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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5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9. 19.

제4장 중고사(中古史)

 

4. 스와오카미(諏方大神)의 기서(奇瑞)

몽한려(蒙漢麗)의 침공군은 분에이(文永), 고안(弘安)의 양 전쟁에서 폭풍우 때문에 고민에 찾는데, 당시 이것은 나가노(長野) 지방과 스와오카미(諏方大神)가 불어낸 신풍(神風)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스와오카미란 태고적 이즈모(出雲) 왕조의 주권자 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神)의 아들인 다케이나가타노미코토(建躬名方命)를 신으로 모신 것인데 부신 및 형신인 고토시로누시노미코토(事代主尊)는 다카마가하라(高天原) 왕조의 명에 따라 영토를 고스란히 갖다 받쳤는데 다케이나가타노미코토는 혼자 이에 반대하여 그 군대와 싸우다 패배해 나가노 산중까지 쫓기어 마침내 항복했다가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된, 국토 애석(哀惜)의 신이기도 하다. 그 지방에는 누지나무(梶樹)가 많은데 침공군에게 두 번의 대폭풍과 더불어 하카타 바다에 이 꾸지 나뭇잎이 날아왔다는 기이한 상서로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은 이를 감안해 스와오카미에 대한 신앙을 두텁게 하고 대사(大社)로 승격시켰다고 스와가보(諏方家譜)에 나와 있는 점을 소생의 아버지 고슈(翁洲)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다. 정사(正史)에는 아무런 기재가 없지만 부기하여 사가(史家)의 참고로 제공하는 바이다.

 

5. 전쟁 후의 지방 사정

그 후 충렬왕은 정동행영이 소재했던 지방의 협조와 노고를 치하하여 정동에 따라 신설한 행영 소재 지방의 원래 땅 의안현(義安縣)을 의창(義昌)으로, 또한 현재 회원리 지방의 옛 땅인 합포현(合浦縣)을 회원(會原)으로 개명시키고 다 같이 현감 치하에서 현령 치하로 승격시켰다. 정동행영은 그 신축 당시 김방경의 사위 안적재(安迪材)로 하여금 진수케 하고 그 규모는 아주 거대한 것이어서(아래 사진) 그 잔해는 지금 창원군 내서면 합성리 즉 당시의 의안현치로, 철도선 마산선의 구마산역과 창원역 사이 중간쯤에 황량하게 남아 있다. 이곳은 최근 대정 원년(1912) 즈음 지방구획개정 이전까지는 부내면 내성리와 외성리로 갈라져 있던 것을 합쳐 합성리로 고치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혼성군 출정, 유수, 경비를 위해 몽고 기병 3백 기가 합포에 왔는데 8월에 고려의 중랑장 김홍주(金洪柱)가 합포를 떠나 정동원수부에 들어가 정동군이 대패해 원수 흔도 이하 모두 합포에 도망쳐 돌아온 것을 황제에게 알렸다. 뒤이어 흔도, 다구, 범문호 등이 합포를 출발, 원나라에 돌아갔지만 못 돌아온 자가 10만여 명이었다. 11월 고려 내 각도 안렴사(按廉使)의 상황 보고를 집계하면 정동의 고려군 9천9백60명, 사공 등 2만7천29명 합계 3만7천49명인데 살아서 돌아온 자가 1만9천397명이며 현해탄의 고기밥이 되어나 규슈의 다타라(多多良) 해변에서 목숨을 잃은 자는 1만6천650명이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려군만의 숫자이며 몽한의 합계는 10만여 명을 넘을 것이란 건 이해가 될 것이다.

임오(壬午, 1282) 8년 여름 4월, 원나라의 불팔사풍원길(不八思馮元吉) 등이 합포에 와서 군량을 감정, 점검하여 다시 정동전쟁이 있을 것을 예상해 병사 340명으로 항시 위수지를 지키도록 하였고 동지 밀직사사(密直司事, 고려시대에 왕명의 출납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던 밀직사에 속한 종이품 벼슬. 충렬왕 1년(1275)에 추밀원사를 고친 이름이다) 박구(朴球, 고려후기 동지밀직사사, 지밀직사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무신)도 와서 지휘하였다. 6월 만군(蠻軍) 총파(總把) 심총(沈聰) 등 6명이 일본에서 도망쳐 나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인은 본디 명주(明州) 출신으로 원나라 18년, 일본의 고안 4년 6월 18일에 가라베이(葛刺反) 만호를 따라 일본에 가 악풍에 시달려 함선이 파괴되어 십삼사만(十三四萬) 명의 병사와 함께 일산도(一山島)에 머물고 10월 초 8일 일본군이 왔어도 우리 병사는 굶주림 때문에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항복하게 되었는데, 일본군은 그중에서 수공, 기예에 능하거나 농경에 익숙한 자만을 포로로 하고 나머지는 다 참살하였습니다.” 상장군인 인후랑장(印侯郞將) 유비(柳庇)는 그들을 원나라로 호송시켰다.

필자는 말하련다. 총(聰) 등이 말하는 바는 다카지마의 패잔명 이야기일 터이며 병사 십삼사만이라고 하는데 수백 명과 너무 차이가 알뿐더러 7일 동안의 폭풍우를 맞았음에도 10월 8일까지 약 70일 후에 일본군에 발각된 것은 너무 의심스럽고 하물며 그 숫자가 십삼사만 명이라 하니 이는 터무니없는 노릇이리라.

이해 8월 만군 5명이 또 일본에서 돌아와 합포에 왔는데, 정동원수부는 다시금 고려를 독촉하여 제3차 정동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계미(癸未) 9년(1283) 3월 초하루 유비 낭장이 원나라에서 동아와 말하시를, 황제는 강남군을 징발하여 8월에 또다시 정벌하려 하니 무기와 식량 및 전함의 수리, 건조를 하라 하셨다 한다. 4월 원나라 장수 탑납아독랄(塔納阿禿剌)이 합포에 와 전함 준비를 독촉했으나 5월에 이르러 세조제는 비로소 이 정동행을 단념하게 되었다. 애초 제2차 정동의 실패 보고가 있었을 때 온 나라가 아연실색했는데도 세조제는 도리어 무척 분개하여 곧바로 제3차 정동을 기획했다. 그러나 충렬왕은 이미 두 정동전쟁에서 참패하고 군비 부담 때문에 국내의 피로감은 말이 아니며 도적떼들의 봉기도 잦았으니 일본과 원 사이에 평화가 이뤄지기를 바라며 김유성(金有成, ?~1307, 고려후기 감찰어사, 첨의평리 등을 역임한 문신. 선위사가 되어 서장관 곽린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가 역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뒤로 김유성의 생사를 몰랐으나 일본의 중 겡코(鉗公)에 의해서 가마쿠라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을 다자이후에 파견하여 화의를 설득했다. 당시의 막부집권이던 호조 도키무네의 아들 사다토키(貞時)는 바로 고려의 사신 김유성을 억류하고 말았다. 원의 이부상서(吏部尙書) 유선(劉宣)은 정동의 시기가 임박했음에도 시세가 불리하다는 점을 세조제에게 간언하여 말하기를 “일본은 절해 고원의 군소한 섬나라에 불과하며 이를 정복하려면 참으로 많은 비용이 들어가 여원(麗元) 양국의 백성을 곤란한 처지에 몰아넣는 셈이 되고 만약 정복이 되었다 해도 그 행정 관리들의 왕래에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 과대한 손해는 있을지언정 아무런 이익이 없사옵니다.” 세조제는 이 간언에 깨달은 바가 있어 정동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열다섯 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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