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by 허정도 2014. 2. 24.

<토지 이용>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 이용

1)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각종 문헌에서 마산의 도시 현황을 소개하는 글귀의 일편을 종합하는 방법으로서 추상적인 분석이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은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하여 인용하도록 합니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市街(p.311)

각국거류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가 일본인이고 가끔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류지 남쪽 모퉁이 쪽의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살고 있다. 거류지의 총 호수는 50호에 불과하고 가옥도 조밀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서 간신히 처마를 이어서 시가의 모양을 갖춘 것이 10여 호 뿐이다. 참으로 느리긴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도로는 근래 새롭게 개설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폭은 3間(1間은 1.8m)에서 8間이고 남북이 길어 거의 20여丁(町, 109.1m)에 이르고 동서는 좁아 7-8丁에 불과하며 舊 馬山浦와의 교통이 빈번하여 상거래가 점점 발달할 기미를 보인다.

舊 馬山浦(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昌原街道에 있고 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戶數는 2,000여戶이며 監理署(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韓國新地理』 田淵友彦, 1908년, p.254, 博文館

韓人家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정(町)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韓國總覽』 德永勳美, 1908년, pp.58-59, 아세아문화사

․․․․마산만에 위치한 구 월영대 부근에 면적 15여 만평에 도로가 종횡으로 관통하고 있고 시가가 정연하고․․․․

한인가는 각국거류지에서 20정 거리의 구마산포에 있고 시가는 창원가도에 면하여 마산만의 북쪽 중앙에 있으며 인가는 2,000여 호이다. 

『馬山と鎭海灣』 平井斌夫․九貫政二, 1911년, p.3, 濱田新聞店

․․․․․신마산과 구마산 사이는 20町(1정은 109.1m, 60간)이며 구마산은 창원가도에 위치, 인가가 즐비하게 남북으로 연하여 조밀하고 해안을 따라 조선인 상가들이 늘어서 있음, 일인도 혼재, 선박화물의 집결과 흥성함이 극을 이룸, 신마산과 구마산의 사이에는 광대한 철도와 군용지가 놓여있음, 두 시가 곧 연결될 것으로 보임,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경부철도 마산선은 군의 서부를 관통하고 정차장 세 개가 있는 것 외에 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도로로 각지에 통하고 특히 마산 진주간 및 창원간은 길이 좋아 교통이 편리하다.

․․․․․시가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最新朝鮮地誌』 日韓書房編輯部, 1912년, p.444, 日韓書房

․․․․․도로는 근래 현저하게 개량되었다. 부근 내륙과의 교통은 도착하는 곳에 차와 말이 연결된다. 또 가까운 마산 진주간 중심가로가 개수되고 있고 교통은 새로운 면을 열어가고 있다. 

『新朝鮮全誌』 南宮濬, 1913년, p.146, 唯一書館

․․․․․市街는 신구 두 도시로 나누어져 신마산은 일본인이, 구마산은 주로 조선인의 부락이며 또 그 북쪽에 昌原舊邑이 있으니 모두 상업의 요충지이다. 

『最新朝鮮地誌(中)』 朝鮮 및 滿洲社, 1918년, p.19, 朝鮮 및 滿洲社出版部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여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며․․․․․ 개항 후 거류지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의 상가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朝鮮鐵道旅行便覽』 朝鮮總督府, 1923년, p.10, 조선인쇄주식회사(경성)

․․․․․구마산은 상업이 발달해 있으며 신마산 쪽은 많은 일본인들이 활동하는 곳으로서 특히 서쪽의 구 외국인 거류지였던 곳은 순 주택지로 사용되고 있다. 무학산을 배경으로 하여 진해만을 앞에 두고 경사가 완만한 시내에 시가가 형성되어 있다.

․․․․․상업이 매우 번성했던 적도 있었지만 1911년에 군사요충지로서 개항을 폐쇄한 이후부터 약간 침체된 상태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인구도 늘지 않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진주로 가는 경남선이 군북까지 만 개통되어 있는데 장래에는 한 번 더 성황을 이룰 것으로 본다. 

『馬山港誌』 諏方史郞, 1926년, pp.74-81, 朝鮮史談會

천엽촌(千葉村)이라는 것은․․․․․1905년 봄 40여 호의 어가단(漁家團)이 오고 하나의 어촌을 구성하여 이 속칭을 불렀다.(p.81)

1905년 11월 마산선 철도를 개방하고 일반 공중의 편리를 자유롭게 하면서부터 이주자는 갑자기 격증하고 특히 1906년 봄이 오면서 거류지, 마산포 및 그 중앙부에 모두 건축공사가 크게 일어나서 일본인의 여관은 한 집도 빈 곳이 없다. 한인 객사에도 4-5인의 일본인이 섞여 숙박하는 등․․․․․(p.74)

1906년 대곡하(大谷河)에 걸쳐 놓은 반룡교 서남 모퉁이에는 복옥(福屋)이라 이르는 음식점만 있었지만 북측으로는 요정․양복점 등 가게가 여러 채있었으며 망월루 서쪽 즉, 홍문동․청계동․월남동3가와 4가, 이사청에서 세관에 이르는 도로에는 상가가 즐비하여 마산의 긴자(銀座)거리라 불렀다(p.75)

․․․․․ 마산포 방면은 韓人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으며․․․․․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와 좋은 가옥이 많고 군인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대부분이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곳 관계자의 주택이 많이 있는데 중앙부 중 일부 신마산에 접한 곳은 商況이 오히려 신마산을 능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앙부 대부분은 철도용지를 빌린 전답들이다(p.3)

․․․․․장군교 부근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중앙동에 이르는 가로는 1906년 초겨울에 개통되어 당시 거류지인 마산포의 유일한 연락도로가 되었고 1910년에 마산, 진주 간 일등도로가 마산 역전까지 개통을 보게 되면서 두 개의 길을 얻어 척산교에서 서로 만나 한 도로가 되어 마산포로 들어가게 되었다(pp.202-203)

마산부청이 서북 모퉁이에 위치한 것은 반드시 府治를 건전히 발달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공무원이 이전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은 治者의 생각인데 府民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떠한지․․․․․․․․

․․․․․․형무지소 소재는 옛날 논밭이었던 한가로운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큰 가로에 접하여 상점이 즐비하고 크게 발한 지역이 되었다(pp.222-223) 

 

『朝鮮と建築』 朝鮮建築會, 1929년 3월호, p.39

현 마산의 시가는 바다에 면한 무학산록 일대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으로 길어 마치 띠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산부청의 위치는 남방 신마산의 구석에 치우쳐 있음과 동시에 약간 높은 언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구마산 방면은 매우 불편을 느끼고 있다. ․․․․․ 부청이전문제가 대두하여 그 위치를 중앙부에 선정한다는 것은 부민의 편리에는 이 이상 좋은 일은 없고 나아가 시가의 발전에도 커다란 이익이 있을 것이라․․․․․․․․ 

『馬山現勢錄』 長田 純․高須瑪公, 1929년, p.156, 馬山現勢錄刊行部

마산의 市街區 구성은 종래 新舊 兩 마산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연스런 市街區의 연결이 좋지 않았다. 마산 발전의 암과 같았던 중앙 마산의 耕地(철도용지)가 府에 불하되어․․․․․․

이 中央馬山市街區 構成과 관련해서는 뭐니뭐니해도 中央馬山地先의 공유수면 매축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본 사업의 완성은 더욱 마산항 발전의 기폭제를 이루는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표기한 연도는 당 내용이 실린 문헌의 발간연도이므로 시기를 너무 제한적으로 받아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신마산과 중앙마산 지역〉

1902년. 조계지 건설 초기, 건축물은 조계지의 최남단인 현재의 월남동 5가와 월남동 4가의 최남단,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에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1902년. 초기 조계지 건설규모는 남북으로 2㎞, 동서로 약 0.8㎞ 정도의 규모였다.

1906년. 율구미에 일본인 어촌이 형성되었다.

1906년. 전 창원군청(현 경남대학교 대학원) 아래의 홍문동, 청계동, 월남동3․4가 일대가 「마산의 긴자(銀座)」로 까지 불릴 정도로 번화하였다.

1906년. 중앙중심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진주가도(현 크리스탈호텔 앞 도로)를 이용해 원마산과 신마산이 연결되었다.

1908년. 합방 직전, 조계지에는 격자형의 도로가 정연하게 개설되어 있었다.

1911년. 시가(두월동 가로로 추정됨)는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상점이 즐비했다.

1923년. 조계지의 서쪽 경사지는 대부분 주택지로 활용되고 있었고 상가는 평지인 중심가로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폐항 이후부터는 도시가 정체되었다.

1926년. 신마산의 남쪽(조계지방향)에는 고급주택이 많았으며 북쪽(중앙마산방면)에는 관아․종교시설․교육시설이 많았다.

1926년. 철도용지 때문에 도시발전에 지장이 많았고 관공서 건물이 부(府)의 최남단에 위치한 것에 대한 부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중앙마산 개발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929년. 중앙마산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원마산 지역〉

1902년. 원마산의 인가(人家)는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상점도 많았는데 특히 창원가도 주변이 번화했고 해변도로변에는 어업과 관련한 상권이 발달하였다.

1911년. 일본인들의 상점이 진출하면서 거리의 외관이 더 번화해졌다.

1918년. 도로는 협소했으나 상업은 발달하였다.

1926년. 교도소 부근(현․삼성생명 빌딩 일대)지역도 상점이 많이 들어선 거리로 변했다. 

이와 같은 문헌의 일편으로 도시의 토지이용 현황을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많고 또한 소개한 문헌의 저자가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용이 신마산에 지우쳐 있어서 시기와 내용면에서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