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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진해』(1912) - 51. 10년 후의 진해

by 운무허정도 2025. 8. 11.

51. 10년 후의 진해

 

아래 1편은 일본전보(日本電報) 10년 기념호 지상에 전 진해방비대사령관이었던 가미이즈미(上泉) 소장이 담론하신 바, 물론 그 담론이 극히 정곡을 찌르고 있는지 아닌지에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10년 후의 진해라기보다 혹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추측이며 허가를 받아 전재(轉載)하게 되었다.

10년 후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그것이 머나먼 미래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도 있겠다.

좌우지간 진해의 미래기 즉 꿈 얘기로서 여기에 기재했다. (저자)

1930년대 진해 시가지

 

10년 후의 진해

전 진해방비대 사령관 해군소장 가미이즈미 도쿠야(上泉德彌)씨 담(談)

 

현재의 진해

10년 후의 진해를 얘기하려면 우선 현재의 진해만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돌이켜보니 10년 이전 러일전쟁이 아직 개전하지 않았을 때, 이곳 형세는 일찍부터 천하에 으뜸갈 것임에도 한국정부는 끝내 이곳을 이용할 줄 모르고, 가령 그 가치를 안다 해도 이용할 만한 실력이 없어서 그냥 황량한 시골로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육지가 이어져 있는 동양의 경영에 전념하던 러시아는 계속 이곳에 착목(어떤 일을 주의하여 보는 것을 가리킴)해 만내 측량 등에 종사하며 획책한 바가 있었다.

그 후 러일전쟁이 시작하자 쓰시마해협 방비와 더불어 이 만(灣)내는 군사상 가장 중요시되어, 동해해전(쓰시마해전) 이전에 멀리 발트해에서 오는 진객(珍客, 신분, 지위가 높거나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는데 우리 도고대장함대(東鄕大將艦隊)는 여기에 숨어서 작전을 펴갔다.

그러나 진해와 우리나라 외정(外征, 외국으로 출정함)과의 관계는 러일전쟁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옛날 진구황후 삼한정토(三韓征討)에서 고안분로쿠(弘安文祿, 아즈치모모야마(安山)시대 일본 연호의 하나(1592~1596)전쟁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교섭이 이루어진 것은 올해 3월 15일 시가지 중앙 나카츠지(中辻)에 세워진 진해군항설치기념비 각문에서도 분명하듯이(각문생략) 이것으로 봐도 진해가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 이토공(伊藤公)이 이 진해만에 대해 얼마나 숙고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군항 건설 사업은 당국이 열성을 기울여 착실히 진행되어 있어, 명치 47년(1912)에는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10년 후에는 진수부(鎭守府)로서 그 설비가 완비되어 의연하게 동양의 중요 거점이란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시가지 건설 공정(工程)을 보니 이것 역시 착실히 진행되어 왕년의 모습을 일신함과 더불어 실제로 남선에서 유일한 도부(都府, 한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 다운 상황을 보이고 있다.

작년 1월 1일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선인 부락 이외에 한 사람의 일본인도 보지 못했던 광활한 들판을 개척해 선인을 경화동으로 이주하게 하고 시가지 제1회 대하(貸下)를 실시한 이래 실적은 아래와 같다.

 

-  명치 44년(1911) 4월 1일 제1회 대하 평수 36,000평

   건축 전부 준공 호수 2,000호, 인구 약 15,000명

   투자금 약 300만 엔(1912년 3월 조사)

- 명치 44년(1911) 11월 29일 제2회 대하 평수 35,000평

   부지 전부 준공 건축 낙성 백 여호 인구 10,000명, 투자금 약 300만 엔(동)

-  명치 45년(1912) 3월 15일 제3회 대하 평수 시가지 약 24만평 외 산림 130만 8천 평

오는 8월 31일 제2회 대하지 건축낙성(落成)시에는 인구 30,000명으로 도달할 전망이며 더 나아가 제3회 대하를 마치고 토목건축에 착수하면 본년도(1912년) 말에 인구 5만 명으로 될 것이다.

 

이제는 입찰 및 가옥 건축을 위해 각지에서 들어온 상인 등으로 북적대는 모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날마다 재등만, 비봉리에 상륙하는 사람의 숫자는 수백 명을 이룬다.

특히 재등만 부두는 건축용 목재, 식료품, 가구 등이 내지나 남선은 물론 멀리 북선 만주지방에서 수입되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선박을 오르내리는 여객들은 간신히 그 짐 사이를 비집고 지나갈 만큼 성황을 이루고 있다.

시가지에는 세계의 물품이 없는 것이 없으며, 행암만의 남선 어업근거지에는 조선해수산조합에서 이미 영업허가를 받아 계속 이주의 물결이 일고 있으며, 이는 남선의 모범 어촌을 만드는 동시에 남선 일대의 어류를 모아 내지에 수출할 계획인 것이다.

현재 면허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열리고 있는 덕산 어시장에서는 매일 평균 어획고가 300여 엔에 가까우며 행암만 세관 옆에 건설된 진해 수산시장도 이제는 영업을 개시하려는 마당에 있는데 상당한 어획고가 있다.

또한 조선해수산조합이 해군에서 양도받은 거제도 송진포의 토지가옥에는 각 부현(府縣)에서 500호에 이르는 어민을 이주하게 하고 모범 어촌을 만들려고 1912년 초부터 이주를 개시했다.

교통의 현상은 매일 연안 항로선이 왕복 여섯 번 기항하며 그 외에 마산과 진해 사이를 매 한 시간마다 왕복하고 있어서 하나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소학교는 건축지부(支部) 터에 1월 10일 개교 시에는 아동이 113명이었는데 신학기 후의 오늘날에는 500여 명에 달했고 게다가 내년이 되면 얼마나 많은 아동이 들어오게 될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10년 후의 진해

이상 순서로서 현재의 진해를 대략 설명한 나는 다시 주된 문제인 10년 후의 진해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우선 시가지 발전부터 예상을 하겠는데 불과 2년도 채 안되어 인구 5만에 이르려는 놀랄만한 팽창력을 지닌 진해는 10년 후 남선의 수도로서 정연한 가로를 지어 넓이도 수 리(里)에 이르는 대도시가 출현할 것임은 천리안을 가지지 않더라도 요연한 바이다.

현재 시가지를 몇 배로 하고, 경화동, 신덕리 및 덕산을 거쳐 행암리에 이르는 넓은 평지는 나고야(名古屋), 센다이(仙台), 히로시마(広島) 등 도시 4, 5개를 합친 것 같은 대도시가 건설되고, 그 세력이 울창해 북쪽으로 동 (일본해 日本海)를 지탱하고, 남쪽으로는 태평양을 노려보게 되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지 감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인구는 물론 수십만 명에 이르러 동양 굴지의 내지 무역항으로서 시가지의 융성이나 상인들의 왕래는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진해 장래의 발전상 지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몇 가지가 있을 터인데 이번에 좌천리(左川里)에서 두 군데, 덕산 방면에서 두 군데 발견된 라듐 철령천(鐵靈泉)은 앞날의 발전을 잘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애당초 그 영천은 행암만에 있는 백사장 청송 사이에서 용출한 세 군데와 합치면 하루 300톤의 용출량이 있으며 특히 라듐을 함유해서 만병을 치유한다기에 이제는 장대한 욕장주식회사를 창립할 계획이 무르익어 세계의 욕객을 모음과 함께 그 영천을 병에다 담아 세계 시장에 판매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장래는 조선에서 유일한 대영천이 되고 그 이름이 만천하에 퍼지게 될 것이니 회사 발기인은 장래 이익을 나누어 군비를 충실히 할 자금으로 충당해 나라에 봉사할 각오라고 하니 참으로 전도유망한 일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진해의 기후는 극히 온순하고 우량도 적고 날씨가 대개 건조하여 이주 토착하기에는 아주 적당하다.

성하(盛夏)라 해도 화씨 90도(섭씨 32.2도)를 넘는 날이 없고 엄동이라 해도 역시 화씨 15도(섭씨 영하 9.4도)로 내려갈 때가 적으니 피한피서지로서 적절하고 하물며 산광수색(山光水色, 산의 빛과 물의 색 즉 경치가 좋다는 뜻)이 일품이며 홍화명월(紅花明月, 밝게 빛나는 달빛에 피는 아름다운 붉은 꽃처럼 화려한 장관을 이르는 말) 역시 자랑거리니 라듐천의 발전과 더불어 진해는 별장지로서의 위대한 진전을 보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교통에 관해서는 인구 증가, 여행객의 운집, 상공업의 신장(伸張)에 따라 해륙이 같이 설비가 완성되어 갈 것임은 물론, 총독부도 예의 노력해 10년 후에는 확실히 철도를 진해 정차장(진해역)에서 출발시켜 조선을 종관해 나아가 만주 시베리아선에 직결함을 보게 될 것이며 동시에 시모노세키와의 연락도 잘 정비될 것이리라.

해운을 보면 행암만은 수심이 깊어 5, 6천 톤급 선박 수백 척을 여유 있게 받아들일 넓이여서 아무 데나 정박이 가능하니 연안 일대가 대공업지대가 되어가면서 백화를 빨아들이고 뿜어내는 다양하고 많은 화물의 대집산지가 이루어질 것이다.

재등만은 만내가 약간 협소하나 진해 시가지의 대 현관으로서 대상항(大商港)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만내에는 수백 척 범선이 충분히 들어갈 수가 있고, 만구 바깥에는 수백에 이르는 기선을 정박시킬 수 있는 넓이와 수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철도를 새로 뚫고 있어 일대 무역항이 될 것이다.

해륙 연결의 설비를 완성함에 따라 조선의 산업 상 일대변혁을 가져다 줄 것은 남선의 미곡이다.

말할 나위 없이 쌀은 조선농산물 중 제1위에 있는 중요품으로 선인이 일상의 양식으로 소비할 물량은 막대하다 해도 아직 수출입할 물량 역시 제1위에 있다.

남선 땅이 쌀 산출량이 가장 많고, 1910년도 수출입량은 776,000석이며 그 값은 627만 엔에 이른다.

진해를 종관(縱貫) 간선으로 한 철도가 개통만 되면 재등만, 행암만의 발전은 놀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목포, 부산 등 남선 일대의 미곡이 모두가 진해에 집중될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 10년 후에는 그 양과 금액은 오늘날의 곱절이 됨과 더불어 이것들을 수용할 완전한 대창고가 즐비하게 들어설 것이다.

이에 더해 조선 쌀값 표준을 결정지을 미곡거래소도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 않을까.

거기에다 쌀 다음가는 대수출액을 차지하는 콩(大豆)은 명치 43년(1910)에 수출입량이 807,000석, 금액으로 520만 엔이 이르는데 이것도 역시 진해에 모여들어 집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행암만과 면한, 장래 대공업지에는 술, 간장, 양조를 비롯한 방적면포, 우피, 철제 농공기구 및 어유(魚油), 건어, 염장어, 모포 기타 모든 공업을 일으키는 굴뚝이 늘어서 조선의 오사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조선 일대에서 산출되는 광물, 금, 흑연, 구리, 운모 등 외에 가장 많은 금액의 산출량이 있는 철, 즉 자철(磁鐵), 적철(赤鐵), 갈철(褐鐵), 사철(砂鐵) 등이 있는데, 이것들을 진해 한 군데에서 장악해 일대에 제련소가 설치될 것이다.

철로, 교량, 조선 재료에서 충분한 공급을 해야 할 석탄 역시 한국의 대집산지로서 꼭 이곳을 통과해야만 하니 마산은 진해 발전의 덕택으로 10년 후에 번영할 것이 분명하다.

전기철도는 진해와 마산 사이에 하루 수백 회 왕복을 이루며 사람과 마차가 빈번히 왕래하고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설 광경을 방불케 하니 지금부터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상업기관, 창고, 보험, 운송, 인쇄, 회의소 기타 모든 기관이 설치됨과 아울러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금융기관이다.

무릇 사업의 발홍을 원한다면 금리를 낮추고 대부 방법을 간편화해 모든 희망자에게 자유로이 대부하는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

십년 후의 진해의 금융기관, 은행사업이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이라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또한 수산사업에 관해서는 현재 만내 이주어업으로서 마산포, 천엽촌(千葉村, 치바무라), 광도촌(広島村, 히로시마무라), 봉곡촌(峰谷村, 미네타니무라) 네 곳을 꼽을 수가 있는데 이 마을 어민들의 어획고만으로도 약 백만 엔에 도달하는 추세이며 이제는 송진포 어촌에 500채 어민을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실행중이며 그 마을을 중심으로 어업 할 어장은 만(灣)내, 거제도, 가덕도, 통영 동쪽 바다, 욕지도, 남해도, 사량도 근해 등이다.

별도로 봄고등어(春鯖)와 같은 회유성 어족에 종사하는 자는 계절에 따라 더욱 원격지 어장에 출동할 것이다.

숭어, 전어, 정어리, 붕장어, 대구 등의 어획은 10년 후에는 1천만 엔까지 오를 것이다.

이들은 덕산, 행암만 각 시장에 집하되어 신선하고 저렴한 식재로 진해시민 식탁에 제공되는 동시에 철도로 멀리 만주, 시베리아 방면으로 수송하게 되며 냉장얼음 설비에 의해 내지는 물론 청나라 중남부 방면에도 보내지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건어, 염장어의 통조림 사업은 현저한 발전을 보게 되며 진해는 실로 어민의 모범적인 근거지이자 모범적인 어업 집산지로서 남선 제일의 융성을 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말하고 싶은 것은 성냥 사업이다.

진해에서는 매년 4월 3일을 황조(皇祖) 경축일로 정하고 포플러 백만 그루를 심을 계획을 세워 올해부터 처음으로 도로변 양쪽에 심기 시작했던 바, 10년 후에 천만 그루에 이르면 울창한 포플러나무가 집과 도로가에 성장해 여름에는 피서가 되기에 넉넉하고 겨울에는 한기를 막아 주고 또한 방화용으로도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한인 부락에도 심게 된다면 그 값어치는 셀 수 없을 만큼 크지 않을까.

그리고 포플러나무는 성냥용 재료로 가장 적절한 것이라 불도 오래 가고 불을 꺼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불조심으로 아주 이상적이기 때문에 진해에 장대한 성냥 공장을 지어 생산해 중국, 인도 등 아직 성냥 효능을 잘 모르는 가련한 토착인 3억 5천만 명에게 문명의 은혜를 입게 한다면 능히 수천만 엔의 이익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 포플러나무는 성냥 이외로 종이, 인조견, 리본 등을 생산하는데 원료가 된다.

산업상 위대한 공적을 가져다줄 터이니 총독부에서도 현재 식수를 장려하고 있다. 이렇게 총독부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식립정책을 위해 진력하고 있음은 실로 적소에 착목한 것이라 소생은 두 손을 들어 찬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속담에 백년대계는 나무를 심는 데에 있다고 하지만 실로 맞는 말이며 특히 식민정책사에서는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바이다.

조선의 10분의 7이나 5는 관유산림(·공유림 즉 국가 소유의 산림과 지방자치단체 및 공공단체 소유의 산림을 통칭)에 속하며 총면적은 1400만 정보(町步, 한 정보는 3천 평)에 이른다.

즉 일본의 국유림 400만 정보보다 1천만 정보가 더 많다.

이 광대한 면적에 나무를 심어 10년 지나면 그 모든 땅은 울창한 산림으로 변함과 더불어 저절로 치수 역할도 하게 되어 재목을 산출해 가구를 만들기에 충분한 한편 미관 면에서도 한국 전토를 장식해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독일의 오늘날 위대한 산업 발달을 보고 국부가 여러 선진국을 능가할 만큼 도달한 이유를 헤아려 보기를 바란다.

실로 식립정책에 전력을 다한 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식림사업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인의 온돌 생활 폐지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온돌 사용으로 인해 현재 부족하게 되어 가는 수목을 헛되이 낭비한다는 것은 한국 산림을 민둥산으로 만들고 고사하게 하는 어리석은 짓이며 그것을 대신할 석탄 공급의 필요성을 알아야 한다.

즉 진해에서 일대 저탄장을 꼭 설치함이 급선무인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일하지 않음을 명예로 여기는 한인의 일대 병폐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온돌 생활 폐지와 함께 그들이 현재 입는 백의를 폐지하고 옷을 다 빨간 옷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옷이 더러워질까 걱정한다면 도저히 노동을 하고 생산에 종사할 수 없다.

사람들을 식림사업에 따르게 함은 한국을 개발한다는 근본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총독부에서 진해 경역 내 철무더기 산에다 포플러를 식립하고 있음은 선인들에 대해 최대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여태껏 소생이 진술한 바와 같이 진해는 실로 상공업의 대도회지가 되겠지만 한편에서는 교육의 도회지로서도 10년 후의 발달은 위대한 것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해군에서 학교조합에 부여한 산림지는 133만 8천 평, 시가지가 3만 평이며 이것들은 학교의 기본재산이 되어 시가지만을 견적해도 평당 백 엔으로 치고 3천만 엔, 연리(年利) 5%란 지대가 들어온다고 치면 150만 엔인데, 이 정도 있으면 위로는 대학부터 아래는 소학교까지 어떤 학교라도 건설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제국대학(1886년에 공포된 일본의 제국대학령에 의하여 설립된 대학을 말함) 1년 비용이 16만 엔이라고 하니, 대학은 물론 상업, 공업, 농업, 수산업, 광업, 산림업, 기타 모든 전문학교를 출현시키기에도 충분하다.

이렇게 진해시가지 경영이란 큰 정책은 해군당국이 교묘한 계획을 세우고 사람의 욕심을 이용해 한 푼도 받지 않고 토지를 부여하니 여기에는 모범적인 식민정책을 보이려는 것이다.

10년 후에 그 모습이 일신되어 상공업이 번성하고, 교육 사업이 활기찬 또한 동양 무쌍의 대군항으로서, 굴지의 대상항(大商港)으로서 남선의 중진이 된다면 일본인의 위대한 식민력을 세계 각국에 알리게 함과 더불어 종래 일본인이 식민지 경영에 적합하지 않다는 일부 논자의 기우도 타파해 오로지 그 성공이 하는 방식 나름이란 점을 충분히 입증해 만주, 중국의 식민사업도 그런 모범에 따라 해낸다면 훌륭한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살아 있는 모범으로 제시해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총독정치는 아주 열심히 시행하여 선인 누구나가 천황폐하의 권위를 느끼며 태평을 구가해 계속 열심히 농상공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더욱 더 조선 개발이란 임무에 매진함과 함께 총독정치의 취지에 따라 모든 점에서 노력분투를 하게 된다면 10년 후의 조선은 참으로 격세지감을 보일 세상이 될 것이며 그것은 진해에만 한정될 일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