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8. 2. 1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이 흉내 내는 데 따라 짚 뭉치 잡고 던지고 뺏으면서 듣기만 한 럭비를 한답시고 빈 밭고랑과 둑을 쓸던 기억도, 푸석푸석한 밭이라 살이 아프지 않아 좋았던 느낌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고무로 된 공을 본 건 전쟁 중 반쪽 운동장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고, 가죽으로 된 공을 만져본 건 정전 전후였던 것 같다. 군용물자들이 대거 민간에 불하되어 시중에 나오면서 고무제품이나 가죽제품들이 가공되어 우리들에게 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까만 고무주머니에 바람만 넣은 공이었지만 보통 아이들이 가지기엔 아직 귀한 것이었기에 운동장에 한두 개만 튀어 다녀도 백여 명의 아이들이 공 따라 뛰어 다니던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니 공 가진 아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방과 후에 벌어지는 축구시합에 선발되려면 그 아이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기 때도 그 친구는 주장 노릇을 했고 모든 멤버들이 그 아이에게 패스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합포초등학교라 잘못 세게 차면 종종 공이 바다에 빠지기도 했었는데(지금 학교 동쪽 길 건너 라이온스 회관부터 바다였다) 그때도 다투어 바지를 걷거나 벗고 들어가 공을 건져왔다. 심지어 겨울에도 그랬다.

<공을 잘못하면 바다에 빠졌다는 당시 합포초등학교와 현재 상황 비교>

 

가죽공이 눈에 익은 건 정전 이듬해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8·15체육대회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기 전부터 방과 후에 하는 선수들의 연습 때도 많이 보았거니와 중학교 진학 후엔 체육시간에도 농구공이나 배구공 등은 만져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별 실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었던 축구공차기는 마산중학교가 가졌던 운동장 여건 때문에 3년 내내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다.

마산고등학교도 운동장 반쯤에 판자 가교사를 지어 교실로 쓰고, 나머지에 농구장, 배구장, 철봉시설 등을 하였으니 축구는 엄두도 못 낼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야구 연습도 공 던지고 받기 정도만 하는 걸 보았고 배팅연습이나 실전훈련은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을 빌어 하는 걸 보았다. 체육시간에 배구공도 멋모르고 세게 쳐서 공 찾아 완월초등학교 운동장을 헤매는 일도 종종 일어났었다.

그런데 전후에 활기를 띈 운동 중에서도 특히 축구가 중고교 팀들과 군인 팀들에서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계기를 준 것은 당시 마산에 와있었던 헌병사령부 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팀에 국가대표 유명선수들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선수로는 골키퍼 함흥철과 센터포드 최정민이다.

함흥철은 50년대 한국축구계에선 보기 드문 국제수준의 골키퍼로 평가 받은 선수였다.

 <함흥철 (1930 ~ 2000) / 한국축구1세대 수문장이자 국가대표팀 감독 역임>

 

우리는 마산상고 운동장에서 골문을 지키는 그의 유니폼 꿰맨 부분과 방귀소리(그가 옆으로 날면서 내는 방귀소리는 당시 우리들의 화제로 돌아다녔다.)에 낄낄거리기도 했지만 몸을 수평으로 날리면서 강슛을 쳐내는, 그때로선 상상도 못한 묘기를 실제로 보면서는 경이감을 금치 못하기도 했었다. 그때 그의 유니폼은 긴 바지 긴 소매였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잔디구장이 없었던 여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최정민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은데,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였다는 평가만 머리 속에 있다. 그 외에도 우상권 등 국가대표급 선수가 두세 명 더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다.

 

<1950년대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불리며 한국 축구를 대표했던 최정민 전 축구대표팀 감독(1930~1983)>

 

그들이 연습상대가 없어 진해 해군사관학교 축구팀이나 통제부 팀, 아니면 마산고, 마산상고 팀들과 어울렸던 것 같은데 그 팀들로선 과분한 상대 덕에 전력도 향상시키고 학생들의 관심도 더 받았던 것 같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우리 초등시절에 신화처럼 화제에 올라있던 마산 출신 대표선수, 이름은 안종수였다.

올림픽 경기에서 그가 쏜 슛이 상대 골키퍼를 기절시켜 상대국 응원자가 권총을 빼들어 쏘았는데 그가 총알을 피했다느니 하는, 지금이라면 유치원생이라도 믿지 않을 소리들을 그때 우리들은 다투어 떠들곤 했다.

내가 성인이 된 언젠가 일간지에서 읽은 한국축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가 마산 출신임은 확인되었으나 그의 실력은 교체 멤버 정도의 위치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을 찾아가다 - 19  (0) 2018.02.26
기억을 찾아가다 - 18  (0) 2018.02.19
기억을 찾아가다 - 17  (0) 2018.02.12
기억을 찾아가다 - 16  (0) 2018.02.05
기억을 찾아가다 - 15  (0) 2018.01.29
기억을 찾아가다 - 14  (0) 2018.01.22
Trackback 0 Comment 0
120년 전 마산은?  -  1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

기후위기 비상사태 선언문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2019년 올해의 단어로 &ldquo;기후비상사태&rdquo;(Climate Emergency)를 선정했습니다. 전 세계 45여개 국가 1400여개 지방정부는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강력한 기후변화 대책..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선물

이 글은 청란교회 목사이며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사진)가 3월 12일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되새겨볼만한 내용이라 옮겨 포스팅합니다.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되었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1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4)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상해격발」이라는 문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상화 소장 「상해격발」 참조.) 비단 위에 인쇄된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큰 주제..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9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2) 이교재(우측 사진)의 임정문서 일부가 동아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정순의 아들인 이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이상화와의 면담은 2017년 9월 27일 마산..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lsquo;경상남북도 상주대표&rsquo;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