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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3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9. 5.

제4장 중고사(中古史)

 

2. 정동군(征東軍)의 출발지

이에 앞서 원의 세소제는 이미 남송(南宋)의 왕실을 움직여 무위(武威)는 사방으로 드날렸으나 오직 일본열도 제국만은 의연하게 동행 우뚝 서서 대치하는 모습은 마치 원나라가 일어난 것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이에 따라 수차례 선유사(宣諭使)를 보내어 조공을 재촉했던 것이다. 당시의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의 집정직에 있던 호조사가노미노카미 도키무네(北條相模守時宗)는 강인하고 과단력 있는 성격의 인물이라 원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그 서한의 존대 무례함을 힐책해서 그 사신을 방축 시키거나 참살까지 해서 답서를 주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화를 내며 일본을 정복하기로 결정하여 새로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세워 원나라의 종왕(宗王)을 그곳의 좌승상으로 임명하고 홀돈(忽敦)을 정동도원수, 홍다구(洪茶丘, 1244~1291, 고려 말 원나라에 귀화한 무장. 구려에 들어와 봉주에 둔전총관부를 설치했고, 삼별초의 난을 토벌했다.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계획하자 조선 공사를 가혹하게 독촉했고 제2차 일본정벌 때 태풍으로 군사를 잃고 돌아갔다)와 유복형(劉復亨, ?~1298, 자는 성지(誠之), 한인(漢人)출신으로 원나라 때 활약했던 무장)을 부원수로 삼아 일본정복 준비에 착수케 했다. 원의 종왕은 정동을 위한 병영을 합포에 두기로 하고 새 병영이 건설될 때까지 마산의 고지인 합포진의 환주산 절도사영을 임시적으로 병영으로 사용했다. 대위중서시랑(大尉中書侍郞) 김방경(金方慶-아래그림, 1212~1300, 고려 후기의 무장. 정치가. 시호는 충렬. 1270년 몽고의 장군 혼도, 홍다구 등과 출전하여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1274년 원나라가 일본을 쳐들어갈 때 8청 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여몽연합군의 중군장으로 출정했고 1281년 2차 원정 때에는 고려군의 도독사가 되어 출전하였다. 충선왕 때 백상삼한삼중대광에 추증되었다)을 행영중군병마원수로 임명하여 원의 원수, 부원수와 더불어 합포에 내려와 전함 건조를 감독케한 것이다. 원수 홀돈이 몽고병 4천3백을 절도사영에 주둔시킨 것이 바로 이때다. 전쟁 준비가 완료된 것이 고려 원종 15년 갑술(甲戌, 1274), 곧 일본의 90대 가메야먀(龜山) 천황의 분에이(文永) 11년이었는데 왕은 출발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원의 부마이자 태자인 거(昛)가 왕위에 오르며 풍렬왕이 되고 상주 노릇도 못한 채 그래 10월, 박지량(朴之亮, ?~1292, 고려 말의 장군), 김흔(金忻, 1251~1309, 고려시대의 무신), 지병마사 임개(任愷)를 중군부사로 삼아 김방경 휘하에 두고, 추밀원부사 김신(金侁, 고려 후기의 무신)을 좌군사, 위득유(韋得儒, ?~1278, 고려후기 지병마사, 상장군 등을 역임한 무신), 지병마사 손세정(孫世貞, 생몰년 미상, 고려 원종 때 문신. 본관은 수주(樹州)-지금의 인천시 부평)을 그 부사로 임명하고 상장군 김문비(金文庇,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무신, 본래 미천한 집안 출신인데, 용력(勇力)으로 발탁되어 무신정권 말기에 야별포(夜別抄) 지유(指諭)가 되고, 장군, 상장군 등을 거쳐 충렬왕 때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까지 이르렀다)를 우군사로, 나유(羅裕, ?~1292, 고려의 무신. 본관은 나주. 삼한공신대광(三韓功臣大匡) 총례(聰禮)의 10대손이며, 형부상서 득황의 아들이다), 박보(朴保, 생몰년 미상, 고려 원종, 충렬왕 때의 무신, 본관 미상), 지병마사 반부(潘阜, 1230~?, 고려의 문신, 거제 반씨(潘氏)의 시조. 자는 군수(君秀), 호는 해려재(海旅齋))를 그 부사로 하고 이들 군대를 삼익군(三翼軍)이라 칭하고 모두 도원수 홀돈의 휘하에서 움직이기 하였다. 이리하여 2만5천의 몽한군(蒙漢軍), 8천의 고려군, 6천7백의 사공과 배 승조원 등을 합쳐서 3만9천7백여 명은 전함 9백여 척과 함께 여진군(女眞軍)의 도착을 기다렸는데, 오지를 않자 10월 3일 합포를 출발하여 현재의 진해만인 거제 바다를 가로지르고 외양으로 나가 순풍을 받아가며 4월 미명에 쓰시마의 사수포(左須浦)에 들어간 것이다. 사수포의 백성들은 너무 놀라서 어쩔줄 모르고 가재도구를 포기하고 산소그로 피신했다. 그때 쓰시마의 수호직에 있던 소우마노가시라스케쿠니(宗右馬頭助國)는 하카타(博多)에서 그 정보를 접하고 놀라서 바로 배를 타고 귀환했는데 여장을 풀 사이도 없이 바로 부하 80기를 이끌고 고모다(小茂田) 해변에 출진한 것이 9일 미명이었다. 몽한려(蒙漢麗)의 혼성군은 해가 뜨자 이를 알고 바다와 육지에서 응전하게 되니 스케쿠니는 필사적으로 활을 쏴 수십 명을 죽였으나 적의 수가 너무 많아 부하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14일 혼성군은 전진하여 이키노시마(壹岐島)를 공격했다. 수호직 다이라의 가케타카(平景隆)는 해안에 진을 치며 방어전을 하려 했는데 그 많은 적에 대항함이 무의미한 줄 알고 속임수로 항복을 하다가 적이 경계를 풀었을 때 부하들과 적진에 들어가 수십 명을 살상했건만 마침내 전사하고, 살아 남은 자는 산으로 도망쳤다. 24일 혼성군은 하카타로 진격하며 쓰시마, 이키의 전투 승리에 기세는 드높았음에도 일본 제장이 병사들과 해안에 열을 지어 격전을 벌이니 만만치가 않았다. 김방경의 사위 조변(趙抃, ?~1288 충렬왕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 문하시중 충(沖)의 손자로 문하시랑평장사 계순의 아들이다)은 홍다구, 중군부사 박지량 등과 함께 상륙하여 일군을 격최하면서 추적하여 이삼백 보 갔을 때 적의 반격을 받아 아주 고전에 빠져 사상자 수백 명이 났다. 혼성군 본대에서는 이를 보고 모두 상륙해 일본군을 보위했는데 죽음을 각오한 일본군이 뛰쳐나와 중군의 심장부를 공격, 피아간의 백병전이 버러지는 가운데 김방경이 위채로워지자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 김천록, 신혁, 김신 등이 구원하려 들어와 힘든 싸움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는데 해안에는 시체가 쌓이고 쌓였다. 한편 도원수인 흔도는 이미 전쟁에 지쳐 군을 돌리려는 상의를 하고 있던 바, 부원수 유복형은 다자이쇼오니오토모가게스케(太宰少貳大友景資)의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가 합포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죽었다. 흔도와 기망경이 진퇴를 고민하던 저녁, 폭풍우가 몰아쳐 전함이 표류하다 암초에 부딪혀 파괴되니 김신 이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만3천5백여 명, 나머지는 성남 파도를 무릅쓰고 11월 중순에 모두 합포 행영에 귀착하였다. 때 늦게 출발한 혼성군 2백30여 명은 모두 다자이후 연안에서 참살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분에이노에키(文永の役)라고 한다. 출렬왕은 이것을 알고 추밀원사 장일을 합포에 파견하여 귀환군을 위로하고 12월에 흔도는 쓰시마, 이키에서 생포해 온 동남동녀 2백여 명을 왕과 공주에게 헌납했다. 그러나 한번 예상치 못한 풍난(風難)으로 실패한 혼성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고려에서도 군사업무뿐만 아니라 군함 건조나 군영 유지에 막대한 식량을 감당해야 함으로 나라 전체가 피폐해지고 가련주구에 원성이 커지게 되자 왕은 김방경을 원나라에 보내어 정동의 원수 자리를 하직시켜 줄 것을 요청케 했다.

충렬왕 즉위 원년 을해(乙亥, 1275) 정원에 도원수 홀돈, 부원수 홍다구 이하는 북행하여 원으로 돌아갔는데, 왕의 요청을 방아들인 세조제는 그 해 일본에 선유사를 보냈다. 선유사인 예부시랑 두세충, 병부시랑 하문저, 계의관 살도노정래 및 고려의 통역장교 서찬 등의 일해은 합포를 거쳐 일본 다자이후(大宰府)에 도착했으나 집권 호조 도키무네는 일행을 가마쿠라(鎌倉)에 불러 국법을 어긴 죄를 물어 일동을 참살하였다. 이 소식이 원에 전해지자 세조제는 크게 노하여 바로 일본을 다시 정복할 것을 선언하고 김광원(고려후기 상장권, 경상도도지휘사 등을 역임한 무신)을 경상도 도지휘사로 전함 건조를 추진토록 합포로 보내었고, 11월 원의 사신이 다시 군기 준비를 왕종 급히 명령하니 왕은 기거랑(起居郞) 김제를 원의 사신과 함께 전라, 경상 두 도에 보내 백성이 가지고 있는 화살과 화살촉을 징수토록 했다. 같은 달, 왕은 김방경을 상주국판어사대(上柱國判御史臺)의 훈공을 가하며 첨의중찬상장군판전리관찰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觀察使)로 임명했다.

병자(丙子, 1276) 2년 6월, 원의 장군 하귀(夏貴) 등은 주복(周福) 등을 다자이후에 보내 전쟁의 이해를 설득시켰으나 도키무네는 그 무례함을 탓하며 하카타에서 목을 베었다. 8월 원나라 승려 조원 등이 내조하여 세조제 재정복의 결의를 전하자 도키무네는 바로 구주 북부에 병사를 집중해 이에 대항하여 했다. 이 해에 정동행성은 합포에 하역용 역마 140마리를 주고 동년 10월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합포진에 있는 사공이나 선원들을 쉬게 했다. 이보다 앞서 조양필은 원나라 사신이라 위장해서 일본에 파견되어 밤 열매를 얻어 이를 창원군에 있는 의안현에 파종하였더니 이 해에 처음 결실한 밤을 세조제에게 헌납하였더니 그 맛을 아주 크게 칭찬하였음이 『고려사 본기』에 보이는데 현재는 뿌리가 없어졌는지 창원군 지방에 일본 종으로 보이는 밤나무는 볼 수 없다.

무인(戊寅, 1278) 5월 합포총관(合浦總管)인 유(劉)가 몽고대처직(蒙古大妻職)을 사임하고 그 아들과 함께 원으로 귀국하였다.

기묘(己卯, 1279) 5년 6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노영(盧英)은 의원 두 사람과 함께 돌아오면서 갑자기 전함 9백 척을 건조하라는 정동행성의 성지(省旨)를 전하였다. 8월 사공 및 선원 일충(一沖) 외 세 사람이 일본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왔다. 그들이 말하기를 지원(至元) 12년(충렬왕 원년으로 원의 사신 두세충이 참살되던 해)에 승무원 30명과 함께 원의 선유사절 및 설인랑장(舌人郞將) 서찬을 따라 일본에 간 일행이 모두 참살되고 그들은 도망쳐 갖은 고생 끝에 돌아온 것이라 하여 행성에 보고했다.

경진(庚辰, 1280) 6년 5월, 원나라에 사신 갔던 유비(柳庇)가 귀조하여 왜적의 방어에는 자국의 군졸을 쓰라는 명을 전달하였고 9월 정동원수부진무(征東元帥府鎭撫) 야속달(也速達)이 와서 명을 전하는 바, 정동행중서성의 일체의 사무는 우승정동도원수 혼도, 다구, 범(范) 우승, 이 좌승 등에게 전임시킨다는 것이었다. 10월 겨울, 원의 모아란(毛兒蘭)이 와서 식량, 무기를 정비하고 병사를 모으라고 독촉하였다. 11월, 상주국중찬 김방경, 밀직부사 박구(朴球), 동 심주정 등이 합포에 오고 정동군사를 검열하였다. 12월 조인규 인후(印侯)가 세조제의 조서를 가지고 원에서 돌아왔는데 그 개요인즉, 왕을 의동삼사중서좌승상으로 하고 정동총독에 임명하는 인신을 주고 김방경을 중봉대부관령고려군도원수(中奉大夫管領高麗軍都元帥)로 박구를 소용대장좌부도통만호(佋勇大將左副都統萬戶), 김주정을 소용대장우부도통만호로 하여 삼자에게 호두금(虎頭金) 인신을, 조인규를 선무장군왕경단사관(宣武將軍王京斷事官)으로 다타무손(脫脫木孫)과 겸해서 금인신을, 박지량 등 10인을 무덕장군천호(武德將軍千戶)로 금인을, 조변 등 10인을 소신교위관군총파(佋信校尉管軍總把)로 은인을 주고, 김중성 등 20인을 충현교위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總把)로 임명하였다.

이 해 왕은 낭장(郎將) 지선(池瑄)을 원나라로 보내어 일본 정복은 아무 보람이 없는 수고로움이니 정동을 그만들 것을 간하였으나 세조제는 이미 남송을 뒤엎고 중국 천하는 통일하여 나라의 이름은 원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그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때인지라 그 간청에 노하며 바로 군비를 긴밀히 확장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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