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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8 - 건권(乾卷) /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by 운무허정도 2022. 8. 1.

3. 동궁 요시히토(嘉仁) 친왕의 광림(台覽)

 

금상(今上) 천황 다이쇼(大正, 1879~1926, 재위 1912~1926) 폐하가 아직 명치 대제의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 명치 40년(1907) 10월 22일 마산의 풍광을 보러 오신 영광은 만대의 역사를 빛나게 할 터. 당일 마산의 관공민의 열렬한 환영의 모습은 나의 메모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0월 13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有栖川宮威仁) 친왕, 윤군대장 가츠라 타로(桂太郞), 해군대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이와쿠라 도모사다(岩倉貝定),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 제씨와 동궁 직원들이 모신 동궁친왕 전하는 군함 가토리(香取)에 승선하여 한국 황실을 방문하는 목적으로 군함 가시마(鹿島), 이와테(磐手), 도키와(常磐), 아사마(淺間), 쓰시마(對島)와 수 척의 구축함의 경호 하에 히로시마의 구레군항(吳軍港)을 출발하여 16일 항해를 마치고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한국 27세 융희황제 및 후계자 영친왕 이은(李垠) 왕의 의장(儀仗)을 갖춘 환영을 받으며 악수를 교환하시고 나서 마차에 동승하여 경성에 들어가 19일까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 관저에 머무시고 20일 경성을 떠나 인천에서 귀국 길에 오르셨다. 이에 앞서 이토 통감은 한국 황실에서 태자의 태사(太師)로서 한국 황태자인 은(垠) 전하의 보도를 위탁 받고 됴쿄에 유학하러 가시는 전하는 보호해 궁내대신 이윤용(李允用), 농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등과 함께 전하는 모시게 되어 동궁 전하는 따라 22일 새벽 이른 시각에 위풍당당하게 진해만에 기항하였다. 당일 마산의 관공민, 유지 및 신문기자 등 40여 명은 회조(回漕)업자 사와야마구미(澤山組) 출장소에서 제공한 작은 기선을 타고 오전 4시 마산세관 부두를 출항, 검은 연기를 아침 바람에 뿜어내면서 저도(猪島) 앞바다로부터 부산수도(釜山水道)를 남진하여 칠원반도의 동쪽 끝머리인 설진포(設津浦) 전면에 가로 누워있는 실리도(實利島)에 착선할 것은 아침 5시경이었다. 일행의 반은 불꽃을 쏘아 올리려고 상륙하고 나머지 일행은 배에 머물며 장식을 화려하게 하고 함대의 입항을 기다렸다. 잠시 후 전기불 장식을 한 거함이 가덕수도(加德水道)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때는 박명, 서서히 진해만으로 향하니 동녘 구름에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해가 뜨니 전광이 꺼지고 수 척의 구축함이 함대 본대의 앞뒤를 지키면서 거제도 칠천수도 서쪽에 정박하게 되었는데 시각은 오전 6시, 요시히토 친왕은 부하들과 전함 가토리에서 구축함 사자나미(漣號)에 옮겨 타고 다른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칠천수도를 전진했다. 수도에는 군함 니이타카(新高)가 정박하고 있었지만, 전하는 인천을 떠나면서 자격을 해군 소좌로 바꾸었기 때문에 예포 발사 의례는 없었던 것이다. 약 20분 후 함대는 수도 서쪽에 타나나더니 우회해서 본함대 앞을 지나며 부산수도 서쪽에서 전진, 마산만에 들어와 서안의 율구미(栗仇味)의 치바촌(千葉村) 방면에서 우리 제국전관거류지 방면을 보시고 서쪽으로 돌아서서 각국 거류지 방면을 보신 다음 중앙부에서 수려한 무학 연산을 조망하셨다. 동북으로 향해 마산포 방면에서부터 마산성지 등을 보시고 저도를 돌아보시고 귀실리(貴實里) 앞바다에서 부도수도(釜島水道)로 복귀해 비봉리(飛鳳里), 현동(縣洞), 행암만(行巖灣) 앞바다를 지나 본선 가토리에 귀선하시자 바로 함대 태세를 갖추어 나가사키(長崎) 사세보(佐世保) 항을 향해 움직이던 때가 오전 10시였다.”

“마산 봉송단의 실리도 상륙대는 전하의 도착 시부터 떠날 때까지 늦가을의 하늘 높이 불꽃을 계속 쏘아 올렸는데 우연히 철천수도 서쪽을 나오며 배가 섬에 접근했을 때 한 개 불발탄으로 인해 들불이 유발되어 낙엽이나 가지에 불이 퍼져 수습이 쉽게 되지 않을 규모가 되자 배에 남았던 사람들도 예복으로 입은 양장 상의를 벗어 소방구로 쓰면서 진화작업을 했던 것이다. 실은 소생도 상륙하여 그 소화활동에 한 몫을 거들었는데 이 기괴한 행동을 보고 함상에서 동궁 전하는 얼마나 우습게 보셨는지 황공할 따름이다. 우리 일행이 마산 부두에 귀착한 것은 정오경, 항구 전체의 집집마다 게양한 국기는 교태롭게 바람에 날리우며 보기도 좋았는데, 한 가지 한심한 일은 해안가의 수산회사 부근의 고기잡이 집 세 채에서 콜레라(虎疫) 환자가 발생한 일이다. 마산병원장 도쿠나가 고이지(德永吾一) 의학사는 경찰관과 더불어 박멸과 에방에 노력 중이었으니 친왕의 광림이란 영예를 해친 것까지는 되지 않아서 미산거류민단 설립의 심상고등소학교는 교육기금 3백 엔의 하사를 받았다. 그날 봉송영(奉送迎) 일행의 중요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이 기억 되고 있다.”

거류민단 민장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 동민회(同民會) 의장 히로시 셰이조(弘淸三), 동(同) 의원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동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 동 모리야마 이지로(森山亥次郞), 동 히로시게 세츠노스케(弘重節之助), 동 시게무라 우이치(重村宇一), 동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 동 오다 겐시로(小田善四郞), 동 히사에 간사쿠(久重勘作), 동 하나오카 지사부로(花岡治三郞), 부산주재 오사카 매일신문 통신기자 야마구치 고오텐(山口皐天), 창원부윤 이기(李崎), 웅천군수 신석린(申錫麟), 거류민단 회계 다나카 소지(田角宗治), 마산경찰서장 경부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소학교장 사카지마 데이지로(中島訂治郞), 보통학교 학감 겸 훈도 구로키 겐지(黑木源二),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지배인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마산 이사청 소속 사카네 마사오(坂根正夫), 세관지서장 노구치 히쿄고로(野口彦五郞), 사와야마구미(澤山組), 마산출장소 주임 다나카 한(田中攀), 혼마치 잡화상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 교마치 잡화상 사카나가 후미오(酒肆文男), 부산일보 마산지국 주임인 소생 외 수십 명인데 마산 이사관 이마스 구메기치(三增久米吉) 씨가 안 보이는 것은 전하가 경성에 들어 갔을 때 같이 있다가 아직 귀임하지 못해서다. 마산우편국장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씨가 안 나타나는 것은 늦잠을 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이에 앞서서 마산민단에서는 마에다 민장이 경성에 가서 마산 바다와 육지의 전경 사진과 민단 제반 통계표를 전하께 드리고 귀조(歸朝)하실 도중에 마산항에 기항해 주실 것을 간청 드렸던 것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여덟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