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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6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9. 26.

제4장 중고사(中古史)

 

6. 왜구의 침해

원나라의 정동전쟁이 끝나고 약 70년이 지난 왜구의 침해하는 국난이 고려에 또 일어나게 되었다. 왜구란 무엇인가? 소위 일본의 해전 무리에 대해 원과 고려인들이 호칭하는 바, 왜(倭)는 야마토라고 읽고, 야마토국의 해적이란 의미가 된다.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직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가 겐코우(元弘) 원년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이 남쪽 지방에 사냥 행차한 틈을 타서 고후시미(後伏見) 천환의 아들 료인(量仁) 친왕을 옹립해 즉위하게 한 이래 국내는 남복조로 나뉘어 그 기간이 문란해기며 세상은 어수선해져 영웅할거의 전국시대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때를 놓쳐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호족은 일족과 부하들을 이끌고 바다에 나가 스스로 해적대장군이라 칭하며 그 약탈은 지나(支那, 중국), 조선 연안에 한정되지 않고 남양제도까지 미치기도 했다. 해적선 선미에는 야와타오카미(八幡大神), 야와타다아보사츠(八幡大菩薩), 야와타구우(八幡宮) 등의 기치를 달아 이 야와타선(八幡船)의 이름은 연안을 무인지대로 만들어 또한 조야(朝野)를 공포에 바지게 햇다. 그 기인은 대안 방비가 소홀해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나 분에이, 고안의 두 전쟁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있었으리라. 지금 고려사에 의거해 피해 상황을 현 마산 즉 합포에 관한 부분만을 들추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32세 충정왕(忠定王) 2년(1350) 2월 왜선 백여 척이 고성, 죽림 등을 약탈한 후 거제를 침입하였다. 합포의 천호(千戶) 최선(崔禪,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천호(千戶)를 역임한 무신. 1350년(충정왕 2)에 왜구가 고성, 죽립, 거제, 합포에 침입하자 천호로서 도령 양관과 함께 공격하여 300여 급을 참획하고 이를 물리쳤다), 도령(都領) 양관(梁琯, 맹몰년 미상. 고려 충정왕 때의 관인) 등이 나와서 방어를 하는데 여의치 않아 합포로 후퇴했다. 왜구가 쫓아와 합포에 들어와서 약탈을 마음대로 자행하고 떠났다. 왜구의 침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6월 왜선 20여 척이 합포에 침입하여 그 병영을 불태웠다. 회원, 고성 등 여러 군에서 피해를 입었다.

소생이 살펴본 바로는, 합포의 병영을 태웠다는 것은 현 마산부내 자산동에 융기한 자산동 환주산의 구 진영(鎭營)을 태운 것이라 하겠다. 당시는 아직 마산포의 시가는 없고 단지 오산진 일각의 땅으로 갈대가 무성했을 뿐, 군 관아는 현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에 있었으나 여기가 바로 왜구의 침입으로 초토화 되고 여태껏 복구가 되지 않아 오늘과 같은 한촌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33세 공민왕 원년(壬辰, 1352) 가을 7월, 합포 만호(萬戶)가 왜구 포로를 헌상하였다. 9월 왜선 50여 척이 합포에 침입하고 공민왕 2년(癸巳, 1353) 9월, 합포 만호 왜구 포로 8명을 헌상하고, 공민왕 24년(甲辰, 1364) 3월, 왜구 합포에 침입해 병선 40척을 파괴했다. 고려군은 방진했으나 이기지 못해 사상자 수가 아주 많았다. 4월 왜선 350여 척이 합포에 침입하여 군영과 배를 태웠다. 고려군이 방전했으나 사졸 사상자가 5천여 명이나 났다. 곧 조림(趙琳, ?~1408(태종 8).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을 파견하여 도순문사 김굉(金硡, ?~1374(공민왕 23). 고려말 동지밀직. 전라조 순문사, 경상도도순문사 등을 역임한 무신)을 주살하고 이를 각 도에 알렸다.

소생이 조사한 바로는 다음과 같다. 당시의 경상도 도순문사는 강중상(姜仲祥, 생몰년 미상. 고려 말 경상도도순문진변사, 관개성부사, 경상도도순문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김굉은 전라도 도순문사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김굉을 문책했다고 특기한 점으로 보아 김굉이 임시로 합포에 와서 강 순문사의 직무를 대행하여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또한 군영을 불태웠다 함은 합성리에 있는 구 정동행성인 합포진을 태운 것이며 전사자가 4천 명을 넘었다고 하니 퇴각병을 합쳐 진의 사병 총수는 1만 이상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으로 미뤄 보아도 당시 왜국 얼마나 우세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장군동에 있는 장장군 묘>

구전에 따르면 당시의 진장(鎭將)들은 지친 병사를 이끌고 함안 쪽으로 퇴각했는데, 장(張)모(某)라는 장군이 적은 병사와 함께 용감하게 싸워서 전사했다 한다. 왜인이 그 충성을 기려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 마산부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의 명칭은 이 장장군(張將軍) 이름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다. 현 토오리마치(通町, 현재의 장군동 일대)의 장군교의 상류 3백 미터쯤에 월포원(月浦園)이란 과수원 안에 있는 장처사(張處士)라고 각인된 무덤이 바로 그것이리라.

월포원의 서북 약 3백 미터쯤 가면 옛적에는 강변이었다고 사료되는 논밭에서 흔히 신라 말부터 고려왕조 시기의 옛날 기와 조각이 발견된다. 이것은 왕년에 해상경계를 위한 망루가 있던 데이거나 진영병(鎭營兵)들이 고대로 지키던 경비용 주둔지 예터일 것이다.

고려는 34세 공양왕 4년 임신(壬申, 1392)에 이르러 신하 이성계에 의해 전복되어 그 이후를 이씨조선이라고 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열여섯 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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