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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과 진해만』(1911) 제1장 「마산」 - 1. 해제

by 운무허정도 2025. 12. 15.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 - 제1장 「마산」 -  1. 해제

히라이 아야오(平井斌夫), 구누기 마사지(九貫政二) 공저(共著) / 조선 마산 하마다신문점(濱田新聞店) 명치 44년(1911) 12월 5일 발행

 

해제  

이 책은 일한병탄 일 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발간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일본인이 느끼는 시대적 분위기가 저자의 자서(自序)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저자는 ‘계림팔도(鷄林八道)가 왕화(王化)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 되었다며 감개무량이라고 한다. 러일전쟁 당시 결정적 역할을 한 곳이 마산과 진해만이었다며 그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을 소개하게 되어 ‘통쾌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고 감격한다.

그리고는 ‘대세를 타고 신천지에서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국가의 진운(進運)에 이바지하고자 함’은 진정 기쁜 임무가 아니고 무엇이냐며 식민지 경영에 대한 자부심과 포부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식민 도시로 ‘발전’해 가는 마산과 진해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총설에서는 먼저 역사를 간단히 정리한 후에 마산 거류 일본인의 호구를 집계하고 있다.

개항되던 1899년에 103명에 불과하던 일본인 인구가 1910년에는 5,941명으로 급증하였는데 이들을 출신 지역별, 직업별로 상세히 분류하고 있어 당시 마산 거주 일본인들의 전반적 상태를 알 수 있다. 출신자가 많은 현의 순서로 보면 야마구치 805명, 히로시마 623명, 나가사키 485명, 에히메 440명, 사가 340명, 오카야마 315명, 후쿠오카 299명 등으로 집계되고 있다. 가장 적은 현은 2명의 오키나와이다.

직업별 분류는 169개 종류로 구분하여 상당히 세밀하다. 이중 종사자 수 50명 이상을 보면, 상점종업원 279명, 목수직 103명, 관리 69명, 석공직 65명, 예기 61명, 잡화상 56명, 목재가공직 54명, 과자소매 53명 등으로 나타나고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관아공서에서 부청 구재판소 경찰서 헌병분대 감옥분감 세관지서 우편국 마산역 구마산역 요새사령부 및 중포병대대 거류민단역소 상업회의소 각국거류지회 소방조 등 각 관아공서의 내력과 임원 등을 소개하고 있다.

농업에서는 먼저 동양척식 출장소와 개인 지주 등의 주요 농업 경영자의 상황에 대해 서술하고 이어 소작 상황 및 땅값, 농산물 수확고 및 수이출액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어 과수 재배 및 임업, 목축업의 전망도 간단히 하고 있다.

상업은 이 책의 중심적 내용으로 먼저 전반 상황을 개설한 뒤에 주요한 수입품과 수출품을 들고 있다.

주요 수이입품으로는 일본제 면포, 면직사, 장작, 석탄, 목탄, 목재판, 도자기, 시멘트, 설탕 등이며 주요 수이출품으로는 쌀, 콩, 잡곡, 비료, 건어 등으로 당시 마산 전체의 무역 상황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마산항 개항 이후의 수출입품 금액표, 1910년도 중요품목 수출입액, 1910년도 연안무역 특별 수출입품 금액, 1911년도 수출입 및 이출입 중요품목 및 금액표 등의 상세한 통계 수치를 집계하고 있어 당시의 무역 규모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어 조선인이 주로 이용하는 구마산항의 이출입화물 추이표와 1년간 1만 엔 이상인 이출입 품목명과 그 금액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구마산항의 주요 이입품은 옥양목, 방적사, 명태, 목면, 석유, 마포, 표백옥양목, 새턴(공단), 기모노옷감, 궐련, 성냥, 설탕 등이다. 또 이출품은 벼, 현미, 기타곡류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영업 직종별로 현황을 정리하고 있다.

먼저 곡류 수출업 및 백미상 현황을 정리하고 곡류 가격도 조사해 정리해 놓고 있다.

금융업에서는 조선은행 마산출장소, 경상농공은행 마산출장소, 마산금융주식회사, 마산지방금융조합, 사채업자, 전당포업자 등의 예금 및 대출, 환취급액 통계를 집계하여 제시하고 있다.

보험업과 전등업의 상황을 정리한데 이어 해륙운수업에서는 4개 해운 회사의 영업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이어 잡화상, 식료품상, 청과시장, 대가업, 오복상, 여관업 및 요리점, 선박도매상 및 재목상, 석유상, 이발업, 약업, 음식점, 인력거 및 승합마차업, 연초업, 과자제조업, 신발가게 및 가정잡화상, 신문판매업, 종이류 및 인쇄업, 시계상, 사진업, 철물가게, 부동산 중개업, 해군용달업, 황물상, 도기상 등 직종별 현황과 명단 등을 제시하고 있다.

공업에서는 먼저 당시 마산의 주요한 업종이었던 양조업을 현황을 정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주류양조업자는 모두 14명이고 총양조량은 청주 약 3천 석, 소주 약 100석, 미림 약 30석, 식초 약 100석 등이다. 양조업은 이후에도 계속 성장하여 마산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자리 잡는다. 이어 정미업, 토목건축청부업, 제재업, 미장업, 목공업, 비누제조업, 마쓰모토철공소 등을 다루고 있다.

다음으로 수산업에서는 어족이 풍부한 마산의 주된 어획물로 대구, 청어, 고등어, 갈치, 숭어, 도미, 해삼, 문어, 굴 등을 들고 있다.

이어 마산수산주식회사, 마산수산회사생선중매조합, 조선해수산조합 마산지부 등의 현황과 어획고 등을 집계하고 있다. 다음은 교통으로 도로, 철도, 해운 등의 교통망과 운임, 승객, 화물 등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이어 보통우편, 우편저금, 전보, 전화 등의 통신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다음으로 위생, 교육, 종교 현황 등을 정리하고 있다.

제2장 진해만 부분은 군항과 현동 신시가지 건설과 관련한 내용이다. 현동(縣洞)은 고려 시대 완포현(莞浦縣)이 있던 곳인데 일제에 의해 군항으로 편입되면서 급격한 변모를 하게 된다. 1904년 러일전쟁 전후부터 진해만 일대에 군항 건설을 추진했던 일제는 1906년 군항 고시, 1907년 진해만 시설조사, 1909년 측량과 한국인 마을 철거 시작 등을 거쳐 1910년 4월 임시해군 건축부 지부를 설치하고 6월에는 시가 예정지 측량과 도로 및 하수도 공사에 착수함으로써 군항과 신시가지 조성을 본격화했다. 1911년 1월 진해만 군항을 일본 해군 제5 해군구의 군항으로 정하고 군항 보호를 명분으로 마산포 개항장을 폐지하였고 1912년 4월에는 청사와 부두 시설이 일부 완성되자 거제도 송진포에 있던 해군 방비대를 이전하였다. 이처럼 군항 건설이 진행되던 당시 군항지 개관, 현동의 발전, 해군 용지의 임대 또는 시가지의 경영, 건축 토목 공사 등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이어 군항의 관문인 비봉리 일대의 2대 통조림 회사와 목축업, 행암만과 덕산리의 상황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마산과 진해만은 3년 전인 1908년에 나온 마산번창기(馬山繁昌記)와 비교해 보면 항목과 분량이 증가하였다.

역사 서술 등의 분량은 줄어든 대신 상업, 공업, 수산업 등 경제에 중심을 두었다. 또한 항목별로 각종의 상세한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품목별 수출입액 등 각종 무역통계, 주요품목의 물가, 업종별 임금, 각종의 물가 곡류 가격 및 땅값, 대출 이자, 시장의 거래액, 각 업종 종사자의 명단 등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자료수집과 현장조사에 관계기관의 협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에 실제 활용될 수 있는 안내서로서 기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행자로 되어 있는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는 신마산 혼마치에서 맥주상, 철물 잡화상 등을 경영하고 마산상업회의소 의원을 했던 마산의 개항기 인물이다. 1908년 발간된 스와 부코츠(諏方武骨)의 마산번창기(馬山繁昌記)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나카마치(仲町)의 빈전신문점에서는 전국의 여러 신문을 판매하였다.

앞부분에 마산부청을 비롯한 공공기관과 기관장의 사진이 실려 있어 공식적 발간물의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책자 속에 각급 회사, 요리점, 점포, 여관 등의 광고와 소개문을 게재하고 있다. 이같이 책의 앞뒤에 광고면을 배치하여 상업적 선전과 소개를 겸하는 것은 이 시기에 발간된 안내서들의 공통적 특징이다.

저자 히라이 아야오(平井斌夫)는 도쿄 출신으로 1904년 7월, 동경제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법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09년 한국으로 와서 1911년에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을 구누기 마사지(九貫政二)와 공저로 간행하였다. 그가 어떤 경위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는지와 공저자 구누기와의 관계 등은 알려진 게 없다.

그는 다음 해인 1912년 10월에 두 권의 출판물을 거의 동시에 간행하게 된다. 먼저 한일강제병합 직후의 각종 법규를 모아 간단한 주해를 붙인 간이주해조선현행법규편람(簡易註解朝鮮現行法規便覽)으로 조선인 이용자를 위해서 당시 경무청에서 퇴직한 전직 경찰 방태영(方台榮)이 번역하였다.

또 한 권은 랴오둥반도의 항구 도시 다롄(大連)의 만선실업사(滿鮮實業社)에서 발행한 ‘최근의 인천[最近の仁川]’이란 책자이다. 이 책은 인천의 전반적 현황과 인천항 개항 30년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특히 인천의 경제적 상황, 각 산업과 무역의 현황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이 시기 히라이는 메구로 고타로(目黑幸太郞) 경영의 만선실업사에서 내던 순간지(旬刊紙) ‘만선실업계(滿鮮實業界)’의 주필(主筆)로 있었다. 만선실업계는 만주 각지의 실업계 소식을 보도하고 비평하던 경제지였다.

히라이는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1914년 설립된 동경의 농업 관련 회사인 내산상회본점(內山商會本店) 이사, 1916년 설립된 동경해운업조합의 서기장을 역임하는 등 주로 실업인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저자인 구누기 마사지(九貫政二)는 ‘마산과 진해만’ 발간 당시 ‘만한지실업(滿韓之實業)’이라는 월간 잡지의 기자였다. 만한지실업은 우치다 다케사부로(内田竹三郎)가 회장으로 있던 만한실업협회(滿韓實業協會)가 발행하던 기관지이기도 했다. 만한지실업의 전신은 한국실업협회(韓國實業協會)가 1904년 2월, 부산에서 발간한 조선평론(朝鮮評論)이란 일본어 잡지였다.

조선평론은 제2호 발간으로 그치고 1905년부터는 단체명을 조선실업협회(朝鮮實業協會)로 바꾸고 잡지명도 조선지실업(朝鮮之實業)으로 개제하였다. 1908년부터는 활동 범위를 만주로 확대하기 위해 만한실업협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기관지 역시 만한지실업으로 바꾸었다. 만한실업협회는 부산을 거점으로 하였으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경성으로 본부를 옮겼다.

만한실업협회의 목적은, “만주의 부원을 개발하여 모국과 각종 사업의 연락을 원만히 함으로써 각 거주지의 발전과 함께 개인의 실업을 ‘진흥’시키는 것”에 있으며, 회원은 일반 실업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실업가와 조선에 관심을 가진 일본 내지의 실업가들이 조선을 개발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는 단체였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인 회원도 늘어났다. 주요 활동은 기관지 만한지실업의 발행과 조선흥신소(朝鮮興信所)이다. 만한지실업은 산업 기사가 중심인 경제지이면서도 종합지를 지향하였다. 만한지실업은 1908년 당시 배포 부수는 5만 부가 넘고 배포지역도 조선, 일본, 대만, 중국 등지로 하여 당시 한반도 최대의 일본어 잡지였다. 조선흥신소는 조선에서 사업을 하려는 일본인의 의뢰에 따라 조선 각지의 생활 상황과 상황(商況), 회사의 재산과 신용 정도를 조사하거나 농지 매매를 중개하는 것이었다.

구누기는 만한실업협회에서 나온 이후, 함흥에서 주식회사 함흥극장 이사, 식료품상인 아사히상회(旭商會) 및 연탄 제조판매 합자회사인 아사히석탄상회(旭石炭商會) 등을 운영하였고 함남도평의회원, 함흥부회의원을 지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박영주                                                                                                                     

일제강점기 마산지역 정명(町名)과 현 동명(洞名)의 대조

구마산(원마산) 신마산
정명(町名) 현 동명(洞名) 정명(町名) 현 동명(洞名)
요로즈마치(萬町) 동성동(東城洞) 오기마치(扇町) 반월동(半月洞)
다와라마치(俵町) 중성동(中城洞) 혼마치(本町) 월남동(月南洞)
이시마치(石町) 창동(倉洞) 교마치(京町) 두월동(斗月洞)
사이와이마치(幸町) 서성동(西城洞) 하마마치(濱町) 창포동(昌浦洞)
모토마치(元町) 남성동(南城洞) 아케보노마치(曙町) 청계동(淸溪洞)
도미마치(富町) 부림동(富林洞) 미도리마치(綠町) 유록동(柳綠洞)
신마치(新町) 추산동(騶山洞)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弘文洞)
고토부키마치(壽町) 수성동(壽城洞) 야나기마치(柳町) 신창동(新昌洞)
    아사히마치(旭町) 평화동(平和洞)
중앙마산 사쿠라마치(櫻町) 문화동(文化洞)
정명(町名) 현 동명(洞名) 다카마치(高町) 대창동(大昌洞)
유타카마치(豊町) 신포동(新浦洞) 유미마치(弓町) 대성동(大成洞)
도오리마치(通町) 장군동(將軍洞) 나카마치(仲町) 신흥동(新興洞)
미야코마치(都町) 중앙동(中央洞) 미나토마치(港町, 湊町) 월포동(月浦洞)
    하나부사마치(英町) 화영동(花英洞)
    다이마치(臺町) 대내동(臺內洞)
    도모에마치(巴町) 대외동(臺外洞)
    니시키마치(錦町) 해운동(海雲洞)

 

                                                                               

글은 2024년 창원시정연구원이 근대초기 마산에 대한 세 권의 책과 한 개의 자료를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5권 『개항 및 일제강점기 마산 기록』 중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의 마산 부분이다. 1911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히라이 아야오(平井斌夫), 구누기 마사지(九貫政二)  두 사람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