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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7 - 건권(乾卷) /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by 운무허정도 2022. 7. 25.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1. 고려 충렬왕의 행사(行幸)

 

마산은 원래 합포로 불려 왔는데 이 명칭은 현재의 마산 행정구에 한정되지 않고 마산만 연안 전부에 대한 호칭이었던 것 같다.

그 관할은 현재의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에 그 중심을 두고 진성(鎭城)은 현 마산부 자산동에 있는 환주산(還珠山, 현재의 추산 騶山)에 그 폐허(會原縣城址- 아래 사진)가 남아 있다.

 

 

몽고의 호족 출신으로 원나라 왕조를 세운 쿠빌라이 황제 홀필열(忽必㤠)은, 징기스칸의 손자로 그 위망이 높고 주변국을 정복하여 그 조공을 받던 터. 고려 25세 충렬왕(忠烈王)을 부마(駙馬)로 삼고 반도를 그 영토에 넣었다.

이미 남송을 통하여 일본의 동향을 알아보도록 했는데, 일본은 파견된 사신을 받지 않거나 죽이기까지 하면서 원 왕조의 무례함을 탓하였다.

그리하여 쿠빌라이 세조제(世祖帝)는 무력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조정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두고 합포에는 정동행영(征東行營)을 설치, 전함의 건조, 군사의 검열 등으로 합포는 전례 없는 번영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정동 대총독에 임명된 충렬왕은 즉위 7년 즉 일본 연호로 홍안(弘安) 4년(1281) 4월에 함대 및 정동군의 검열을 위해 합포에 행차하시었다. 우부승지 정가신(鄭可臣, 1224~1298 고려 후기 지공거,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이 호송하였다.

창원군 내서면 합성리에 짓고 있었던 정동행영(이 서술과 달리 실제로는 이로부터 거의 12백여 년 뒤인 1378년(고려 우왕 4년) 부원수 배극렴이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서 축성하였고 1408년 이곳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게 된다. 그러므로 정동행영과는 무관하다)은 당시 완성되지 않아 낙성할 때까지 원나라 원수 홀돈(忽敦)과 4천 3백 명의 병사가 주둔하는 환주산의 경상우도절도사영에 머물렀다고 한다.

행영이 완성되면서 거기로 이동하고 7월에 돌아가실 때까지 석 달 동안에 충렬왕은 김해 방면에 유람하러 가신 적이 있는데 그 발자취가 곳곳에 남겨져 있으며 고려사의 기사 속에는 그 상세한 내용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2. 고노에(近衛) 귀족원 의장의 내유

 

명치 35년(1902) 8월 26일 관료사회에서 평민주의의 태두로 불리는 귀족원 의장인 고노에 아츠마로(近衛篤麿, 근위독마, 1863~1904, 메이지 시대 후기의 화족으로 정치인이자 언론인. 호는 하산(霞山) 작위는 공작, 중국보전(支那保全)과 조선부식론(朝鮮扶植論) 주장. 한청일 3국 동맹안의 실현을 지향하며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활동을 하였다.) 공은 문사(文士) 구가 미노루(陸實), 가미야 사다오(神谷貞男) 및 부산 체류의 유지 몇 사람과 함께 바닷길로 마산을 방문, 사카타 쥬지로(坂田重次郞) 영사가 주재하는 마산영사관에서 일박을 하였다.

 

 

이때 공은 연전에 토지 매수를 둘러싸고 러시아 사이에 경쟁이 제일 치열했던 까치나무 고개(鵲津嶝)에 올라보고 마산만 전경을 한눈에 넣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어 별장을 건축하기 위해 양도를 의뢰했던 바,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공이 세상을 버리는 바람에 별장 이야기는 무산이 되었고 그 지점이 어디였는지도 지금은 모른다.

고노에 공을 잘 아는 전 법무대신 오카베 쵸쇼쿠시(岡部長職子)는 이 애석의 땅까지 먼 길을 와서 자필로 하산공유애지지(霞山公遺愛之地)란 표주(標柱)를 세워 기리기도 했다.

하산(霞山)이란 고노에 공의 아호이다. 나도 이곳이 인멸되는 것을 애석해 하여 명치 41년(1908) 말에 ‘마산번창기’를 편술할 때 ‘마산의 노래’ 속에 다음과 같이 노래 일 절을 넣었다.

“까치나루 고개 맑은 바람 카스미야마(霞山)가 사랑하던 조망 좋은 땅 소나무 푸른 잎이 뚜렷하구나. 고노에 고개로 이름 바꾸어 길이길이 전하리라”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에서는 까치나루 고개, 작진등을 고노에 고개라 부르고 이제는 천하의 공칭으로 되니 참으로 유쾌하도다.

그러나 오카베가 세운 푯말은 명치 42년(1909) 누군가에 의해 뽑혀지고 그 부근에는 마산중포병대대의 연습포탑만이 우뚝 서 있을 따름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일곱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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