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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8 - 건권(乾卷) / 제5장 근고사(近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10. 10.

제5장 근고사(近古史)

 

3. 사추마군(蕯軍, 융군)의 호랑이 잡이 기록(搏虎錄)

가고시마(鹿兒島)에서 출판된 『시즈노오다마키』(倭文麻環-아래 그림)란 책에서 창원을 차왕(茶碗)이라 기재한 박호록(搏虎錄)의 기사가 있는데 창원의 발음이 잘못 전해진 것 같다.

호랑이를 잡은 곳은 현재의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에서 회성리에 이르는 지역의 산악으로 그 중심은 봉화대(烽火臺) 산 부근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그 전문의 초록을 실으니 참고자료로 해 주기 바란다.

 

분로쿠(文祿) 원년(1592) 임진년 히데요시 정한의 역(役)이 일어났을 때 사츠마(蕯摩)의 성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아들 히사야스(久保)와 더불어 참전하여 조선해의 거제도 북쪽 곶에 축성하여 수궁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거제도는 일면 가라섬(韓島) 혹은 가라도(加羅島)라 하며 섬 남쪽에 가라산이 솟아 있다. 부산포와는 해상으로 약 십 리 떨어져 있는데 그 남쪽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우리 제군은 경성과 평양을 함락시켜 동남해변 일대에는 적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때문에 히사야스는 어느 날 하루 김해 산중에 사냥하러 나갔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다 두려워하며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히사야스는 질타하며 스스로 탄알을 장전해 부하인 신도(進藤)모(某), 오야마(大山)모(某)의 어깨에 앉아 사격하였다. 총알이 맞지 않아 호랑이가 히사야스에게 덤벼들려 하자 오타 기치베(太田吉兵衛)가 나서서 호랑이를 베려 했을 때 한 병사가 초을 쏘았는데 호랑이에 맞지 않고 기치베에 부상을 입힌 것이다.

히사야스는 그 경솔함을 나무라면서 또다시 발포하니 호랑이 머리에 명중했다. 호랑이는 미친 듯 날뛰어 히사야스에게 덤벼 들으려 하니 많은 병사가 몰려들어 호랑이를 박살내었다. 호랑이 고기는 염장(鹽藏)되어 교토 후시미(伏見)까지 이송되고 히데요시가 그 맛을 보게 되었다.

히사야스는 그때의 상처 때문에 귀진해 돌아갔다가 죽게 되니 때는 본로쿠(文祿) 2년 계사(癸巳, 1593)년 9월 8일, 향년 22세였다. 머리를 깎아 유해를 가고시마에 보내 묻었다. 법명은 후덕사전일유서참대선정문(厚德寺殿一唯恕參大禪定門)이며 그 장례 날 다나카 산에몬(田中三右衛門), 야마모토 간자에몬(山本勘左衛門)과 보졸(步卒) 오니즈카 산조(鬼塚三藏)가 할복하여 순사했다.

분로쿠 갑오(甲午) 3년 여름 히사야스의 동생으로 뒤에 이에히사(家久)로 개명한 마타하치로다다츠네(又八郞忠恒)에게 성주 계승의 윤허가 나오는데 이때 나이 17세였다.

답례로 구리노(栗野) 성을 나와 교토로 올라가게 되었다. 미야자키(宮崎)의 아카에(赤江)천에서 승선하여 본구(豊後, 일본의 옛 지명. 현재의 오이타(大分) 현의 대부분) 앞바다를 지나 아키(安藝, 일본의 옛 지명, 현재의 히로시마 현의 서쪽 절반에 해당)의 오토무노세(阿富瀨), 지금은 온도노세(音戶瀨, 히로시마의 현 구레 시에 있는 혼슈와 구라하시지마 사이의 해협)에서 아도무(阿富) 항에 들어 거기서 사흘을 묵고나서 미야지마(宮島)에 건너가 이츠쿠시마(嚴島) 신사를 참배, 유숙하기를 3일 전후, 그 후 배로 가지 십여 일만에 오사카에 도착, 상인 아마노야운사이(天野屋思齊) 댁에 보름쯤 있다가 사카이(堺)의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얼마 되지 않아 천연두에 걸렸다.

다행히 증상이 가벼워 차차 회복된 것을 보고 교토로의 상경 독촉을 받은 다다츠네는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다음 날에 교토에 있는 아버지의 족인(族人)의 부인이 살던 오가와(小川)의 사저에 들어갔다.

당시 사츠마(蕯摩)의 공저(公邸)는 니조성(二條城) 마츠노마루(松樹郭) 마장(馬場) 대명소로(大名小路)에 있었고 거기에 할아버지도 체재하고 있어 병이 감염되기를 꺼려 사저에 든 것이다. 며칠 있다가 후시미(伏見)에서 올라오라는 명이 오고 히데요시의 중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공저에서 의상을 정장하고 그와 대동해서 히데요시에 답례를 마쳤다. 나와서 바로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을 지턱에서 뵙고 그 성덕에 눈물을 흘렸다.

이해 10월 초순 다다츠네는 오사카를 떠나 바로 조선으로 도항하여 그달 그믐날 거제성에 도착, 아버지와 오랜만에 회포를 푼 것이다.

시마즈(島津) 부자는 이곳 북쪽 곶에 진을 친 것 외로 가덕도에도 진영을 두고 있어 부자는 서로 교대하며 감독해 온 것이다. 다다츠네는 거제에서 사흘만 있다가 가덕도 진영에 갔는데 그때 갑자기 히데요시로부터 호랑이 고기를 헌진(獻進)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에 히사야스가 헌진한 호랑이 고기가 약으로써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때는 분로쿠 4년 을미(乙未, 1595)년 3월 8일, 시마즈 부자는 병사와 사냥꾼을 데리고 동시에 거제와 가덕의 진을 나와 맞은편 땅인 웅천으로 건너가 수렵을 하면서 창원군에 다다랐다.

호랑이가 나올만한 곳을 차완산(昌原山)에서 찾아 요소요소에 목책을 세워 몇 리를 둘러사게 하였다. 부자는 평지에 조망이 좋은 데를 잡아 진을 치고 나날이 산중은 뒤졌으나 호랑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도 짙은 안개가 낄 때도 있고 비가 앞을 가릴 만큼 많이 쏟아져 오기가 일쑤였다. 산에는 풍이 무성하고 중턱에는 밤나무, 벚나무, 옻나무 등이 있고 흰 구름이 무심히 왕래하기도 하니 오랜 정복 전쟁으로 우수도 깊어지고 수렵에 권태감이 들 무렵 한 마리의 호랑이가 목책을 넘어 도망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요시히로의 사촌인 시마즈 아키마사(島津彰章)의 부하 야스다 호에(安田兵衛)가 그 뒤를 쫓아갔지만 너무 무서워서 호랑이를 놓쳐 버렸는데 좀 있다가 그 모습이 남쪽 정상에 나타난 것이다. 유시히로는 급사를 보내 목책 바깥에 있는 부하 사냥꾼에게 말하기를, “함부로 혈기로 잡으려 해서 기회를 잃어버리면 내가 할복해 히데요시 공에게 사죄해야 하니 각자 충분히 소재를 확인할 때까지 활도 총도 쏘지 말고 지시를 기다려라”고 했다.

그때 마침 비가 많이 와서 산길이 미끄러워서 부하가 그 명을 각 산에 전달하고 돌아올 때까지 4시간이나 걸려 이미 황혼 시각이었다. 요시히로는 다시 부하를 보내 전군에 다음과 같이 전하게 했다. “호랑이는 아무리 맹수라 해도 이렇게 비가 오는데 멀리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또한 밤중의 행동은 아주 위험하니 내일 아침에 잡도록 해라. 그리고 공명을 원하는 자는 아침에 본진을 찾아오라!” 그랬는데 다음날 아침에 본진을 찾아온 자는 얼마 되지 않아 시마즈 부자는 사냥꾼들의 겁이 많음을 개탄하며 우에노 곤에몬(上野權右衛門)에게 호랑이의 소재를 파악토록 명을 내렸다.

곤에몬은 지명된 것을 아주 명예롭게 여겨 목책 따라 호랑이 참색에 나섰더니 산기슭 들판을 건너가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때 호랑이도 역시 곤에몬의 모습을 알아 차리고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곤에몬에 덤벼들고 목을 물어뜬어 죽인 후 그의 몸을 2미터 높이로 날려 보리고 나서 다시금 바위 위로 뛰어 오른 모습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일행은 거리가 멀었기에 만행이지 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팔짱만 끼고 있는 터에 초사 로쿠시치(帖佐六七), 후쿠나가 스케주로(福永助十郞), 나가노 스케시치로(長野助七郞), 나가노 로쿠베(永野六兵衛) 등이 덩달아 호랑이를 향해 뛰어 올라가니 사츠마 무사의 용맹함을 시마즈 부자에게 보여주게 된 것이다.

애당초 곤에몬에게 호랑이가 달려들었을 때 손에몬은 순식간에 칼을 빼 입에서 논까지 베었기 때문에 호랑이가 유형에 광란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친 호랑이에게 넓적다리가 물렸는데 후쿠나가(福永), 나가노(長野)는 이 광경을 보고 호랑이 꼬리를 잡아 소나무에 감기에 하고 잡아달겼을 때 로쿠베(六兵衛)가 와 곧바로 그 목을 찔러 죽였다.

호랑이를 끌며 로쿠시치를 등에 업고 곤에몬의 시신을 들어가면서 귀진하여 시마즈 부자에게 보고했다. 곤에몬의 상처는 목 부분이 뜯겨 상처가 아주 깊었으며 칼집은 허리에 끼어져 있었으나 칼은 찾을 수 없었다. 부자는 그 죽음을 애석해 여기며 또한 거의 용감함을 찬양해 다른 부하들을 격려했다.

그러던 차에 한 마리의 작은 호랑이가 목책 안에 들어와 열몇 명의 사람들에게 중경상을 입혔는데 야스다 효에(安田兵衛)가 전날의 수치를 만회하려 혼신의 용기를 고무해 앞으로 나가 대도를 휘둘러 호랑이를 지르니 그 칼끝이 목 부분까지 튀어나와 호랑이는 울부짖다 죽었다.

생각컨대 전자는 어미 호랑이고 후자는 새끼 호랑이었나 보다. 두 마리 호랑이 고기는 염장되어 바로 교토에 보내져 히데요시가 많이 좋아한 까닭에 감사장을 하사했다는 것이 묘월(卯月, 음력 2월) 28일임.

 

소생은 말한다. 시즈노오다마키(『倭文麻環』)에는 조선을 보고 붉은 나라(赤國)라고 쓰는데, 이는 산에 나무와 숲이 없는 대머리 산이란 뜻이겠지만,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삼백사오십 년 전에는 이 지방 도처에 나무와 숲이 많았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8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