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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간 도시이야기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by 허정도 2009. 12. 13.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다섯 번째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내서읍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창원읍성의 서쪽지역 중 내륙 쪽은 내서(內西)면, 바닷가인 현재의 마산시내지역은 외서(外西)면이라 불렀다.
외서면은 마산부가 되어 실명(失名)했고 내서만 살아남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중리’라고 알려진 내서읍에는 현재 중리, 안성리, 평성리, 호계리, 용담리, 상곡리, 원계리, 삼계리, 신감리, 감천리 모두 10개 리가 있다.


                         <1926년 조선교통도에 나타난 내서지역>

                      <1956년 한국지형일람도에 나타난 내서지역>

집결지는 중리 역,
12월 12일, 오후 1시반이었다.
탐방은 중리역을 기준으로 광려산 쪽으로만 방향을 잡았다. 아래 호계리 쪽은 시간이 없어 포기하였다.
탐방대원들의 얼굴을 밝았고,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인원도 늘어 모두 3-40명이나 되었다.

창원대 사학과 남재우 교수가 시간을 내 해설을 맡았다.
내서읍에 아파트가 들어섰던 초기부터 최근까지 이곳에서 살았다는 게 초빙 이유였다.
“선진도시에서 살아보려고 창원으로 갔는데 통합된다니 괜히 옮긴 것 같다”는 조크로 시작된 남 교수의 내서 설명은 넓고 깊었다.

중리 역에서 길을 건너 함마대로(마산 함안 간을 연결하는 큰 길이라는 뜻 같다)를 따라 동신아파트 쪽으로 간 후 광려천을 따라 걸어 올랐다.

내서에서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은 처음.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와보았지만 차속에서만 옮겨 다녔지 길게 걸어본 적은 없었다.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은 것은 동신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폐수의 악취였다.
모두 코를 막으며 불쾌감을 노출했다.
오수 우수를 분리하지 못한 결과일 터.
어디가나 이 문제에 자유로운 하천이 없다.

광려천 변의 간선도로는 자동차를 위한 도로라 걷기도 힘들었고 걸을 수 있는 조건도 좋지않아 뒷길로 들어섰다.
차로에 비해 턱 없이 좁은 보도도 문제였지만, 그 좁은 보도에 시설물이 버티고 있어서 걸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뒷길은 괜찮은 편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서읍에 존속했던 자연마을의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산자락도 가까워 걸을 만한 분위기였다.
군데군데 아무렇게 쳐 놓은 텃밭 경계막이 분위기를 망쳤다.
학교 인근이었는데 아이들을 보더라도 어른이 할 짓은 아닌 듯싶었다.



상곡리와 삼계리를 걸으면서 그간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보았다.

상곡리의 서대(西臺)는 처음 보는 형식의 재단이었다. 
망국의 한을 애통하며 1937년에 세운 재단이다.
비석 곁에는 마치 나라 잃은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군듯한 또 다른 비석 서대기(西臺記)가 있어서, 당시 식민지 백성의 비통함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삼계리에서는 잘 알려진 마을 숲(삼풍대공원)에 가 잠시 앉았다.
생태해설가인 최승미 선생이 실력을 발휘, 수종과 수령 그리고 나무에 깃든 새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가운데 선 느티나무는 족히 2-300년 되었다니, 망해가는 조선과 일제기와 전쟁기 등 격동의 세월을 말없이 지켜본 나무 아닌가.
공원 복판에는
‘삼풍대’ 비석 곁에는 ‘광려산 철쭉 입에 물고 삼풍대 천년 숲 바람에 땀 식히던 곳······’ 으로 시작되는 근대 마산의 대표적 시인 월초 정진업 선생님의 ‘삼풍대소사(三豊臺小史)’라는 시가 돌에 새겨져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마을은 달성 서씨 집성촌이었던 원계마을.
지형상 한쪽으로 비켜있어서 아파트단지로 개발되지 않고 단독주택지로 이용되면서 원형이 살아남은 것 같았다.
일부 담장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이끼 낀 낮은 담들이 ‘원계마을’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레이트 지붕이라 원형이랄 수는 없지만 초가였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낮은 산들과 그 안에 옹기종기 어깨 맞대며 앉아있었을 집들과 집, 원계마을의 옛 모습이 상상되었다.
새로 지은 콘크리트 단독주택들의 부조화가 눈에 거슬렸다.

시간 탓에 신라고찰 광산사까지는 가지 못했다.
탐방을 끝내고 내서를 생각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오래된 습관이다.

사람이 자그마치 8만 명이다.
함안군이 6만 6천 명, 의령군이 3만 명이니 내서읍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시로 승격된 밀양시 인구가 11만 명밖에 안 된다.

60년 대 이후부터 시작된 도시의 인구집중화 현상은 곳곳에 소위 주거형 인공도시를 탄생시켰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 된 서울의 잠실 대단지를 시작으로 인근의 일산, 분당, 광명, 부천 등 인구100만을 넘나드는 대 도시들의 탄생배경이 모두 그렇다.
우리 지역에서는 김해시의 장유와 마산시의 내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베드타운이라 일컫는 소위 주거형 도시는 산업과 주거를 분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도시이론에서 시작되었다.
산업지역은 산업지역대로, 주거지역은 주거지역대로 그 목적에 맞는 자연적 환경적 최적상태를 유지시킴으로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시도된 도시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직주분리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엄청난 양의 자동차가 필요했고 대량의 연료가 소비되었다. 광대한 도로가 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환경과 에너지문제 등에서 지속가능한 도시형태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개념이 자족형 도시다.
직장과 주거가 동시에 가능하고 교육과 문화시설도 충분히 갖추어진 도시를 말한다.

내서읍의 도시적 성격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적절한가?
주거형 도시인가? 자족형 도시인가?

아파트가 숲처럼 들어차고 주민 대부분이 내서읍이 아닌 곳에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주거형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마산벨리와 내서공단 등을 생각하면 자족적 성격이 없지도 않다.

미래의 도시발전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도시의 성격규정은 내서읍이 처해있는 입지조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서읍은 일부 자족형 성격이 있지만 주거형 도시로 규정하고 발전 방향을 잡는 것도 좋다고 본다.
주거에 필요한 공간 외에 일터를 더 이상 갖추기에는 공간적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혹자는 주거도시가 산업도시에 비해 조성과정이나 조건이 손쉬운 것 아니냐고, 경쟁력이 낮은 도시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다.
주거도시야 말로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로 채워져야 될 가장 높은 수준의 도시다.
교육, 문화, 예술, 복지, 체육, 휴식, 유통, 위락, 심지어 종교시설까지 충분히 갖추어야 되는 고급도시가 주거도시다.

과연 이런 시설들이 내서읍에 충분한가?
아니면 충분히 갖출 여건은 되어 있는가?
그도 아니면 주거형 도시조건을 갖출 준비는 하고 있는가?

답은 ‘아직’이지만, 주거형 도시로서의 조건은 좋은 편이다.
내서를 아우르고 있는 산과 물의 자연조건과 인근 마산 창원 함안과의 적당한 거리 등 입지조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얼마든지 품격 높은 주거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그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서 뿌리쳐야할 것이 있다.

'인구의 유혹'이다.
더 이상 사람을 끌어드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람 수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인구의 유혹'에 빠지면 내서읍의 미래는 어둡다.
단지 잠만 자는 하나의 거대한 주거용 게토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을 늘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시설을 늘여야 한다.
인구 조절에 실패하면 제아무리 시설을 공급해도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되어 부러움을 살 것인가?
앞뒤가 막혀 버린 거대한 숙소가 되어 눈총을 받을 것인가?
그 선택은 행정과 주민의 손에 달려있다.

초겨울 토요일 오후,
당산나무 아래서 탐방대원들과 함께 원계마을의 옛 돌담을 바라보며
‘10년 100년 후의 이 마을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한가롭게 상상했다.

겨우 5시 반인데 산 밑이라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