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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64. 오보와 똥소동 65. 목장

by 허정도 2015. 12. 28.

64. 오보(午報)와 똥소동

 

지금 마산은 장군천변에 있는 소방서와 남성동 경찰파출소의 두 곳에 오보(싸이렌-오전 4시 통금 해제, 정오 12, 오후 11시반과 12시에 취오吹嗚) 장치가 되어 있지만 12,3년 전에는 완월 심고(新敎-천주교) 성당의 신부 시계에 의해서 오종(午鐘)을 치는데

그 때만 해도 지금 성지교(聖旨校) 이하는 일인주택 1동과 조금 내려와서 오반전(五反田) 양조장(푸른집 / 도립의료원으로 증축하고 있는 전 크리스탈 호텔-옮긴이) 그리고 산전(山田)장유공장(현 몽고장유) 외에는 허허벌판이며, 구마산 입구 주차장 가는 첫 골목에는 장승 한 쌍과 세칭 아래학교(현 성호초교 전신) 뿐이었던 때다.

성당 종소리가 현 구마산 천주교회 근처까지 은은히 들려오므로 동민들은 정오 12시를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마산 본역에서 발차 신호로써 역장이 부는 호각 소리가 서성동 모래밭 너머로 해서 구마산 매축지(남성동)까지 들려오는데 철도 시각은 정확하다하여 아침저녁 발차 때 호각소리를 따라 시각을 알게 되었다.

그 뒤 현 시청 청사 자리에 발전소가 설치된 뒤로 정오와 오후 정각 6시가 되면 흰 증기를 뿜으므로 해서 시각을 고하였다.

일본에서도 그때 큰 공장 외는 상시전(常時電)이 없을 때라 정오 시각에는 각 가정 및 군소 공장에 30초 정도 조명하여 줌으로써 오보(午報)를 알리기도 했다.

조선의 각 도시마다 오포(午砲) 제도가 실시되어 마산은 대정 말기인지 소화 초기에 마산부청(창원군청 / 현 경남대 평생학습관-옮긴이) 서남 광장에 비로소 오포를 비치하였으나 위치가 서편벽지에 편재한 때문에 신마산 방면에서만 오포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오포 대신 지금과 같이 싸이렌이 생겨 처음 싸이렌 비치장소가 시청 남쪽 매축지 노변이었는데, 그곳이 여자들 세탁소라 공교롭게도 소피(용변)하던 처녀나 부인들이 싸이렌의 용심스런 소리에 엉덩이를 깐 채 놀라 뛰어 나오는 넌센스도 있었다.

그래서 싸이렌을 소방서에 옮겼으나 2차대전 시에는 소방서 망대(望臺)는 적기 내습을 감시하는 초소가 됨에 따라 마산부청 내에서 관리한 때도 있었다.

여기 오포 대문에 부의회 때 논란되었던 이야기 한 토막을 들면, 부청 사환이 오포 책임자(일인)였는데 이 사환이 발포 몇 분 전에 변소에 가서 용변을 마치고 나왔을 때에는 이미 5분이 지난 때문에 이날 오포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의회에서 이사자(理事者)와 다투다가 오포 책임자의 증언가지 듣자고 떼를 부리는 의원도 있었는데 이것이 부회의의 똥 소동이라는 것이다.

<1871년에 시작된 동경의 오포(午砲) 홍보자료> 

 

 

65. 목장

 

마산 통정 5정목(通町 五丁目 / 현 장군동 5) 경전(한전)지점 후도(後道) 현 전도관 건너편에 촌상(村上)이라는 일인이 마산 목장이란 명칭으로 홀스타인 젖소 두 마리를 길러 우유를 일정 배달해 준 것이 1909년경이니 조선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일이라 사람이 소젖을 먹을 수 있느냐 하여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조선인으로 유경(遊京)한 사람들도 점점 소젖을 먹게 되고 영업도 서서히 늘어나자 현재 자산동 동사 자리로 이전 확장되었다.

수년 후 벼락 광산왕 중산(中山) 모라는 자가 인수, 중포 대대행로(大隊行路) 근방으로 이전 영업 중 종전으로 광산 용원(傭員) 진재구가 관리하다가 다시 정 모에게 전매하였으나 우유에 관한 전문지식과 경험 부족 탓으로 완전히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