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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진해요람』(1926) - 20. 사적(史跡)-마지막

by 운무허정도 2025. 12. 8.

20. 사적(史跡)

진해만이 군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

지나간 옛날부터 수군 근거지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1920년대 진해시가지

 

이러한 천연의 형승은 세계에서 찾기 힘들다. 바로 지도를 열어 보면 서쪽이나 동쪽으로 나가면 거제, 가덕, 한산 여러 섬들이 전면에 놓여있어 자연의 보루가 되며, 서북으로는 통영 반도에 이어져 있고 동서쪽은 멀리 부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자리에서 고사기(초기에 씌어진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 712년 편찬), 일본서기(日本 奈良시대의 역사서. 30, 720년 편찬)에 보이는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진구황후(神功皇后)에 의한 삼한정벌(三韓征伐, 고대 일본 진구황후가 신라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로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동시대의 삼국지나 삼국사기와 같은 다른 사서에는 없는 기록이다. 여러 근거로 인해 한반도 진출설의 근거로서 '삼한정벌'설화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4세기 후반 이후 왜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입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자리 잡고 있다. 참고-위키피디아)부터 소위 원일전쟁(元寇の役), 임진왜란(文祿の役) 등등 그것을 센다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러일전쟁이라는 큰 전쟁은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진구황후(神功皇后)가 그 휘하 대장들인 다케노우 치노스크네(武內宿禰), 나카토미노 이카츠노무라지(中臣烏賊津連)(후지와라 씨의 선조), 오오미와노 오오토모누시(大三輪大友主, 시마네의 오오쿠니 누시노미코토의 후예), 모노노베노 이쿠히노무라지(物部염日速), 오오토모 노타케모츠노무라지(大伴武以連)가 츠시마의 와니포(鰐浦)에서 일직선으로 영일만에 진군을 했다. 오오하타누시노미코토(大幡主命)는 별동부대가 되어 와니포에서 웅포(웅천)에 상륙하여 굴자군(屈自郡, 현재 창원), 구시우라(久斯宇羅, 현재 마산), 고자군(古自郡) 즉 임나의 소가라국인 현재의 고성을 거치고 계속 진군해 아라국(지금의 함안의 일본부 소재지)을 평정하였다.

나아가 북진해서 남가라(현재의 창녕)를 항복시킨 후 다라국(합천), 대가라국(현재 영산), 성산가라국(성주) 여러 곳을 함락시키다가 더 나아가 탁순국(卓淳國, 현재 대구)에 들어가 동진해서 다루키의 나라(祿國, 현재 영천)에 침입해 신라 왕성(王城)인 월성(月城, 지금 경주) 배면(背面)에 임박해 왕성을 위압했다.

그 때문에 신라 병졸들은 이를 방어하려고 출군중이라 왕도는 빈 상태가 되어 있어서 깃발을 날려 영일만에서 쳐들어갔더니, 신라왕은 아무 저항 없이 항복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임나왕국 즉 육가야제국의 군대가 다른 방면에서도 책전응투(策戰應闘, 전략적인 싸움으로 전투에 임하는 것을 말함)한 결과 신라는 오랫동안 임나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상륙 지점은 진해만 안의 웅천이었던 것이다.

마산포는 고려왕조 때는 합포라 칭하여 일본과의 교통 상 유일한 기점이 되기도 하며, 원나라가 일본에 보낸 함대의 출발점은 지금의 구마산에서 였던 것이다.

구마산에는 그 당시 판 오래된 우물이 남아 있으며 고안년(弘安年, 1281)에 있었던 일이다.

또한 진해만 내를 근거지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히데요시(秀吉)가 일으킨 임진왜란 때, 만(灣) 내의 영등포, 장목포 등은 양국 수군의 쟁탈점이 되기도 했다.

당시 우리 육군의 제4진이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및 그 아들 가츠시게(勝茂)는 구마산 북쪽 수백 미터 거리에 축성을 한 것이 바로 창원성이며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 있다.

명장 이순신은 수군통제영이란 것을 통영에 두고 거북선을 만들어 만내에 띄우게 하며 제해권을 장악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우리 해군은 고성군 견내량수도(見乃梁水道) 해전에서 적의 술책에 넘어 유감스럽게도 무참한 패배를 보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때도 진해만을 근거지로 삼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이만 적기로 한다.

 

권말

대정 15년(1926) 10월 7일 진해요항부 검열 필

대정 15년(1926) 10월 5일 인쇄

대정 15년(1926) 11월 11일 발행

 

불허복제 책 정가 50전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면 송엽정, 마츠바쵸) 13번지

저작인 겸 발행인 오카 만키치(岡萬吉)

                                동상(同上)

발행소   등룡각(騰龍閣)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면 파정(巴町, 도모에쵸) 2번지

인쇄인   도이 기쿠오

               동상(同)

인쇄소   도이그라비아인쇄부(土井グラピア印刷部)

판매소   진해 주길정(住吉町, 스미요시쵸)

               진해 파정(巴町, 도모에쵸)

               마츠오 하쿠신도(松尾博信堂)

               도이종이점(土井紙店) 끝<<<

 

<진해요람>  해제 - 이애옥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과 경영은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창원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일문 문헌자료를 번역하는 작업은 이 지역의 식민지화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 과제일 것이다. 창원의 근대사 연구에 선결해야 할 작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산과 진해지역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이른 시기에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력하게 받은 일본제국의 식민도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식민도시 건설 당시 일본인의 시각에 의해 기록된 문헌자료의 검색과 정리는 지역의 근대사 연구에 있어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임은 자명하다."

                                                                                                                                                                   -마산번창기 해제 中 -

<진해요람>

<진해요람>은 189쪽 분량으로 1926년 등룡각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저자는 표지에는 오카 모쿠도(岡黙堂), 책의 발행사항에는 오카 만키치(岡万吉)로 되어 있다. 저자의 필명과 본명으로 인터넷 조사를 해 보았지만 검색되지 않아 개인정보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의 소장 자료에는 본명 오카 요이치(岡庸一)이며 필명 오카 만키치라고 소개되어 있다.

책 시작 부분에 당시 요항부 사령장관 등 일본제국 군인과 유공자, 진창선 철도 공사 사진 등이 실려 있다. 그 다음은 진해를 노래한 하이쿠(俳句)와 한시(漢詩), 전반부 광고,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는 연혁, 위치 및 지세, 기온, 시가지 및 항만, 교통, 통신, 산업, 상업, 공업, 무역, 금융, 신사와 절, 위생, 교육, 관공서(관공청) 및 기관장(요항부. 요새사령부 헌병분대 • 경찰서 · 우체국 · 세관·면사무소), 현인회와 회원 명단. 사적(史跡), 후반부 광고로 되어 있다. 광고는 전반 32쪽과 후반 25쪽 모두 57쪽 분량으로 책 전체의 33%를 차지한다.

<진해요람>과 이 책의 소책자 '부속명소안내'는 저자가 자서에서 말했듯이 진창선(鎭昌, 진해↔창원)철도 개통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속명소안내>의 소책자 발간은 진해에 일본인 관광객이나 추가 정착민을 유치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본문에는 앞서 간행된 <진해>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도 있으나, 진해의 연혁에서 시작하는 1926년 당시 진해의 상공업, 금융, 교통, 교육, 관공서 조직 등이 서술되어 있어 진해와 마찬가지로 진해에 대한 1급의 중요한 1차적 자료(원자료)임에는 변함이 없다.

1926년 발행의 <진해요람>과 14년 전에 먼저 발행된 1912년 발행의 <진해> 두 책을 비교 검토하면 1912년 당시 일본인의 진해발전에 대한 기대가 버블 현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해>(1912)의 번역 해제에서 말한 하시타니 히로시(橋谷弘)의 논문을 보면, 진해의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지 않고, 상공업은 수공업이나 서비스업이 대부분을 차지해 일본제국 해군에 의존하는 범위밖에 발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정착민 중에는 1929년 세계 대공황 이전인 이 시기에 일자리를 잃고 곤궁에 빠져 포장마차 등을 하며 생활하는 일본인이 나오기 시작했고, 진해를 떠나는 일본인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한 문헌>

이애옥 옮김, 진해의 벚꽃(竹國友康 日韓歴史の旅-鎭海の櫻)

하시야 히로시, 요항부 도시·식민지 도시로서의 진해(橋谷弘 要港部都市·植民地都市としての鎮海、「軍港都市史研究 Ⅵ 要港部編」 清文堂)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 근대 문헌 속 진해  진해요람 부분이다. 1926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오카 만키치(岡萬吉)이다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