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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도시이야기

중평들판의 팽나무

by 운무허정도 2023. 2. 1.

이 글은 1월 30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된 것이다.

1200백 년 까마득한 세월, 해상왕 장보고가 서해를 호령하던 때. 그 아득한 시간 언젠가 중평이라 불렀던 들판에 팽나무 한 그루가 섰다.

그로부터 1000년도 더 지난 20세기 벽두, 동아시아 해상 장악을 꿈꾼 일제는 해군기지와 함께 그곳 중평들판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창원시 진해구의 '구도심' 혹은 '서부지역'이라 불리는 곳이다. 11개 마을의 390가구, 2000여 주민이 신도시건설로 쫓겨났다.

청천벽력, 하루아침에 땅 빼앗기고 집 헐리고 내동댕이쳐졌으니 그런 목불인견이 없었다. 이를 두고 매천 황현은 '왜인이 늑탈하여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다'고 한탄했다.

저항이 없지 않았지만 이미 일본인 세상이라 버틸 수가 없었다.

쫓겨난 이들은 2㎞쯤 떨어진 곳에 모여 살았다. 경화동이다.

'빼앗은 자들의 도시'는 진해라 이름 붙였다. 창원시 진해구가 된 옛 진해시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한국인 흔적을 싹 쓸어 없앤 뒤 일본인 천지의 신도시를 만들었다. 남긴 것은 단 하나, 중평들판 한가운데 선 팽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모든 것을 없앴는데 이 당산나무는 왜 살렸을까.

워낙 잘생긴 고목이라 신도시의 랜드마크로 삼으려 했을까. 중평들판을 끼고 산 한국인들이 그 밑에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제사도 지냈던 신목(神木)이라 민심이 두려웠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200살 늙은 팽나무는 신도시 중원로터리 한복판에서 식민지 세월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수형이 좋아 민관군을 막론하고 그 밑에서 행사와 촬영도 많이들 했다.

1930년대, 일본인들이 팽나무 아래에서 행사를 하고 있는 장면

팽나무가 수명을 다한 것은 해방 후 1950년대였다. 살았던 세월로 보아 자연사였을 터이다.

폭 30m, 높이 15m의 국내 최고령 팽나무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사 후 같은 자리에 어설픈 조형물을 세우기도 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

일제가 건설했지만 도시사적 관점에서는 진해 신도시의 가치가 크다. 함북 나남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방식으로 신도시를 건설했지만 제 모습대로 남은 것은 진해뿐이다.

정부도 이 가치를 인정해 2021년 11월 중원로터리 일대를 등록문화재 제820호 진해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시민들과 창원시와 전문가의 노력이 컸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모든 흔적과 유산은 신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한 1910년 이후의 것이다.

그 이전의 것들, 중평들판과 마을·집을 비롯해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겨우 도만, 도천, 속천, 안곡, 여명과 좌천이 합쳐진 여좌라는 동네 이름만 남았을 뿐이다.

제2권을 보면 제1권이 보고 싶고 제1권을 읽으면 제0권이 알고 싶어진다. 건축가 루이스 칸의 말이다. 제0권은 '이전(以前)'의 다른 표현이다. 제0권이 없는데 어떻게 제1권이 생길 수 있겠는가? 제1권이 생겼다면 그것은 제0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제1권 앞에 제0권이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중편들판은 일제 신도시 이전에 우리 조상이 땀 흘리고 부대끼며 희로애락을 나눴던 삶터였다. 그것을 기억하도록 팽나무를 다시 심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회상장치, 살아 있는 스토리텔링, 생태적 도시경관을 위해서도 좋다.

그리하여 300년이 지난 후 '이 팽나무는 1200년 된 팽나무를 기리며 우리 선조가 300년 전에 다시 심은 나무'라는 말이 나오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