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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5.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를 완부(完膚, 흠이 없이 완전함) 없이 당(當)튼 남방아주(南方亞洲)의 태반에 걸쳐 반거하고 있는 인도보다 그 인구에 있어서 십분의 일에도 불과하며 피치(被治) 연월도 삼십육 년이지마는 약소민족 투쟁기록은 세계 독립운동사상 이 나라 우에 따라올 국가가 없다.

비폭력을 내세운 미약독립투쟁! 비협력인 「스와라지」운동(1906년 인도에서 전개되었던 반영 자치 운동)으로 도저히 주권탈환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므로 외국의 노예제도의「멍에」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 나라 민족전체가 선혈을 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동시에 정신 육체 공히 숭고한 재단에 오르지 않으면 주권회복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자는 국민제위에게 죄송스러운 말이지마는 독립선언서라든지 33인의 그때 태도를 그리 감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언서 그 자체가 폭력을 부정하였고 이 선언을 발포하는 동시에 태서관(太西館)요리점에서 비장한 각오 아래 경기도 경찰부에 전화로써 자수 연락을 하였다.

얼핏 들으면 영웅 같기도 하나 이런 일은 「아라비안나이트」에나오는 이야기와도 같고 중세기 나이트(騎士)의 용감한 역사 인물도 같으니 냉철(冷徹)한 눈으로 비판하면 찬양(讚揚)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독립투쟁이나 사회운동이 어느 정도 성숙하기까지에는 심오한 계략과 엄히 비밀리에 잠입 침투한 후 상당한 정신무장을 장비한 연(然)에 그 행동이 전광석화적(的)으로 지상에 나타나서 적의 급소와 허를 무자비하게 격충(激衝)하여도 실패 뒤 오는 비경(悲境)이 왕왕(往往)함에도 불구하고 국민민족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최절정이며 중요한 인산(因山) 기회를 전후한 최단시간에 하등의 무장도 갖추지 못한 채 요리점에서 일정(日政)의 개들에게 이 중대한 음모를「제공」하고 「온순히 포승」을 받았는가?

생각해보면 심히 불유쾌하기 한이 없는 일이다.

냉정하면 염○의 영웅심리를 투매가로서 적에 제공함으로 그 영명(令名)은 고가(高價)로 국내에 선포된 것이 아닐까?

바로 말하면 가령 일본의 개들에게 전화 연락을 하였을지라도 체포하러왔던 개새끼들을 문전에서 격살쯤은 하여야 민족의 열혈이 용솟음쳤을 것이거늘 그 유유낙낙 끌려간다는 것은 아무리보아도 적진에 투항이 아니면 자살적 타협행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이럴 때 일수록 불란서혁명의 지휘자인 「마라, Jean-Paul Marat, 프랑스 혁명기 급진적인 산악당 지도자」 「탄론(?)」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로 프랑스 혁명의 주요인물」들과 같이 료군(僚軍(?)) 최첨단에서 사기를 북돋우고 적을 호령하며 때로는 적진에 돌입하여야 할 것인바 자기들은 실내에서 비항거로 붙들려가고 기다(幾多, 수효가 많음)의 동포들만 피를 흘리게 한 것은 그리 찬성할 수가 없다.

약소민족운동은 정치적 타협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투쟁이며 피를 요구한다. 그렇지 못하면 외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치운동은 될지 모르나 그것은 완전독립운동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와라지」운동을 역설하는 「마하트마 간디즘」을 조소하였고 국민협회의 민원식 시중회(時中會)의 최린 일파의 친일적 자치운동을 타○ 매장(埋葬)하였던 것은 국민의 기억에 새로운 일이다.

유차관지(由此觀之)컨대 불행한 이 나라에 나서 이 나라 운명을 바로잡고자 생명을 홍모나 초개(草芥) 같이 조국에 바친 불우한 열혈애국지사가 지금은 풀잎사이에서 이슬과 서리를 맞으며 이 세상과 시국을 한탄하는 유명무명의 수많은 백골들도 생시에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굳고 굳은 결심으로 직접행동을 아끼지 않은 때문에 세계사에 희생된 수가 시간적으로 계산하여 으뜸이며 약소국가에 용명(勇名)이 휘날렸으며 구역(逆)날 말이나 총독정책도 다소 달라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호기로 삼십삼인 중 보따리를 소초(小礎, 小礎國昭, 고이소 쿠니아키, 제8대 조선총독)나 남차랑(南次郞,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에 팔아먹던 자도 생겼고 밀정이 잠행하였고 매국친일도당이 횡행하였으며 어제의 친일범죄를 해결치 않고 오늘은 일본 놈의 사무를 받은 듯이 국가사회에 군림하고 선열을 무시하는 현상을 볼 때 영혼이 구천에 그 자들 두상에 낙뢰 없는 것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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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누구의 은덕으로 대한민국의 자모(慈母) 품안에서 평안히 행복 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국가의 요직에 안如히 있는 자(者) 중에 진심으로 민족 전체의 이해(利害) 휴척(休戚,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국가를 걱정해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는가?

8.15가 지난 기년(幾年, 몇 해) 후 정부에서는 각도(各道)를 통하여 애국자 병기(並其) 유가족의 업적을 조사 보고토록 행정 최말초(最末梢) 기관에 명하고 해(該)보고서에 준하여 각도(各道)에서 애국한 행로의 경중을 개량하는 소위 심사(?)회에 소위 ‘엄정’한 심의를 행한 것은 아주(원문에는 ‘아즉’) 가까운 사실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주권을 갖는 민족으로서는 매우 신선(新鮮)한 일이요 한 개의 생생한 교육이 아닐 수 없었든 것이다.

연(然)이나 소위 ‘엄정심의(嚴正審議)’라는 상자 속에는 진정한 애국열사의 혼이 구름이냐? 바람이냐? 혹은 유령이냐? 영자(影子, 불투명한 물체가 빛을 가려 나타나는 검은 형상)와도 같이 다시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단기관의 실책인가? 체송(遞送) 중 도난인가? 당국의 사무적 착잡(錯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섞여 어수선함)의 과오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심의해볼 일분의 가치가 없었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애국한 비중이라든지 순국한 열사의 업적이 저울에 달아본 결과 보천하(普天下, 만천하)에 높이 선양할 공적은 크지마는 그들은 배경이 없고 사회에 두각이 나타난 인물이 없는 것을 따져서 심의하는 인물의 수지계산이 맞지 않다는 말 외 적중될 이유가 없지 않다고 본다.

심의 당사자가 여기에 항의할지 모르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비인(非認)하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사리를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실례(實例)를 들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교재 선생에 대해서 심의 담당자이든 도당국은 무슨 변명할 자료가 있거든 번듯하게 제시해 보아라.

독립열사를 표창한데 이의할 국민은 아마 한사람도 없을 것이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며 갈채를 아끼지 않을 것이나 그들 피표창자 중에 전부가 3·1정신과 그의 꿋꿋한 절개를 가졌던 자 몇 사람이나 있었는가를 엄밀하게 분석해 보았는가?

이 점이 매우 불쾌한 불순선(不純線)을 발견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설사 변절은 하였을지라도 제법 출세나 하고 세도깨나 있는 부류는 일약(一躍) 지사에 급재하고 이것도 저것도 없는 사람은 흙이나 재(灰) 속에 묻어버리고만 셈이라고 민족정기로 보아서 호령(號令)할 것이 아니냐?

당시 이규재 선생과 황교에서 전사한 팔열사의 전사(戰史)를 진전면장 박열주 씨가 보고(報告) 상신(上申)하였음에도 돌보지 않고 도에서 ‘넉아웃’을 하였음에 박 씨가 수(數) 이차(二次) 상도(上道)하여 역설한바 있었으나 그때의 양(梁) 경남지사는 코대답 정도로서 회피하여 오늘까지 묵살한 심정은 아무리보아도 선의(善意)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위정자가 이 모양이니 무의식한 백성이야 마음이 있은들 어찌 하리요.

이러한 일에도 일반 대(對) 위정자 간에 틈이 생기게 되니 책임은 누가 져야 될지 모르나 본래가 민중운동이라는 것은 민중 그 자신이 해결할 생각(원문은 ‘生意’)도 못하고 어(於) 천만사(千萬事)가 총망(悤忙, 매우 급하고 바쁨)한 위정자에게 의뢰하는 데에 우매(愚昧)한 민중의 비애가 생(生)하는 것을 더욱 계몽(啓蒙)하고 싶다.

어쨌든 지면이 용인(원문에는 ‘容入’)하는 대로 차항(次項)에 계속하기로 하거니와 금반(今般) 민간인 유지 제씨(諸氏)가 착안한 삼진지구의 선열제공(先烈諸公)의 기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성과 있기를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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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1.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4 / 1954년 4월 17일 (토)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4

 

이야기는 본선(本線)에서 조금 지났지만은 이교재 선생을 검거한 이만갑이라는 자(者)는 어떠한 자인가를 말 안할 수 없다.

기자(김형윤 선생 자신)와 이만갑은 (지금은 일반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마산 간이농업학교 동기동창이며 재학 중에 성질이 못된 자로써 장성(長成)한 뒤 그의 의부(義父)?되는 황용석(이 자는 기자보다 1년 선배로 졸업 후 헌병보조원으로 또 그 후 고등계로 전환하여 자살직전까지 관부열락선 상무형사로 기자가 일본 경도에서 추방 귀국 시 미행한 자)의 소개로 순사에 응시하여,

독립운동자 체포에 날 완(腕, 솜씨)을 뽐내어서 그때 유명한 상해의열단 김시현 일파 검거에 실패된 벌(罰)로 경부도 못되고 순사부장으로 진주 밀양 마산 등 경찰서로 전전하여 상당수의 애국자를 검거투옥한 자이며,

고문으로 1920년경 마산서의 조선인 고등계 주임 김 경부(警部)라는 자의 백중(伯仲)을 다투든 자며, 일설에는 친모를 XXX취체(取締)로 구류(拘留)시킨 전무후무한 모범경관이며, 그 의부 황용석을 구타까지 범한 자

피차(彼此) 장성(長成)이라 나는 사회주의자로 그는 형사로서 갈 길은 확연하였지만은 내가 일인 구타 사건 시에는 이만갑은 나의 직접취조자-생각하면 기이하기도 한 이야기다.

이만하면 그자의 위인(爲人, 사람 됨됨이)은 알 수 있는 일이다.

8·15이후 흐지부지한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았으나 바보 같은 [특위] 어릿광대 놀음에 탈면(脫免)과 함께 고비원주(高飛遠走, 종적을 감추려고 멀리 달아나다)하고만 자이다.

생각하면 삼진지방은 공자도 나고 도척이도 난 모양이다. 한화휴제(閑話休題) 이교재 선생을 투옥한 후 일경은 선생을 고초를 주어 범죄를 추가하고 선생의 애처되는 홍씨까지 구속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는 일방 초가지붕은 물론 온돌과 부엌까지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쥐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특기하여 만천하에 소개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선생이 받았던 상해임정의 밀영서이다.

보통 심약한 인간 같으면 남편이 그 지경이요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는 이 불안하고도 가정이 망할 커다란 화근은 벌써 불살라버릴 것이지만은 선생의 미망인은 아무리 일본이 욱일승천의 세를 가지고 있지만은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장한 뜻과 굳은 신념으로 이 불안한 지령서를 굴뚝 속이 아니면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떠한 때에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각일분(一刻一分)도 머릿속에 떠난 일 없이 심적 고통을 겪어오던 피눈물이 쏟아질 과거!

반드시 닥쳐올 조국독립의 강철 같은 신념 앞에 모든 사(邪)된 권력과 부귀가 어디 있으리오?

그러나 중생을 위하는 순도자의 가는 길은 언제나 박해가 따라다니는 모양으로 선생일거 후 기다(幾多)의 애국가는 변절하고 혹은 적진에 투항(投降)하고 주민과 친우는 자기 신변을 겁내어 접근하기 꺼려하여 설상가상으로 고리변업자(高利邊業者)는 맹호같이 달려들었으니 차귀(借鬼)는 선생의 문전에 낙역부절(絡繹不絶)되는 형편이라

그렇지 않아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가 일시에 파산되어 적빈여세(赤貧如洗) 그대로 조석의 끼니까지 막연한 내락(奈落)에 빠지고 있었으나 그때는 일본의 악정이 있어 그렇다고 하고 자기의 생명을 조국에 바친 종적도 없이 8·15 해방된 후에는 선생의 집안에 누가 한번 따뜻이 찾아 주었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생에게 전달한 위임장. 이 위임장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 대표로 인정하여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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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4.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벼랑’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생의 백골(白骨)이 묻혀있는 허물어진 분묘가 눈에 뜨이고 조금 아래 양지쪽에 두 봉(封)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선친 선영이다.

노(老) 미망인은 여기서 시부모와 부군을 추억하는 듯 몇 개의 풀을 뽑고 있었다.

선생의 봉분 아래는 산이 급각도로 수직하며 묘소 정면은 협소하여 성묘하기에도 부자유하다.

선생이 지하에든지 봄바람 가을달이 몇 번이나 지났건만 찾는 사람 별로 없고 유족생계가 화급하여 그랬는지 봉축은 허물어져 황폐 그대로 이고 한 조각 표석조차 없으니 마음 없는 초동이야 지하의 고인이 어찌 누구인줄 알까보냐.

일행의 단심으로 묘전에 간단한 요핵(核)을 차려놓고 추념의 제를 지내게 되었으니 제문의 애절함에 전배자는 물론 유족의 단장애(斷腸哀)는 어느 누가 알아주랴.

오십 반평생 제물(祭物) 앞이나 무덤 앞에 절해본 일이 없는 기자가 뜻밖에도 이 날 제주(祭主)라는 직위로 초헌(初獻)을 올리고 절을 하게 된 것도 비망록에 기록하여 둘 일이다.

이어서 일행의 대표로 이(李) 마산시장이 아헌(亞獻), 다음으로 이 씨 문중 취객으로 허 금조(금융조합)이사의 순으로 정성껏 잔 들어 올리고 일동이 함께 재배하니 일행 중 백발이 휘날리는 윤치왕 군의학교 교장, 전 마산여고 교장 권영운 씨, 김형철 삼성병원장 등 삼노(三老)가 이날 특이한 채색(彩色)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성어린 추모의 제를 마치고 일행은 고인의 선영 앞 장방형으로 된 석축 위의 잔디에서 파제(罷祭) 제물을 벌려놓고 고인의 불타는 애국정신과 그 업적에 경탄과 찬양(讚揚)의 꽃을 피웠다.

아울러 허물어진 봉분의 수축, 유족의 생활대책 문제가 화제에 올라 즉석에서 선열의 기념사업 추진 발기인으로 권영운 김상용 양씨 외 기자 3명이 지명을 받고 단시일 내에 이 사업의 구체안을 구상하여 유종의 결실을 보도록 하였다.

각설(却說), 이교재 선생은 어떠한 경로를 밟고 어떠한 결과를 맺었는가 우선 윤곽만을 소개하고 상보(詳報)는 기념사업추위에 있을 것을 믿고 미루어 두기로 한다.

선생은 1919 독립운동이 전국 우내(宇內, 온 세계)에 창일하였을 때 감연(敢然)히 상해로 망명하여 당시 대한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고 굳은 결심과 사(死) 서(誓)하고(죽음을 맹세하고) 중대 밀명을 띈 밀사로 국내에 잠입 활약하였다함은 이미 소개한 바이나

국내 험의(험疑, ?) 처음 군자금 징모 사건으로 지명 수배되어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 김도산 일행의 신파연극을 변장 관람 중 동(同) 고향인 오서리 출신 이만갑이라는 진주서 고등형사(부장)에게 발각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었으며 종시(終始) 일관(一貫) 굳게 입을 다물고 자백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치장 혹은 감방에서도 다만 동지들에게 「수구여병(守口如甁)」의 구호로써 동지들을 경고 하였다고한다.

5년 언도 후 공소심에서 3년형을 마치고 출옥 즉시 초지일관 백절불굴 조국광복의 열혈은 촌흐(寸?)도 냉(冷, 식다)함이 없이 상해 임정과 더욱 긴밀한 연락을 하다가 다시 혈고서파부(血告書播付, ?)사건이 발각되어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일차 피검당시 전신 타박의 어혈병과 야만적 생식기 고문 여독의 화로 드디어 사십구 세를 일기로 열혈 심장의 고동도 장한을 품은 채 옥중에 정돈(停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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