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7 - 건권(乾卷) / 제5장 근고사(近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10. 3.

제5장 근고사(近古史)

 

1. 이씨조선의 흥기

고려 말 함경도 함흥 사람, 이, 즉위 후 단(旦)을 자(字)로 스는 성계(成桂ㅡ 아래 사진) 병마사(兵馬使)가 왜구를 전라도 운봉현(雲奉縣) 병산(屛山)에서 물리치고 점점 세력을 키우더니 스스로 삼군 도통사(都統使)가 되어 급기야는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반도 천하의 통일을 이룩해 왕위에 올랐다. 이 인물이 이찌조선(李氏朝鮮)의 시조왕(始祖王)으로 즉위하니 그 해를 개국기원 원년으로 정한 그때는 일본 99대 고가메야마(後龜山) 천황 즉위 9년 임신(壬申, 1392)년 7월이었다.

이 왕실이 그 후 약 5백 년간 계속하여 마지막 무렵 대한(大韓)으로 개조하여 왕위 대신 황체라 칭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 대한민국은 그 모든 것을 명치 대황제에게 바치고 나라를 일본 제국에 합병시켰다. 3세 태종 방원왕 때 현 창원군 내인 의창, 회원이란 두 개 현을 합쳐 창원(昌原)으로 고치고 군치를 원래 부내면 내성리 의창인 현 내서면 합성리에 두었다. 즉 구 의창현지에 있던 정동행영의 폐허인 것이다. 구 창원이란 의창의 창, 회원의 원을 연접한 데서 기인한다. 그 후 창원을 도호부로 격하시킨 일도 있었으나 11세 중종왕 때 군으로 복귀하여 이것을 동쪽 마을이 성하던 현 창원읍에 옮겨 읍성을 지으니 관아와 병영은 장려하였다. 이로써 창원군수는 합포란 명칭이 몽한려의 혼성군이 전후 두 번에 걸쳐 전쟁에 참패한, 불길한 이름이라 하여 만의 서북쪽에 있는 작은 언덕을 오산이라 부르고 언덕 아래 마을을 오산진(午山津)이라 부른 까닭에 그 지방 일대를 오산진이라 통칭하도록 종용, 선전했다. 그러나 기백 년 인구에 회자된 합포란 이름은 지금도 촌로들 사이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창원군 내서면 산호리이다.

 

2. 마산성터의 유래

조선에서의 이른바 임진왜란 즉,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태합(太閤)에 의한 전쟁은 조선의 13세 왕 선조 25년(1592)에 일어났다.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의 일부는 세 갈래로 나뉘고 도중에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경성이 함락되고 왕은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의 상륙 지점이었던 부산포는 그 근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평정을 위해 출병시켰다. 좌수사 박홍(朴泓, 1534~1593.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청원(淸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서 왜적의 선봉을 맞아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1593년 1월 평양이 수복되자, 김명원을 따라서 파주까지 종군하였으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귀향하던 도중에 죽었다.), 우병사 이각(李珏) 등은 겁에 질려 도주했는데 밀양부사 박진(朴晉, ?~1597.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의열(毅烈), 비변사에 근무하다가 1589년 심수경의 천거로 등용돼 선전관을 거쳐 1592년에 밀양부사가 됐다. 임진왜란 중 경주성을 공략해 많은 수의 왜적을 베고 성을 탈환했으며 패배를 거듭하던 왜란 초기 전투에서 두드러진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다른 장수들의 시기도 받았다. 1593년에 독포사로 밀양 울산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며 왜란 중 수차례 여러 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했고 사후 좌찬성에 추증됐다.)이 작원(鵲院)의 요새를 고수함이 에상되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역시 만만치 않은 기세로 있고, 특히 김해에는 부사 서예원(徐禮元)과 초계군수 이 모(某)가 함께 고수하고 있었다.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와 그의 아들 요시나가(幸長)가 함께 이들을 공격했으나 고전에 빠졌다. 센다이(仙台)의 성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밀양에서 그 소식을 듣고 위기에서 살려내려고 김해부로 달려가니 이 군수가 먼저 쓰러지고 이어서 서예원 부사 역시 도주하게 되었다. 다테가 좇아가 창원군에 들어서서 오산진에 주둔하게 되었다. 마침내 스스로 설계를 하고, 성을 쌓는 축성사를 불러 오산 동쪽 마루에서부터 해변 사리에 성을 짓고 다시 편전 기지로서 해변가를 매축하는 중에 군(軍) 중에서 발생한 학질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매립이 완성되지 않은 가운데 회군하게 되었다. 부장 하라다 사마(原田左馬)는 도중 쓰시마에서 객사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

북진의 선봉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평양을 점거하자 조선을 응원하는 명군의 객장(客將) 심유경(沈惟敬)이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를 할양하겠다는 감언에 속아 당화를 임시 체결해 사가(佐賀)의 나고야(名護屋)에 있는 본영에 그 비준을 묻는 사이 휴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분로쿠(文祿) 2년 계사(癸巳, 1593)년 5월, 북진한 제군이 모두 동쪽으로 향하고 마닷가 순천에서 울산이 이르는 70여 리 사이에 18개의 주둔지를 만들고 각 대장이 이것을 지키게 했다. 그때 창원의 수비는 사가 성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맡았는데 오산의 미완성이던 성을 완성시켰다고 전해온다. 즉 오늘날 이 지방 인사들이 봄, 가을에 그 풍경을 즐기려 소퐁가는 마산성 유지(遺址-아래 사진- 흑백 3개는 옛모습, 칼러는 현재모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 바로 그곳이다.

그 터는 지금 창원군 내서면 산호리의 서쪽에 있는 언덕에 있으며 마산만에 임하여 본영, 망루, 무기고, 부속건물 등의 돌담은 아직도 남아 있다. 산곡대기의 무기고 옆에는 성문이 있었는데, 남으로 내려가는 정문 즉 오테몬(追手門), 북으로 내려가는 후문 즉 가라메테몬(搦手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병사(兵舍)는 지형으로 볼 때 그 남쪽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편전의 터로 추측되는 기단은 대정 3년(1914)경까지 있었는데 언젠가 파헤쳐져 민가가 들어서 그 흔적을 알 수가 없다. 축성에 필요했던 석재는 대개 환주산의 구병영 터와 정동행영 터에서 운반한 것이며 뒤에 도리이 다다마사(鳥居忠政)가 여기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 사람들은 이를 노비산(奴備山)이라 부르는데 모름지기 왜놈(倭奴)이 수비한 산이란 뜻일까?<<<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7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