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1 - 건권(乾卷) / 제3장 상고사(上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8. 22.

 2. 일본 황실의 대한책(對韓策)

 

우리 조정 수진(崇神) 청황 시대부터 반도 동남변에서 일어난 동종 민족인 시라발(斯良原) 즉 신라왕국이 일본 황실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려고 해, 황군 및 왜한국은 이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수십 년 간 전투를 계속해 왔다.

그간 금한(金韓) 왕자인 소나가시치(蘇那葛朱智), 아라한(安良韓) 왕자 츠노가시치(都怒葛朱智) 가 입조해서 애소하기도 하고 가시라(金首露)인 시호노리츠히코(潮乘彦命)가 파견되어 임나한(任那韓)이란 신흥국이 나오기도 했다.

약 2백 년 동안 신라를 조용히 다스렸으나 완강한 신라는 다시 대두하여 진구황후(神功皇后, 진구황후가 신라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다는 소위 삼한정벌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동시대의 삼국지나 삼국사기와 같은 사른 사서에는 없는 왜곡된 것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이유로 삼았던 설이다)가 친히 정벌하기에 이르러 완전히 제압하게 되어 그 후 소강을 유지하더니 신라는 또다시 반기를 들고 일어나 고구려 왕조와 연맹하여 그 기세가 등등해 한제이(反正) 천황의 아우로서 후에 190 인교오(允恭) 천황이 된 다케아사츠마와코수쿠네(雄朝間稚子宿禰) 황자가 정벌하게 되었는데 황군이 평양에 진출해 고구려의 호대왕의 5만 대군에 격파되어 남쪽으로 피신해 신라왕성에서 고구려군과 백병전을 벌이다 그 일대는 초토화하였다.

20대 안코오(安康) 천황에 이르러 대한 정책은 잠시 느슨해졌는데 21대 유우랴쿠(雄略) 천황의 대한책은 전면 실패로 돌아가 26대 게이타이(繼體) 천황은 신라의 무례함에 노하여 오오미(近江)의 게노오미(毛野臣)에게 병사 6만을 주고 도해하여 신라를 견제케 했다.

케노오미 등은 김행0p 상륙하다가 당시 임나일본부의 아성이던 현재의 함안 아라국에 들어가 그 지세가 좋지 않음을 알고 기지를 구시무라(久是木羅)에 정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고사가 명기하고 있는 바, 구시무라는 현 창원군 일원의 고지(故地)라고 생각하는 점은 이미 서술한 대로다.

그 주둔 본부의 소재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재료는 없지만 지세 등으로 미루어 추측하건데 현 마산부 자산동과 뒷 담장 격인 환주산에 이르는 일대가 그 진지의 옛터가 아닌가 싶다.

신라가 여기에 골포현성을 구축한 것도, 고려가 합포진으로 경상우도절도사영을 구축한 점도 모두 여기의 지형이 북으로 산을 업고 남쪽으로 바다에 열려 있는 요새이기 때문이리라.

 

3. 최치원의 내유(來遊)

 

환주산에 골포현성이 세워진 것은 신라 35세 경덕왕이 일본 황실에 도움을 주었던 임나국을 전복하고 종래의 구지군(屈自郡)을 골포현으로 고쳤을 때라고 한다.

후에 이것을 합포군으로 고치고 신라 말에 문장과 학문을 닦은 대유학자로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란 아호를 가진 신라 왕도(王都) 사량부 출신의 최치원이 고려왕조의 흥기로 인한 화액이 미치는 것을 두려워 해 벼슬을 단념하고 곳곳을 다녔을 때 합포군치에 와서 서쪽 해변에 정자를 지어 이것을 월영대(月影臺)라 칭하고 서원을 연 것이다.

지방의 자제들이 많이 입문해서 문장과 학문이 크게 일어났으며 후세에 유생들의 허영인지는 몰라도 현재의 근주천(近珠川) 이남을 문창군(文昌郡)이라 사사로이 칭하였다.

현 마산부 월영동 지역에, 진동을 경유하여 고성, 통영, 방면으로 통하는 국도 선로 때문에 양분된 성긴 숲속에 있는 대(臺)의 단은 그때 세워진 정자의 옛터 흔적이며 여기에 서 있는 키 큰 비속에 새겨진 월영대, 세 글자는 최치원의 필적이라 전해온다.

 

 

고색창연하고 필세가 용건하고 아름다워 너무 좋은 것이며, 그 비 뒷면에 그 유래를 적으려 한, 가는 글자의 흔적이 있으나 약 천년 이전의 것이라 풍우에 마멸되어 한 글자도 읽지 못함은 참 유감스럽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열한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