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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5. 10:46

'삼광청주' 못다한 이야기들

 ● 지금 사라지고 있는 장군동 '삼강청주' 주조장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와 그림들을 정리하면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 이 사진은 1930년대 '천도원주조장'(삼강청주 전신)의 풍경이다.
- 지금의 사진(아래 전경사진)과 비교해 보면 '사택'이 있던 곳은 술통을 놓아두었던 마당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탐방시 마당에 방치된 술통(직경 1.8미터에 높이 2미터)의 크기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술통들이 마당에 널려져 있다. 우리가 보았던 술통은 철제로 되어있었던 것과 달리, 당시에는 나무 판재를 세로로 겹쳐서 수평밴드로 감싼 목제형태의 술통이 사용되었던것 같다.
- 당시의 흔적을 네모난 굴뚝이 말해주고 있으며, 이 건물의 형태는 아래 전경사진에서 보면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금처럼 주변에 있는 주택들은 3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50년대 삼강청주 주조장의 모습이다.) (철거 전의 공장 전경 : 이 공장이 30년대 사진에 나타난 그 모습그대로이다.)
(50년대 아래에 위치한 신흥동 '삼강청주' 주조장의 모습이다.) (철거 전 삼강청주 주조장 모습이다.)


(사진: 도민일보 김구연기자)

● 사진 좌측의 네모난 굴뚝이 있는 공장이 1909년에 설립된 천도원(삼광청주 공장의 전신) 청주 주조장이었으며, 우측의 원형굴뚝이 있는 공장이 1911년 설림된 이데(井手주조장 : 칠성주조장으로 변경후 삼강청주로 바뀌었음)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 두공장의 기원이 되는 대지의 조성과정과 소유주의 변천과정을 통해 공장의 생성사를 파악하기 위하여 토지대장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조사해 보았다.
지번의 분화 및 소유주의 변경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장군동 공장 : 장군동 13번지는 1912년 토지사정지적도의 작성에 의해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필지의 원본이 마련되었다. 사정 당시에는 13-1번지 한 필지였으며, 면적은 537평이었다. 1912년 국가소유로 되어있다고, 이후 1941년 상송태(常松泰)의 소유로 1942년에 원등군동(遠藤軍同)의 소유로 변경되었다고, 해방이후 1952년 손삼권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필지의 변경은 사정지적도 이후 1978년 13-1번지와 13-4번지로 분할되었으며 분할된 13-4번지는 손삼권씨와 그의 아들 손정필씨의 명의로 변경되었다.
- 삼광청주 주조장은 13-4번지에 박공형태의 장방형 건물(폭 8미터에 길이 33미터) 후면에 1층과 2층 규모의 숙소와 공장이 혼재하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으며, 굴뚝은 후면 건물 중간쯤에 솟아있다.
- 지붕은 시멘트기와로 되어있으며, 목조 트러스 구조로 되어있으며 외벽은 조적조로 박공부분의 다락층 형태는 주조장의 기능상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아마 후대에 용도가 변경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 후면에 있는 건물은 부분적으로 1층이 굴뚝이 있는 2층 부분으로 되어있으며, 단층부분은 스래브 구조의 형태로 보아서 후대에 증축된 부분으로 판단되며, 2층 부분은 당시에 공장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어졌을 것으로 판단되며 슬레이트 지붕마감은 이후에 재료변경된 것으로 판단된다.
- 장군동 공장의 건축개요 : 각지에 있는 2층 양옥식 건물은 공장의 관사로 사용되었을 것을 보이며, 서측 도로면에 면한 건물은 박공면을 가진 장방형의 건물로 동일한 주거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사(철도 관사?)의 형태로 보아지며 이것은 규모로 보아 초기에 주조장의 관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철도관련 관사로 판단된다.
- 현재 건물의 구조는 공장동과 주거동 사이가 중정을 겸한 통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중앙부에 양조에 관련된 철제 탱크(직경 1.8미터에 높이 2미처 정도)는 하단에 목제 후레임에 의해 수직면에 부착되는 방열면의 기능을 가지는 기능과 세로바를 잡아주는 철제 밴드가 현재 4개 남아있으며, 뚜껑은 판재로 현재 원형을 유지한채 남아있다.
- 인접지의 13번지는 현재 12번지의 공장과 혼재된 상태로 되어있어서 그 관련성을 찾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러나 필지상의 소유자와 필지의 분할과정을 통해서 상관관계를 밝혀줄 뭔가가 나올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토지사정대장상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 13번지는 토지대장 사정시 1필지였으나,
- 12-9번지는 1945년 2월 16일 12-8번지에서 분할되었으며, 마산부 소유에서 1955년 복정증차랑(福井增次郞)에게 소유권 이전, 이후 1972년에 손정웅에서 소유권 이전하였으며, 복정은 인접지 중앙동의 후꾸이 장유의 대표이기도 하였다.
-12-10번지 1945년 궁본원삼(宮本원三)에게 소유권이 이전, 1962년 金味黙, 김영기에서 이전, 이후 1970년 이상대에게 이전, 1971년 金貞黙에게 이전되었다.
- 12-11번지는 마산부에서 1945년 平田和大에게 이전, 1956년 이희선에게, 1956년 손삼권에게 이전되었다.
- 12-13번지는 12-8번지에서 분할되어 1946년 國本彸助, 김학무에게 이전, 1961년 박재학에게 이전되었다.
- 12-14번지는 12-9번지에서 분할되어 1954년 福井增次郞, 손정웅에게 이전되었다.
- 12-15번지는 12-10번지에서 분할되어 1971년 김영기, 황수찬에게, 1972년 윤경순에게 이전되었다.

* 건물은 사라지더라도 이러한 기록은 남게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의 보존가치를 무시하고 철거해버린 사람들의 기록도 남게될 것이다.
'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나는 도시'가 아니라
'사고와 진리가 부족했던 도시'였었다고----

 

 

Trackback 0 Comment 1
  1. 옥가실 2011.10.05 13:20 address edit & del reply

    와... 사진과 기록물 잘 보았습니다.
    매우 어려운 자료를 구했군요.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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