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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9 - 건권(乾卷) /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by 운무허정도 2022. 8. 8.

4. 융희 황제의 행차

 

명치 42년(1909) 즉 대한 융희 2년(3년의 誤植) 1월 10일, 부왕인 광무(光武) 황제의 선양을 받으신 한황 이척(李坧)폐하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남쪽 순행(순종황제는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대구, 부산, 마산을 순행했는데 이를 남순행(南巡幸),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평양, 신의주, 의주, 개성 등지를 순행했는데 이를 서북순행(西北巡幸)이라 했다) 길에 올라 부산에서 철도로 마산으로 오시고 마산 이사청을 행재소(行在所)로 삼으셨다.

 

<마산경찰서 앞으로 지나는 융희 황제 일행>

 

이에 앞서 어가(御駕)가 남순 하신다는 소식에 관계당국은 밤낮 가리지 않고 봉영(奉迎) 준비에 분주하고 청록의 물방울이 그려진 큰 봉영문(奉迎門)이 마산역전, 교마치2정목, 반룡교 부근(현 교바시, 京橋), 동 1정목 완월교 부근(현 미야코바시(都橋)), 행재소 입구, 세관부두, 마산포 제일건널목 등의 여섯 군데에 설치되었다.

마산역에서는 2등 대합실을 응용하여 임시휴게소인 편전(便殿)으로 삼고 부근 일대에는 홍백의 천을 걸고 전항(全港) 각 집은 한일 양국 국기를 교차로 게양했다.

특히 폐하가 지나가실 각국거류지 대로변의 모든 집들은 양국기를 그린 천막으로 점포를 가리고 마산역 서쪽 매립지에는 불꽃을 쏘아 올리게 터를 잡았다. 행재소인 이사청 청사 및 이토 통감의 숙소인 언덕 위의 이사관 관저에는 빠짐없이 장식을 걸어놓고 어가의 도착을 기다린 것이다.

부산역을 떠나 융희황제의 봉거(鳳車)가 마산역에 도착한 시각은 10일 오전 10시, 전날 밤 부산항에서 회항하여 저도 부근에서 진형을 갖추고 정박하고 있던 제1함대는 이와 동시에 황제 의전 예포 21발을 쏘아 올렸다.

그 굉음은 천지에 울려 퍼지고 그 포연도 청천을 자욱하게 흐리게 만들 지격이었다. 불꽃은 그간 계속 하늘에서 구름이나 용, 사자, 호랑이 모양을 이루고 그 굉음은 무학 연산에 메아리 쳤다.

봉영의 모습은 마산역에서 완월교에 이르는 사이에는 가덕도의 진해만요새포병대대, 거제도송진포의 진해방비대를 비롯하여 제1함대 병사 약 1만 명과 마산의 각 공사립학교 학생, 직원, 일본적십자사 직원, 애국부인회원, 마산부인자혜회원, 그 외 진해(현 진동), 운천, 고성, 통영, 창원, 진영, 양산, 창녕, 칠원, 함안 등 각지의 공립학교의 한일학생들은 직원이나 학부형에 인솔되어 각 교기를 흔들며 병사 대열의 전면에 정렬하였고 일반인들은 십 수리나 멀리서도 나왔으니 거류지 내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군중이 마산항에 넘쳐난 것이다.

폐하는 봉거에서 내려 마산역에 급조한 편전에서 쉬시다가 행재소로 향하셨는데 폐하는 육군원수 차림으로 갈색 외투를 걸치시고 천장이 없는 가마에 올라타셨다.

가마 위로는 한국 일류의 깃 일산(日傘)을 받쳐 돌리고 친위병 십 수 기병이 창을 들면서 호위해 엄숙히 행진을 하였다. 시종(侍從) 원경(院卿) 이하 궁내부 관리 및 각부 대신이라 관리 수 십 명과 여관(女官) 4명은 다 인력거로 따라가며 호종하였고, 다음으로 이토 통감은 통감부 요직자 수 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갔는데 의장병 십 수기가 그 전후를 경호, 호위하였다.

통감부 직원 및 수십 명의 경찰관이 관사복 경호를 하는데 일행은 교마치로(京町通)에서 순로인 사카에마치(榮町)를 가로질러 도모에마치(巴町)에서 행재소로 드시고 통감은 이사관 관저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당일 마산항 내에 모여든 군중은 약 5만 명으로 일본인 동포 약 1만 명이 노소를 불문하고 제등행렬을 이루었다.

행재소의 대록문(大祿門) 앞에 당도해서 만세삼창을 한 후에 향내를 두루 돌고 이어서 흰옷 입은 한인 2만5천여 명의 대집단이 횃불 행렬을 하고 대록문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만내에 정박 중이던 20여 척의 전 군함은 모두 배 가득 전광장식을 켜고 그 밖의 탐조등을 비춰 돌리어 마산의 천지를 대낮같이 만들었다.

자복산(滋福山)에는 대(大) 자 모양의 불을 태우고 그 불길이 마산만의 거울 같은 표면에 비추어져 하늘을 태우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해상에 있는 수십 척의 어선들이 횃불 경쟁을 하면서 흥취를 돋구어 관람토록 하였다. 이 같은 성대한 상황은 아침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11일에 마산에 들어온 한일인의 숫자는 전날보다 배로 늘어났으며, 폐하께서는 오전 9시에 어가를 타시고 행재소를 출발하니, 의장은 전날과 같이 하여 마산포의 창원부청에 납시었다.

수행원인 황(黃) 경상남도관찰사를 마산공립보통학교에 보내 장학금 5백 원을 하사토록 하고 바로 행재소로 되돌아가셨다. 당일 이토 통감도 길을 나서 의장은 생략하고 거류지 방면을 시찰한 후 마산소학교에 들러 교육기금 3백 원을 기증하였다. 한황 폐하께서 당일 일본인 공공단체에 하사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 500원  마산거류민단립 마산심상고등소학교  /  금 200원  일본적십자사위원부, 마산부인자혜원  /  금 300원  애국부인회 마산위원부  /  금 500원  의학사 도쿠가나 고이치 경영 사립마산병원

한황의 이번 순행은 전 왕조 고려 25세 충렬왕 이래의 대 경사이므로 한일관민은 성의 껏 그 봉영에 노력하고 마산거류민단은 제반 통계표와 전항(全港) 사진을 헌납한 것 이외에 선어(鮮魚) 한 바구니를 각기 폐하와 통감에게 드린 것이다.

이날 오후 2시 폐하와 통감은 수행원과 더불어 제1함대의 기함 가토리(香取)에 토대 받아 승선하시게 되는데 행재소로부터 세관 부두 사이에 이르는 연도의 의장과 경비를 오전과 같은데 일행을 한 번 보자는 군중은 거류지 해안로에 넘쳐났다. 

전함대의 선박마다 모두 황제 예우의 예포를 쏘아 올려 그 연기가 마다를 덮고 그 굉음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각 함장과 무관 및 참모 등이 참가한 큰 연회 자리는 오후 4시에 끝났는데, 의장 행렬과 배관하는 군중의 사호ᅟᅪᆼ은 갈 때와 똑 같으며 야간의 광경 역시 전날 밤과 대동소이였다.

12일에는 경성으로 환궁하는 일정이라 페하께서는 오전 9시에 행재소에서 어가로 나가시고 그 뒤를 이토 통감이 따랐다. 의장 및 기타 일체의 상황은 동일한 가운데 마산역으로 향하셨다.

열차는 만세 소리 속에 바로 대구를 가기 위해 삼랑진을 향하였다. 마산역에서 봉송자들이 보내는 마세 소리는 무학 연봉에 메아리치며 구름까지 드어 올릴 것만 같은 대성황이었다.

 

5. 이토 통감의 애석(愛惜)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깊이 진해만 연안의 경승과 그 온화한 기후를 좋아하고 한황(韓皇) 행차를 전후하여 자주 마산에 내유하고 그때마다 미마스 구메기치 씨의 이사관 관저에 머물면서 술잔을 들며 미기(美技)들과 어울리고 혹은 시를 짓다가 서예를 즐기곤 하였다.

이곳에 별장을 짓겠다는 의향도 흘리기도 하여 마산 거류민은 모두 그 실현을 고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會根荒助)에게 통감 자리를 이양한지 얼마 안 되어 하얼빈 역전에서 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산 거류민의 경악과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주 순정하고 장렬할 추도회는 마산소학교 교정에서 개최되었던 발, 이제는 마산부나 도 당국에서 거의 잊혀진 감이 있어 이토 통감이 좋아하던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심정이 오롯하다.

이토 통감이 과거에 진해를 순시할 때에 방비대 사령관 미야오카 나오키(宮岡直記) 소장이 진해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통감이 바로 붓을 들어 아래의 칠언절구를 지었다.

미야오카 소장이 바로 자필로 쓰고 나가츠지(中辻) 공원에 비석을 세워 이 시를 새겼다고 한다. 지금의 나가츠지 공원의 큰 팽나무 아래의 빛나는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卽是東洋鎭海灣(즉시동양진해만) 여기는 바로 동양 최고의 요새 진해만이고

水軍潛影擁重關(수군잠영옹중관) 수군들의 드리운 그림자 몇 겹 관문을 안았네

想曾激戰沈樓艦(상증격전담루함) 이곳에서 격정 중에 침몰한 함대를 상기하라

成敗分來反掌間(성패분래반장간) 성패는 손바닥 뒤집기처럼 순간에 달린 것을<<<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아홉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