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상고사(上古史)
1. 고시가라(古志加良) 이름의 연유
마산의 역사는 창원군의 그것과 분리해서 기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마산부 전부는 거의 창원군 외서면의 일부분이며 그 위치는 창원군치의 거의 중앙부에 있어서 창원의 배 속에 싸여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방의 상고사(上古史)를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재료는 없지만 중국의 고사기록인 위지(魏志), 위략(魏略), 한서(漢書) 등과 일본의 고사서인 고사기(古事記), 구사기(舊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아래 사진)에 따르면 반도에는 마한국(馬韓國)이 있었는데 그 세력 범위 안에 진한(秦韓) 및 변한(弁韓)이 있어 합쳐서 삼한(三韓)이라 불렀다.
그 동남 경계에 삼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고시가라국(古志加良國)이 있으며 일본신화의 태고로부터 교친국으로 교혼한 동근일종, 즉 같은 뿌리의 한 민족이 살고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이를 왜한(倭韓)이라 일컬었다.
고사기, 일본서기의 소위 이자나기(伊弉諾), 이자나미(伊弉册)의 음양신이 경영한 일본국 전체의 가라쿠니시마(韓鄕島)가 곧 이 왜한인 고시가라(古志加良)일 것이다.
당시의 신민(神民)은 현 창원군 웅천 혹은 현 김해군 김해 지방에서 쓰시마(對馬)를 중계지로 삼고 교통 왕래가 빈번했던 것처럼 바다를 건너간다는 뜻(津島)의 쓰시마는 그 때문일 것이다. 옛날 이즈모(出雲) 왕조의 주권자였고 다카마가하라(高天原)의 후계자로 사료되는 다케스사노오노미코토(建進雄尊,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타케하야 스사노오노 미코토(建速須佐之男命)라고 쓰기도 한다)는 그 아들 이타케미코토(因猛命)와 함께 3천의 무리를 이끌고 이 가라쿠니(韓鄕)에 주둔해 그곳의 개척에 낙동강의 수리를 이용해서 식민지로 만들었던 것 같다.
한(韓), 즉 가라는 가와하라(河原)에서 나오고 가아라(가하와)로 변하고 후세에 더 변해 가라로 된 것이다. 이에 가라(加良), 가락(駕洛), 가라(伽羅), 갈라(葛刺), 가야(伽倻), 가야(伽耶), 한(韓) 등의 다른 한자가 충당된 것은 오직 각 식민지에서 더 토착화한 소리를 채용했기 때문이다.
그 고시가라의 고시는 지방에 따라서는 구시라고 음이 전화되어 우리 마산을 중심으로 하는 현 창원군의 거의 전부는 당시 ‘구시무라’ 혹은 ‘고시무라’라고 불리어 이것에 구시목라(久是木羅)한 한자를 충당한 것이 자주 고사(古史)에 나온다. ‘무라’는 즉 오늘의 마을, 당시의 나라 혹은 취락의 뜻이다.
거제(巨濟), 거창(居昌), 거칠(居漆, 현 동래), 고자(固自, 현 고성), 거시(居施, 현 진주) 등 모두 ‘고시’라 소리하는 바 그 용례는 많다.
창원군 일대가 후세 신라시대에 구시(屈自) 군(郡) 혹은 구실(仇失) 군 등의 한자로 충당된 이유도 구시 혹은 고시의 음향을 채용함에 불과한 것이며 구시 혹은 고시는 바다에서 왔다, 산을 넘었다는 뜻으로 우리들의 먼 선조인 반도 동남부의 한향의 주민은 다케스나노오노미코토 혹은 그가 이끌어온 3천 무리의 후예인지도 모른다.
우리 제국의 개벽신화에 고시(古志)의 팔두사(八頭蛇)가 다카마가하라 조정의 영토를 침범하자 다케스사노오노미코토는 조정의 명을 받아 가라의 주둔군을 이끌고 귀조하여 기책을 마련하여 이들을 주살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고시가라란 명칭을 지닌 동남해변 고시부락의 불량배들이 결탁하여 해적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시마네 현 즉 이즈모(出雲)지방을 침범하자 이에 조정이 당시 해군대장이라 할 만큼의 다케스사노오노미코토가 지키는 고장에서 이 해적단이 나온 것을 질책하여 니코토를 소환하여 팔두사를 주살할 것을 엄명하자 미코토는 해적지방의 사정을 두로 할고 있기에 모략과 계략을 준비했다.
즉 큰 잔치를 열고 강화란 명목으로 여덟 개 집단의 해적군을 초대, 미녀와 술로 환대해 그 만취의 큼을 타서 해적을 eik 죽이고 그들의 연합 본부도 습격해 그들의 상징이던 보검을 탈취했던 사실이 전해 내려오는 중에 마치 여덟 머리의 뱀 이야기로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다케스사노오노미코토 이래 항향의 소식은 더는 전해오지 않았다.
이 낙동강변 각 마을에는 그 우두머리 격인 가락의 개국신화가 남아 있는 것처럼 간(干), 즉 신을 가리켜 우리의 신화시대와 같이 물가에서 몸을 깨끗이 한다는 수행(禊祓水行)을 하는 민족으로서 일본 천황 대권 아래 지배 받아 온 것에 틀림없으며 마산만 동북쪽 반룡산 기슭에 있는 반천(盤泉) 기취곡(氣吹谷)에는 지금도 여전히 태고 이래의 목욕재계하는 수행의 관습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이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열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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