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혁
진해는 진해만(鎭海灣)이란 바다의 힘에 의해 생긴 도시이며 군항지인 동시에 동양에서 유일한 상항(商港, 진해항만을 가리킴)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수천 년 전의 일은 몰라도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 때부터 임진왜란(文祿慶長の役, 분로쿠게이조노에키)에서의 해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진해만에 관한 것이며 그 천연의 요새임은 이곳을 의거하는 자는 필승하고 이에 반한 자는 필패했듯이 이 만의 위력은 그만큼 위대한 것이다.
일본해 해전에서 발트해 함대 섬멸도 역시 이 지세의 유리함에 의한 것이다.
또한 도고대장(東鄕大將)이 발설한 <황국의 흥폐는 이 일전에 달렸으니 제군이 노력하도록>이란 무선통신을 통한 훈령은 참으로 세계의 해전사상 천고 불멸의 이채를 띤다.
우리 제국은 대한제국과 체약해 거제군과 창원부의 각 일부를 군항경역지(軍港境域地)로 정하고 양국 위원 입회하에 토지매매를 종료했다.
명치 43년(융희 4년, 1910)부터 진해군항 개설에 착수한 것이다.
또한 군비시설을 갖추는 한편, 군수품 인수 등 기타의 필요에 따라 진해시가지 건설을 인정하고 여기에 일대군항(一大軍港)을 창설할 것과 동시에 일대 상항지(商港地)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시황(市況)은 해마다 순조롭고 호구의 증가도 계속되어왔는데 불행하게 대정 5년(1916)에 이르러 군항계획이 일변하여 진해가 요항부(要港部, 1916년 4월 해군은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진해군항에 (중략) '요항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중략) 1910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었던 진해군항 건설계획은 여기에서 규모를 축소하게 된다 - 다케쿠니 도모야스 2019)로 지정되자, 만내에 함선이 보이지 않아 시황도 부진해져 시민은 이직해서 실업하는 자가 많아지면서 왕년의 볼품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 후 십몇 년 동안 각고분투를 거듭하면서 마침내 진창(鎭昌)철도 개통을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요람』 부분이다. 1926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오카 만키치(岡萬吉)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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