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기적(奇蹟)
패잔(敗殘)의 흔적
지금 신시가지 북동쪽에 애당초 신현동(新縣洞)이라고 불리던 한인 부락이 있었다.
거기는 50채 쯤 되는 부락이며 군항공사 착수 시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며 당지에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이 한 때 임시 거주로 삼아 한인 사이에 끼어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를 상대로 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넓지도 않은 부락에도 요릿집, 음식점, 일용잡화상, 떡집, 과자집 등 두루 가게가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신현동이라 하면 훌륭한 시가지 같은 느낌을 갖게 한 곳이다.
그 곳은 여러모로 편리하기는 했는데 부근 11개 한인마을을 현재 경화동에 옮기게 되니 우선 신현동에 살고 있는 자에게 퇴거 명령이 떨어졌다.
이렇게 한인 가옥이 퇴거하게 될 운명에 처했다.
본래 돌이나 흙이 가옥의 기초나 태반을 차지하는 한인 가옥이니 아무리 아깝다 해도 경화동까지 가져갈 수도 없고 도리어 경화동에 새로 만드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가벼운 물건만 챙겨 갔다.
그 후 남아 있는 것이 현재 보는 가옥 기초이며 마치 토장(土藏, 벽을 흙으로 만든 창고)이 붕괴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로마 유적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무량의 감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듯이 진해군항 창설 당시를 아는 소생으로서는 신현동의 쓸쓸한 유적을 보고 감개무량을 느낄 수밖에 없다.
패잔의 흔적이라 한 것은 그 형태 그 자체를 말한 것이며 실제로는 성공의 흔적인지 모른다.
그러나 신시가가 발전한 오늘의 패잔 흔적과 비교해 본다면 혹 기적(奇蹟)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47. 폐물 이용
진해는 처음부터 설명했듯이 반농반어(半農半漁)로 한인들만이 살고 있었던 곳이며 외진 곳이었음이 자명하다.
그들 한인들도 가만히 과거를 돌이켜보면 세상의 변천을 오히려 기이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오늘과 같이 번성해지고서 문명적인 지식이 모자랐던 그들도 암암리에 유도되어 더욱 더 그 모습을 고치고 문명화한 것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인 사이에 폐물 이용이란 것을 개발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폐물 이용이라면 범위는 아주 넓은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부근에 사는 한인 중 어떤 자들이 시중에 버려진 짚이나 돗자리 쓰레기를 주어모아 이것을 집에 가져가 잘게 잘라 도배용 재료를 만들어서, 한 가마 당 얼마로 도배공이나 도배 재료상에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제조의 양도 무시 못 한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나 보다 많은 사례가 꼭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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