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4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9. 12.

제4장 중고사(中古史)

 

3. 제2차 정동전쟁(征東役)

신사(辛巳, 1281) 충렬왕 즉위 7년, 곧 일본 91대 고우다(後宇多) 천황 고안(弘安) 4년 정월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는 합포로 이전하여 신첨군(新簽軍, 새로 징발해 평성한 군대. 원나라는 주로 정복지역의 이민족으로 이 군대를 편성해 참전시켰다) 1만5천은 함안의 파수고개(오기 - 巴嶺, 고려사의 기록에는 巴嶺이 아니라 절령(岊嶺)이다. 절령은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험한 고개로 고려 원종 11년(1270)부터 충렬왕 16년(1290)까지 원 나라와의 경계였다. 충렬왕 7년(1281) 1월 28일 을축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동행성에서 첩문을 보내어 신첨군 1만5천 명의 식량 및 대군이 절령에서 합포에 이르기까지 말에게 먹일 자료를 준비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원나라가 국경인 절령에서 합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군량을 강요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함안과는 무관하다)를 건너 합포에 이르는 진군의 준비를 갖추었다. 3월, 김방경, 박구, 진주정 등이 군대를 이끌고 합포에 도달했다. 이어서 흔도, 다구 등도 역시 대군을 이끌고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4월에는 총독 충렬왕 역시 우부승지 정가신의 호종을 받으며 어가로 납시었다. 전함과 병사의 검열을 마치고 정동군을 출범시키고 7월까지 머물러 계셨지만 국내에서는 전번의 전쟁 패배의 여파로 인기가 소침해져 합포에 떨어져 있어도 왕실에 대한 아쉬움은 사방에서 일어나 충렬왕이 김해지방에 바람 쐬러 가서 머리를 식힌 사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2차 전쟁 후 환주산에 설치한 둔진(屯鎭)의 용수를 위해 팠다고 전해지는 몽고정(광대바위샘이라 불렀다)의 1910년대 모습

5월에 전함 3천5백 척이 준비를 마치고 19일, 흔도와 홍다구 등이 이끄는 몽한군 3만5천여는 김방경, 박구, 김주정 등이 이끄는 고려군 1만 여와 사공, 증조원 등 1만 5천이 합포를 출범, 21일에는 그 일부 5백여 척이 쓰시마의 사가우라(佐賀浦)에 상륙하여 참살과 약탈 등 만행을 저질렀으며 다른 부대는 더 나아가 이키섬까지 탈취하여 강남군의 도래를 기다렸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8월 홍다구는 세조제에게 약조하기를 전번에 일본을 정복하였는데 풍파와 파도에 저해되어 실패하고 말았던바, 다시 가서 정복하고 공을 세우지 못하면 다시는 뵙지 않을 것이라며 승전을 맹세했던 것이다. 그 정복의 겅료는 흔도, 홍다구 등은 몽한려의 혼성군 약 5만여가 합포를 출발하며, 범문호는 만군(蠻軍, 남송이 망하고 원에 귀속한 한병(漢兵)의 별칭) 10만 명을 데리고 강남(강소성(江蘇省) 영파(寧波))를 떠나 일본 이키섬 부근에서 합류하여 곧바로 전진하여 다장후를 공격하면 일본군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 아래 설정되었다. 세조제는 이 안을 승인하였다. 한 대부대가 이키섬을 점령하고 강남군을 기다린 사유는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남군은 약속 기을을 지나도 오지를 않았다. 한편 쓰시마섬에 상륙한 부대에는 역병이 유행해 쓰러지는 자가 3천여 명이라 나와 병사들의 사기는 덜어져 통역관 김저(金佇)는 도민의 항복을 설득했다. 앞의 전쟁에서 순사한 일본군 장군 스케쿠니(助國)의 아들인 소 모리아키아(宗盛明)는 분연히 이 제안을 뿌리쳐 도전해 왔다. 고려 장군 주정(周鼎)은 군사를 지휘하여 응전했으나 부장 강언, 강사자 등이 모리아키라 군에 사살당하고 남은 군사는 모두 함선으로 도주했다. 그때 예정보다 늦은 강남군이 전함 9천 척으로 도착하여 혼성군은 크게 기운을 회복하고 쓰시마 정복을 도모했다. 26일 해상에 바람과 파도가 몰아쳐 몽고장군 홀노물탑(忽魯勿塔)이 탄 배가 파괴되어 선병 1백30명과 노젓는 초공(梢工) 36인과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낭장 유비(柳庇)는 이를 원 조정에 보고하려 합포에 돌아가고, 김방경은 다시 사가우라를 습격했다. 일본군은 방어 전투에 힘을 쏟았으나 최신무기를 갖추고 원군까지 얻은 공격군에 고립무원의 쓰시마 군이니 승부는 이미 나있었다고 하겠다. 섬의 군사 3백여 명은 포탄에 쓰러지고 모리아키라는 백성들과 산속으로 도망쳤으나 발견되어 모두 학살되었다. 쓰시마를 거의 전멸시키고 나서 이키섬에 진군했다. 이키도민들은 이미 쓰시마의 참극을 듣고 있던 바, 지니는 것도 없이 다 본토에 피난하여 혼성군이 도착했을 때는 도민은 그림자조차 없었던 것이다.

혼성군이 이키를 정동군의 근거지로 삼고 6월 초순 후쿠오카 앞 바다에 임박하여 가라츠(唐津) 곶의 북방에 있는 겐카이지마(玄海島), 후쿠오카(福岡) 만 입구에 있는 노코지마(能古島), 가스야(粨谷) 군의 서방에 있는 시가지마(志賀島)의 섬 3개를 점령하여 그 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쓰시마의 참보(慘報)와 더불어 경고음이 천황이 있는 교토에 전해지자 유언비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회의를 하고 고후카쿠사(後深草), 가메야마(龜山) 두 상황(上皇)을 가마쿠라에 피신시켜 동쪽에서 병사들을 징집하여 교토를 수호할 것을 결정했다. 가메야야 상황은 특히 군난을 우려하여 몸소 무신을 모신 신사, 이와시미즈하치만구(石淸水八幡宮)에 참배하여 몽고군을 물리칠 것을 기도했다. 모라이 모라이(蒙來蒙來, 몽고가 온다 몽고가 온다)라는 말이 곳곳에서 우는 아이를 타이를 때에 상투어가 되어 오늘날에도 일본 동북지방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에 앞서 시코쿠(四國)아 규슈(九州) 방면에서 이름난 호족들,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를 비롯하여 기쿠치 다케후사(菊池武房), 쇼오니 츠네스케(少貳經資), 다케자키 스에가나(竹琦季長), 우야노 타네야스(大矢野種保) 등의 제장들이 병사를 이끌고 다 다자이후에 집결하였고 관서, 중국 지방의 제장들도 점차 참가하게 되었다. 수비군은 호조 사네마사(北條實政)를 군사청 감독으로 삼고 우선 해변가에 방어를 위한 보루를 쌓기로 했다. 그 길이는 몇 리가 되고 높이도 3미터나 되는데 오르기가 힘들고 정상부에는 활쏘기가 적절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미나기(水城), 물성이라 일렀다. 적이 다가오면 횃불을 던지며 주야에 걸친 방어전은 격전이었지만 적군의 위력 있는 거포 공격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오로지 신의 도움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히라도(平戶)의 마츠우라(松浦) 일당 천여 명은 외항에 갑자기 나와 시가지마에 임박했는데 악전고투 끝에 거의 죽고 생포된 자들은 포박되어 굴비처럼 엮이어 배 선축에 세워놓으니 손바닥에는 못이 박힌 상태였다. 어떤 밤에는 그사노 지로(草野太郞), 고노 미치아리, 오토모 요시치카(大友親眞) 등이 박은 배를 타고 겐카이지마에 있는 적에 접근해 배를 탈취하여 불태우고 수십 명을 수몰시켰는데 적의 거포 공격 바람에 기어코 후퇴하고 말았다. 전군에 용기가 저하해 전부의지가 없을 때 오직 고노 미치아리는 분개하여 백부 고노 미치토키(河野通時)와 함께 적의 활 공격을 무릅쓰고 함대에 침입해 신수 명의 목을 베고, 한 부장을 이질로 삼아 귀선 했지만 부하 20여 명은 거의 죽고 본인도 역시 왼쪽 어깨에 활을 맞았는데 육지에 돌아와 적 부장의 목을 베어 그것을 교토에 보내니 고우다(後宇多) 천황이 친서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홍다구가 이끄는 노코지마의 적군은, 몇 차례 오토모 요시치카(大友義親), 아키타 죠지로(秋田城二郞) 등에 의해 격파되어 그 기세가 저하한데다가 역병 때문에 진퇴를 고민하면서 거포 공격으로 겨우 일본군의 접근을 막을 뿐이었다.혼성군은 군회의를 열고 작전을 변경해 해상만의 입구를 봉쇄하고 지구전 전략을 펴 6월 13일 모 대부대가 다카지마를 점령했다. 가카지마는 마츠우라군 요비코(呼子) 항구의 동북 20여 정 거리의 해상에 있다. 양군이 대치하기 17일 동안 범문호(范文虎)는 일본 정복이 도저히 불가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성륙지점을 알아보겠다는 핑계로 전함에 올라 호위하는 배 몇 척과 더불어 귀항 길에 들어서 버렸다. 전군에 불안과 동요의 조짐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마침 6월 그뭄날부터 7일 동안 큰 폭풍우가 돌발하여 광란의 소용돌이치는 파도는 혼성군의 전박을 거의 모두 암초에 부딪치게 하여 전복, 침몰하게 되고 병사들도 거의 다 물에 빠져 죽고 그 시체는 조류를 다라 포구에 표류해 그 수가 10여 만이 되어 이를 딛고 바다를 건넜다고 할 정도였다.

다행히 전복을 명하고 합포에 도망쳐 온 병사는 3만에 비달아고 또한 1천여 명은 파도에 밀려 남하해 대만이나 팽호도(澎湖島)에 표착했다. 쇼오니 가게스케(少貳經資)는 이때에 투항자 1천여 명을 하카타 해안에서 참살하였고 해난을 다카지마에서 피한 적군 5백여 명은 식량 없이 사흘 간 굶는 중에 장백호(張百戶)를 우두머리로 파선 수리를 하여 도망치려 했으나 일본군이 이를 참지해 잡히게 되어 참살 당하게 되었다. 단지 간려(干閭), 막청(莫靑), 오만오(吳萬五)의 세 명만은 살려서 전상(戰狀)을 원제(元帝)에게 보고하라고 방면해주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고안의 에키(弘安の役)라 부른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4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