조심해야 하지만 눈밭의 숨구멍은 위험하지는 않다. 도리어 재밌다.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발이 빠졌고, 나도 두 번이나 빠졌다. 내가 “발이 빠진 수만큼 죄를 지었지만, 이제 빠진 것으로 땜했다”고 하니 다들 안심한다. 죄들 짓고 살기는 사는가보다. 하기야 요즘 같은 세상, 죄 안 짓고 우예 살 수 있겄노.

우리는 내려오는데 뒤늦게 출발한 우리 일행 몇 사람이 올라오다가 중간에 만나서 다 같이 내려왔다. 이들은 결국 김 뿜는 분화구를 가까이 가 보지는 못한 것이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타자마자 바로 구름이 밀려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허 원로 내 기도 빨 덕분에 산에 있을 때는 쾌청했다며 서도사로 인정한다고 하자, 아이고 나도 염력이 다 되어 더 이상 구름을 보내버릴 힘이 없다고 엄살을 떨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다시 쾌청해졌다. 중간에 구름 속을 지나온 것이다.

 

올라갈 때 닫혀 있던 비지터 센터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갔다.

대설산 관련 정보들이 비치되어 있다. 한쪽 벽면에 설치된 서가에 대설산의 식생 등 조사보고서가 빼곡이 꽂혀 있다. 누구나 관심 있는 사람은 보라는 것 아닌가.

자료(정보와 지식)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모두 수집해 보관할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공개까지 하다니. 선진국답다. 좋은 것 좋다 하고, 잘 하는 것 잘한다 하는 것도 친일일까?

흑곰 한 마리가 진열되어 있다. 물론 박제이지만 살아 있는 듯한 위용을 자랑한다. 어제 잤던 호텔 이름이 왜 베어몬트인가 알겠더라.

 

11시 30분경 비에이(美瑛) 마을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차 안에서 가이드가 일본 맥주 역사를 설명하고 3일째 되는 날 삿포로맥주박물관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알려준다.

도중에 옆 계곡 길로 새서 칠복암(七福岩)의 주상절리를 구경한다.

다시 나오는 길에 보니 차도 외에는 모두 눈으로 덮여 있는데 나무들마다 땅에 인접한 부분의 주위는 눈이 녹아 둥그렇게 패여 있다. 그 이유를 두고 설왕설래한다. 누군가 나무도 생물이라 열 때문에 눈이 녹지 않았을까라는 썰을 풀었고, 다들 대체로 동의한다. 왜? 진짜 이유를 모르니까. 근데 무생물인 표지판들도 조금씩 그러하니 이건 어떻게 설명하나. 몸의 열기가 낮은 탓이겠지... 허허허.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이 마을에 들어서자 점심시간이다.

가이드 왈 카레와 라멘-볶음밥 중 선택하라고 해서 투표하기로 한다. 원로 두 사람은 아무거나 좋다며 기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카레가 대세다. 카레 집으로 가는 도중에 도로변 주택마다 건물 정면 이마에 연도로 보이는 네 자리 숫자가 붙어 있다.

비에이 마을은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삿포로 경영을 위해 이 지역에다 대지를 조성해 놓고 자발적으로 이주해 오는 본토민에게 땅을 나눠주기 위해 조성한 인공마을이다.

연도는 그들의 선조가 처음으로 이주했던 해를 지칭한다. 오래 된 것은 1870년대이고 20세기 전반도 상당히 많다. 이 마을이 계획도시라는 것은 거의 100% 격자형 도로망으로 증명된다.

패밀리레스토랑 다이마루에서 다양한 카레 요리로 점심을 먹었다. 어쩌다 ‘찌께다시’란 말이 나왔다. 가이드가 ‘쯔기다시(附き出し)’로 바로잡아주면서 이건 속어로서 ‘기타 등등’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찌께다시는 일본의의 갱상도 사투리쯤 되겠다.

회원들 왈, “우리가 바로 쯔기다시네.” 대장 외 기타 등등. 쯔기다시는 이후 여행 내내 몇 번이나 반복 사용될 정도로 인기어가 되었다. 학봉산악회에서 대장원로의 위상과 함께 나머지 회원들의 자조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에피소드로 보인다.

식사 후 몇 사람이 카레집 건너편에 있는 전기용품 전문점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하는 말, 임 보급대장이 맘에 드는 유리창 닦는 도구가 있어 여주인에게 물어보니 파는 물건이 아니고 자기들이 쓰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으니, 부드러운 말투로 “글쎄요,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라고 답하더라며, 김 부총무 감탄해 마지않는다. 한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주인장은 퉁명스럽게 ‘몰라요’ 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투다.

 

오후 2시경부터 비에이 마을을 둘러싼 구릉지대에 흩어져 있는 명소들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멀리 왼쪽으로는 다이세츠산 아사히다케 연봉과 오른쪽으로 토카치다케(十勝岳, 2077미터) 연봉이 보이는 비에이 구릉들(패치워크)은 모두 밭으로 가꾸어져 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작물은 거의 없고 맨땅이다. 때가 되면 씨뿌릴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무가 거의 없는 구릉지대에 군데군데 나무들이 서 있다.

 

 

그중에서 광고나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진 나무들을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주변 경관을 감상한다. 떡갈나무 ‘세븐스타’, ‘켄과 메리의 나무’라 불리는 포플러나무, 이름은 없지만 차도에 일렬로 늘어선 자작나무 군 등이 대표적이다.

 

호쿠세이노오카(北西の丘) 전망공원에 갔다. 이 구릉지대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비에이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날씨가 쌀쌀해져 따끈한 커피들이 생각났는지 카페를 찾는다. 카페라는 팻말을 보고 살펴보니 장사를 안 하는 것 같다. 누군가 옆에 있는 작은 슈퍼에 따뜻한 캔커피 판다고 해서 우루루 들어갔다. 몸 좀 녹이면서 커피는 캔으로 때웠다.

출발하려고 차를 탔는데 허원로와 임대장이 안 보인다.

누군가 카페 팻말이 붙은 쪽으로 옆길로 더 들어가보니 비닐하우스 안에 카페가 있고 거기에 있다는 전언이다. 아니 카페를 찾았으면 다른 사람들도 불러 같이 가지 않고 둘 만 가다니 꽤심하지 아니한가.

우리도 혼내주자는 음모가 저절로 꾸며진다. 차를 숨기자는 것이다. 가이드 기사 한술 더 뜬다. 안 그래도 차에 주유를 해야 하는데 비에이 시내에 갔다 오자는 거다. 대충 근처에 숨어있다 놀래켜 주자는 생각이었는데 일이 커진 것이다.

언덕 밑으로 내려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다들 맴들이 약해져 반대편 길을 따라 원위치한다. 마침 주차장에 다시 도착하는 순간 저쪽에서 두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나온다. 다들 어디 있었냐며 오히려 나무라는 눈치다. 음모는 자백으로 곧 밝혀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추워져 더 이상 구경을 포기하고 일단 카미후라노(上富良野)에 있는 숙소 ‘스텔라’ 펜션에 짐 풀어놓고 온천목욕하려 가기로 하다.

시각은 오후 5시 경. 눈 덮인 자작나무 산길을 구비구비 거슬러 올라가니 프랑스 유학 시절 그르노블 외곽에 있는 샹후쓰(Chamrousses) 스키장 올라가는 길이 겹쳐 보인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눈 덮인 산길 경치인가. 어언 강산이 세 차례나 바뀌었다. 세월의 흐름은 실감나지 않지만 과거는 생생하다.

토카치다케 밑에 있는 후키아게(吹上)온천 백은장(白銀莊)이다.

산장 같은 건물이 주변과 어울려 보인다. 산속 외딴 곳, 등산로 입구도 있다. 들어가니 노천탕을 멋지게 꾸며놓았다. 온천물이 고이고 또 흘러가도록 시내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런 곳에서 하룻밤 잤으면 하는 말에 가이드가 이 건물에는 숙소도 있다 한다. 지자체가 관광객을 위해 운영해 다른 온천숙소보다 약간 싸다고 한다.

아깝다. 가이드상 좀 쓰지 그랬소. 혼자 생각이다. 노천탕은 남탕과 여탕 중간에 남녀혼탕이 있다. 발꿈치만 들면 가리게 너머로 안이 다 보인다.

청춘남녀 한 쌍이 어쩌고 있다는 둥 수영복이 없어 혼탕에 못 들어가는 한도 풀고 사라져버린 청춘들을 안타까워들 한다. 나 혼자만 그런가. 진눈깨비 같은 눈발도 흩날리고, 분위기 죽인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다.

이게 일본 집밥일까. 일본 소주와 정종은 무엇이든 맛있어.

 

 

TV 방영되었던 주인장 스토리가 녹화로 재생되고 있다. 6년 전 은퇴 후 이곳에 정착했다고. 사설 천문대도 운영 중이라고, 그제야 펜션 이름이 스텔라인 까닭을 짐작한다.

식사 내내 젊은 부부가 시중을 들더니 딸과 사위라 한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차 안에서 가이드 왈 젊은 남자는 일종의 데릴사위라 한다. 도쿄 유학 보낸 딸년이 졸업도 하기 전에 남친을 데리고 왔다나. 그래서 여기 와서 같이 살면 결혼을 허락한다고 했단다... 이거 부모 갑질 아니여...

3인용 방인 이층 다다미방에서 술 마시고 돌아가며 생노래를 부른다.

 

 

유일한 예비회원인 김 전 구청장. 몸 ‘조시’ 안 좋다며 노래를 안 한다. 어쩌다 내가 예비회원을 비정규직에 빗대는 바람에 논란이 되었다. 결국 돌아가며 노래하기로 한다.

걸핏하면 M고를 걸고 넘어지는 허 원로, 이번에도 C고가 헐 잘한다며 차별한다. 이거 자격지심(自激之心) 아니여. 내가 M고를 대변한다. C고가 노래 잘 한 것은 맞지만 창의성들이 없지 않나, 즉 음정 박자 잘 맞추면 뭐 하나 감정 넣어 자기 식으로 불러야지 하며 억지논리를 끌어댄다.

마지막으로 김 전 구청장이 결국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노래자랑은 막을 내리고 잠들 자러 가다. 밤 10시밖에 안 됐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내일 날씨들 걱정에 내가 내일 오전 중으로 날씨 개일 것이라고 예언한다.

다음날 진짜로 그리 되니 가짜 서 도사가 진짜 서 도사로 공인되는 순간이다.

일급비밀! 가이드가 일기예보를 보고 나에게 언질을 주었다. 근데 그게 딱 맞아떨어지다니, 이것도 일본의 실력인가?<<<

글 / 서익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