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선인(鮮人) 노동자
때에 따라 변동이 있겠으나 선인(조선인,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나라 사람을 낮추어 부르던 말) 노동자 수는 꽤 많아 마천(馬川, 우마가와, 현 창원시 진해구 웅동 1동(행정동) 중 5개 법정동 중 하나인 마천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제가 군항 공사를 시작하면서 웅동수원지 공사(1908년부터)를 시작하게 됨)의 수원지공사, 신시가지 부근에서 돈벌이 하는 자를 모두 합치면 능히 2천 명 이상이라 생각한다.
아침, 저녁으로 경화동 방면을 출입하는 노동자도 쉽게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진해군항이 완성되고 나서 근처의 선인(鮮人)들은 다른 지방의 선인보다 그 생활이 나아질 것으로 사료된다.
내지인이 선인에게 지불하는 나날의 노임은 실로 막대한 금액에 도달할 것이다.
하여튼 진해군항 부근의 선인들은 가장 좋은 시대를 만나고 있다.
이참에 전력을 다해 돈을 많이 벌어 축재(畜財)를 이룩하고 자기 집 백년대계를 정하지 못하면 끝끝내 팔자 펴질 날은 없을 것이다.
49. 매춘부
진해 땅에 맨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우선 노동자가 되겠는데 거의 동시에 들어 온 매춘부도 있다.
그 중에는 노동자보다 먼저 와 사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태반이 공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주해 와 선인 부락에 들어와 자리 잡고 살았다.
그리고 노동자나 선인을 상대로 천업(賤業, 천하다고 여겨지는 직업이나 영업)을 영위해 상당히 번창했다.
그때의 화대(花代)란 하룻밤에 2엔 쯤을 통상으로 하고 있었다고 듣는다.
그러나 요즘이라면 몰라도 그 당시 더러운 조선인의 온돌에 붙잡혀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니 비싸다, 싸다 값 매김을 할 것 같으면 얼마나 저렴했는지는 말도 안 될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꽤나 많이 벌었던 이유는 그 외에 괜찮은 청루(靑樓, 창기를 두고 손님을 맞아 영업하는 집)가 없었기 때문이며, 온돌방에서 달 사이에 밝아오는 새벽을 보는 것도 각별한 것이라 애기하는 이도 있곤 한다.
그것이 점차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훌륭한 시가지가 생기다보니 매춘부들의 소굴이었던 선인 부락도 퇴거령이 내려져 그 흔적을 일절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 거짓말처럼 되었지만 갑호관사 왼쪽의 선인부락은 신현동이라 불리고 많은 매춘부들의 소굴로 되어 있던 곳이다.
이들 매춘부가 각 신개지 당초에 선구적으로 들어온 사례는 오로지 진해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곳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본다.
본래 우리나라의 대외 발전은 매춘부들과 함께 진행될 경우가 많다고 논한 이도 있는데, 결코 근거 없는 의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양(南洋, 일본의 남방에 해당하는 열대 해양과 섬들의 총칭)의 고도(孤島)에서 교통이 두절된 데에서도 나가사키현(長崎県) 출신 부인이 살며 그 천업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사례도 있다.
우리 진해도 애당초 매춘부가 선구적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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