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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1921년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갔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7쪽.)고 보았다.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상해로 망명한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1921년 출옥 후 혹은 1922년 4월 벌금형 이후 상해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기부금품취체규칙 위반으로 체포된 사실도 상해 임정과의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그의 첫 번째 상해행은 1920년도 말의 출옥 직후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왜 상해로 갔을까?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당시 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자는 부류와 외교와 정치력을 통해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부류가 있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6, 114~115쪽)

전자에 뜻을 둔 이들은 만주로, 후자는 상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교재가 상해를 택한 이유는 통상적으로 일찍부터 한인들이 집결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3.1운동 이후 망명자들이 급증하고 일본과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3월 하순경 최고기관 설립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설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8~51쪽)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진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맺은 인맥이나 단체를 통해 상해로 들어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해의 임정과 마산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조직은 국권회복단이나 대동청년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 등이 경북지방의 유림을 포섭하여 조직한 항일운동결사였다.

이 단체는 마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안확을 지부장으로, 李瀅宰·金璣成을 임원, 부원으로 이순상·배중세·변상태 등이 참여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경남대 경남지역문제연구소, 2004 참조)

이 중에서 일부 단원들이 4.3삼진의거 때 많은 군중을 동원하였고, 이후 상해 임정에도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79)

1909년 10월에 안희제·서상일·이원식·남형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형식의 대동청년단은 1945년까지 비밀결사로서 활동했기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는 대동청년단의 거점이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4쪽. 80) 떤 경우 대동청년단의 표면적인 조직활동으로서 국권회복단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0~163쪽)

마산과 삼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형재·배중세·변상태·김관재 등과(김봉열, 「마산 삼진의거의 3.1운동사적 고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239쪽) 윤상태·서상일·신상태·남형우·박영모·안희제·박중화 등도 양 단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임시의정원 구성에서도 의원 중 남형우를 비롯한 대동청년단 출신이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80쪽)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 및 국권회복단과 일련의 연락망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교재는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서상환과 서상호가 국권회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통영시사편찬위원회, 2018, 534쪽. 서상호는 이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박성숙의 처남이었다. 박성숙은 또 이교재의 내종형제였다.)

또한 이교재가 마지막으로 국내에 들어올 때 임정에서 전한 문건 중에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2인 모두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마산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에서 김관제는 변상태와 함께 각각 경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원의 의기를 책임지고 분담하였고,(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88쪽. 김관제는 경남 창원군 동면 무점리 51번지 출신으로 1920년 5월경에 있었던 의열단 폭탄 밀송 사건 관련자로 체포될 당시 김해군 김해면 남문통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高等警察要史,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5권 1920년 7월 31일 의열단원 곽재기 이성우 등 26명). 이후 김관제는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직의 주요 인물이었던 변상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는 책임을 맡았다.86) 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86)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 멤버 이순상(이순상은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11년 3월에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70쪽)은 상해에서 잠입한 高漢과 부산에서 접촉하기도 하였다.

권오봉의 동지였던 안희제는(이병철, 「다시 쓰는 인물독립운동사, 백산의 동지들 9, 성재 권오봉」, 부산일보1995년 1018일자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88~89)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고, 특히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남형우와 윤현진을 파견하였으며, 임정의 재정난이 심각할 때 누만의 자금을 조달하여 위기를 돌파하도록 도와준 사실도 있었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11~113쪽) 나아가 윤현진은 임시정부 원년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정원 의원에 경상도 대표 6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을 맡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임시정부사 자료집),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155쪽) 백산상회 자금 30만 원을 임정에 헌납하기도 하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윤현진)

상해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고한은 배중세와 안확과도 면식이 있었고, 결국 배중세와 함께 상해로 탈출하였다.(「이순상신문조서(제1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판 참조) 이 때 상해로 탈출한 사람으로 배중세 뿐만 아니라 남형우, 윤현진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권오봉, 안확, 변상태, 김관제, 안희제, 배중세, 남형우 등을 비롯한 삼진, 마산 및 경남지역과 상해를 연결하는 국권회복단 및 대동청년단이라는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상해행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는 당시 어떤 루트를 통해 상해로 갔을까.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상해 및 만주로의 망명 열기가 타올랐다. 이 당시 상해행 루트는 열차로 신의주까지 간 다음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의 단동(현 안동)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는 노정이었다.

임정에서는 1919년 7월 10일에 연통제를 설립하면서 국내와 임정의 연락망을 조직화하였다. 연통제란 임정과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연락망 조직으로 당시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설립하여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 77~81쪽.)

남편을 따라 상해로 망명한 정정화는 연통제와 뒤이어 만들어진 교통국을 통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잠입경로는 상해에서 아일랜드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안동으로 간 다음 그곳에 상주하는 통신원의 집에 머물고 그의 안내에 따라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오는 노정이었다.

신의주에서는 비밀연락 거점인 이세창 양복점을 접촉하였고, 그의 편의로 서울에 도착하면,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 박사를 찾아가 이곳에서 약 20일 동안 머물며 임정에서 지시한 사람을 만나고 자금을 모은 다음, 위의 귀환 코스를 거꾸로 되짚어 가며 상해로 귀환하였다.(한시준, 「정정화의 생애와 독립운동」, 사학지 47, 2013.12, 137~141쪽)

이교재도 이른바 ‘정정화루트’라고 부를 수 있는 코스를 따라 상해로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위 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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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형량에 있어서 이교재보다 적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많은 1년 형이다.

다음으로 서석천의 경우, 1949년 4월에 발간된 한 언론에 실린 19명의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이 있다.(민주중보 제1034호(7권) 1949년 4월 29일자. 이곳에 실린 명단은 沈倫, 金義植, 南海, 咸陽 金守東, 洪源轍, 徐錫天, 孫吉童, 朴洙東, 統營 金宜錫, 洪鍾濟, 宋孟守, 朴○漢, 馬山 金浩鉉, 高昇柱, 卞甲섭, 金英煥, 洪斗益, 卞相福, 李基鳳 등이다.)

들 중에서 예컨대 마산지역 출신으로 구분된 金浩鉉, 高昇柱, 卞甲燮, 金英煥, 洪斗益,卞相福, 李基鳳 등은 모두 삼진의거 때 피살당한 8의사들이다.

서석천은 남해와 함양 지역의 인물로 속해 있는데, 이로 보아 이교재와 같은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49년에 반민특위경남조사부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을 때, 당시 조사관들은 진동의 창의비에 참배를 하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기미독립운동 당시 피체포자인 서석천도 동행하였다.(이때 체포된 인물 중 삼진의거 때 일본헌병의 일원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았던 심의경이 포함되어 있다. 62세였던 그는 함안군 법수면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죄로 체포된 인물 중에 진동면 고현의 송도에 사는 金尙圭도 포함되어 있다.)

徐正奎(1889~1949)는 창원의 진동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고현의 만세시위 참여하였고, 이어 4.3시위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그 역시 제령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이교재와 같이 진주지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인터넷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관리번호 31950) 

출신지가 진동이고 고현과 4.3의거에 잇따라 참여하였음에도 의거 직후에 피체를 피한 채 다시 진주에 가서 활동한 것을 보면, 이교재 역시 이러한 궤적을 밟았으리라고 본다.

李炳秀(1896~1960)의 출생지 주소는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97번지이다. 이 주소는 현재 동대 마을에 있는 진전우체국 옆으로, 이교재와 바로 이웃한 곳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이병수는 이교재가 통영에서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을 당시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에”라는 김형윤 기자의 회고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두 사람은 친밀한 동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전면 오서리가 고향인 권영한의 죄명도 집행원부에 따르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이며 이교재와 같이 9월 25일에 최종적으로 6개월 징역형이 확정되었다.(이들은 범죄인명부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인 형명이나 형기를 알 수는 없으나 이병수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동·진전·진북의 3개 면을 일컫는 삼진지역에서는 4.3삼진의거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못지않게 체포 투옥된 이들이 있지만,(「창원소요판결, 징역 1년 이하」, 매일신보, 1919년 5월 29일자 기사에 인명 朴和烈, 甘泰舜, 具在均, 薛灌銖, 裵龍文, 曹潤鎬, 孔道守, 張相五, 金相鎭, 金世元, 沈相璘, 申甲先, 曹喜舜, 史致洪, 金道根, 李大鎬, 金斯文, 金介同, 孔仕千, 金昌實, 崔介同, 申壽鉉, 安相錫, 金瀅源, 崔世植, 趙鏞瑨, 徐鎔守, 金南守, 許鎭, 權寧祚, 權寧震, 權五奎, 權泰濬, 白承仁, 盧秀?, 朴淳祚, 金鍾顥, 權五成, 李敎瑛 등의 이름이 보인다. ) 이들은 대부분 경성지방법원이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와 달리 위의 6인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날에 같은 죄명으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1923년의 통영사건 때에도 오서리 출신의 이만갑이라는 진주경찰서 고등형사에게 체포되었다고 알려졌는데,(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3.1운동 때에도 진주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에 삼진지역의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법정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컨대 이교재 일행은 삼진지역의 면민들이 연합대를 구성하여 진행한 3.1운동에 참여한 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진주에 가서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다 그곳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복심법원에서의 형기를 마쳤다면 이교재는 1922년 3월 24일에 출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는 1년 3개월간의 형기를 마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1920년 12월 24일에 출옥한 셈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이교재는 출옥 직후에 상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아직껏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건이 있다. 1922년 4월 18일이 판결 날짜로 되어 있는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이름은 이교재, 나이는 37세, 본적/주소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이며, 죄명은 ‘대정 8년 제령제7호 위반’”이다.

판결기관은 마산지검 충무지청으로서 주문은 ‘죄가 되지 않음’이었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622&evntId= &evntdowngbn=N&indpnId=000014584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앞에서 본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인한 복역기간이 1년 3개월이었다면 출옥 이후 1년 4개월여 만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달리 진동면사무소 소장의 범죄인 명부에 기재된 죄명은 ‘기부금품모집취제규칙위반’이며, 형명과 형기는 ‘벌금 30원’, 판결청은 ‘마산분국’이다.

국가기록원 기록과 달리 죄명이 구체적이며 그에 따른 벌금까지 부과한 것이다.

이 「기부금품취체규칙」은 융희 3년(1909) 3월 1일에 각령 제2호로 관보에 실렸는데, 기부금품을 모집할 경우에는 모집 목적 및 방법, 모집 금품의 종류, 수량 및 보관 방법, 모집자의 주소· 직업· 성명· 연령 등을 갖춰 내부대신 및 사업 주무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는 통감부가 당시에 불기 시작한 민립학교의 기부금 모집을 통제하여 학교 설립을 차단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김효정, 「韓末 民立 師範學校의 設立과 敎育救國運動」,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석사논문, 2015.2, 31쪽)

이 규칙이 이교재에게도 적용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기부금을 모집하여 어떤 용도로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해에 통영에서 실제로 일어났듯이 독립군자금 모집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라고 짐작해 보지만, 결정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다면 이 기부금 사건도 이교재가 단독으로 실행한 것이라기보다 임정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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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건들을 道內 일원에 배부하다가 오서리 출신의 경찰인 이만갑에 의해 체포되어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졌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참여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919년 7월 3일에 경상남도 장관인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낸 「소요에 관한 건(제7보)」에 따르면(문서제목,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문서철명, 大正8年 騷擾事件に關する道長官報告綴 7冊內の7, 문서번호, 「慶南地親第491號朝鮮總督府 內秘補 135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세가 점차 안정되어 가지만 아직도 강박문서가 때때로 각 방면에 배부되며 지난달(6월) 11일에 종래 李彰東의 명의로 진주에서 강박장을 배부하고 있던 이교재 체포(밑줄 필자)에 의해 금후는 화근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뒤 지난달 24일에 도청 및 진주군청에서도 강박문서를 송부…”하고 있다면서 군내 유력자 77명을 진주문묘에 모아 놓고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교재는 6월 초순에도 이른바 강박문서를 진주에서 배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이창동의 명의’라는 것이 이창동의 이름으로 활동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교재가 저 이름으로 독립 관련 문서를 배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3.1만세시위 직후부터 죽 계속된 것인지의 여부도 역시 확인하기 어렵지만,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과 6월 초순까지 진주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다.

진주경찰서에 잡혀간 이교재는 진주재판소를 거쳐 1919년 9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고 상소를 취하한 다음 9월 25일에 형이 확정되어 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大正 8年(1919) 執行原簿(大邱覆審法院),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752. 그러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정보에는 “삼일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 배부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로 기술되어 있다.h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 do?goTocode=20001 “경남북 일대”라는 부분도, 3년 복역이란 부분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교재」항에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이 역시 오류이다.)

당시 이교재와 같은 날에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을 언도받은 인물과 구형량은 다음과 같다.

<표 1> 3.1운동 당시 이교재와 일행의 재판 기록

성명 형량 죄명 재판소 형 확정일 형무소
李敎載 2년6개월 대정 8년 제령제7호 및 출판법 위반 대구복심법원 1919년9월25일 진주
沈相沅 1년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錫天 10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正奎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李炳秀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權寧漢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일제 당국이 이교재와 일행에게 언도한 죄명은 ‘대정 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출판법 위반의 구체적 내용은 ‘제1항 國交를 저해하고 政體를 붕괴케 하거나 국헌을 문란시키는 문서 및 도서를 출판했을 때는 3년 이하의 役刑에 처한다. 제2항 외교 및 군사의 기밀에 관한 문서 및 도화를 출판했을 때는 2년 이하의 역형에 처한다’ 등이었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역사문제연구 18, 2007, 14쪽)이었다.

잘 알다시피 制令이란 일본의 식민지배의 효율성과 자의성의 극대화를 위해 조선총독에게 부여된 제령제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법률을 말한다.

일본정부는 1910년 8월 29일의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라는 긴급칙령 324호를 발포하여 일제하 조선의 법률은 조선총독부령, 곧 제령의 형식으로 제정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김창록, 「제령에 관한 연구」, 법사학연구 26, 2002, 109~171쪽)

강점기 35년간 제정된 제령은 모두 681건으로 분야별로는 경제와 산업이 466건, 사법·경찰이 157건, 기타 사회, 문화, 행정 순이다.(한승연, 「제령을 통해 본 총독정치의 목표와 조선 총독의 행정적 권한 연구」, 정부학연구 제15권 제2호, 2009, 180~183쪽)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인사들을 처벌하는데 사용된 ‘대정8년제령제7호’는 이 운동이 발발된 직후에 제정된 것이다.

대정8년제령제7호는 3.1운동 참가자에 대하여 보안법 대신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총독부내 사법부 장관의 제언으로 제령을 작성한 뒤 도쿄의 법제국과 교섭하여 이것을 완성하였다.

이를 4월 15일에 ‘정치와 관한 범죄처벌의 건’으로 공포 시행하게 된 것이 이른바 대정8년제령제7호이다.(최고 2년형으로 제한되어 있는 기존의 보안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은 제1호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제2조 전조의 죄를 범한 자가 발각 전에 자수하였을 때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다만 내란죄에 해당하는 자는 제령제7호를 적용하지 않는다. 제3조 본령은 제국 밖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제국신민에게도 이를 적용한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50~152쪽). 내란죄를 적용한 시위는 48인 사건, 안성사건, 의주사건, 수안사건 등이었다. 이는 주재소를 습격 방화하거나 관공서를 파괴, 공문서기 집기류를 훼손한 행위, 일본인 상점을 부수거나 호적원부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였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155~156쪽)

3.1운동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은 총 7,816명 중에서 보안법 위반자가 5,601명으로 가장 많고 소요·출판법 276명, 제령제7호 위반자는 161명에 달하였다.

이교재의 경우 출판법과 제령제7호를 동시에 위반함으로써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인원수는 각각 74명과 13명이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4~146쪽)

출판법 위반의 내용은 독립선언서, 곧 허가받지 않은 문서의 작성과 출판에 관여했는지, 독립선언서를 교부, 반포했는지에 따라 6개월의 형량차가 있었다. 또한 이교재는 피검자의 6.2%에 해당하는 제령제7호로 처벌을 받았다.

제령 위반으로 2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이는 모두 13명인데, 그에 포함된 것이다.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시위를 계획한 이른바 ‘48인 사건’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이는 최남선과 이갑성 등 24명이다.

이들 중 최남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5~148쪽). 말하자면 48인도 보안법 제7조로 처벌을 받은데 비해 이교재와 그 일행은 3.1운동 이후에 만들어진 제령제7호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교재 일행이 진주에서 체포된 시기는 6월이었기 때문에 4월에 제정된 제령제7호를 적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 행위가 제령 제정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령제7호를 소급하여 적용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윤상태와 같은 국권회복단 멤버들도 대정 8년 7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피고’로 재판을 받았으므로(「윤상태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99권-삼일운동과 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p:/db.history.go.kr/id/hd_009_0040_0080_0140 참조) 이교재 일행만이 제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무거운 죄를 우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죄명과 형기는 진전면 소장의 범죄인명부와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명부에도 확정 일자는 대정 8년 9월 25일이지만, 대면 재판이라는 사실을 명기하였고, 거기에 죄명은 ‘출판법 위반’이었다. 아울러 형명과 형기는 징역 1년 3개월로 적혀 있다.(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교재항, 이 명부는 삼진독립운동사, 252쪽에도 게재되어 있다.) 

제령제7호 위반은 해당되지 않았고, 출판법으로만 징역형을 언도한 셈이다.

출판법 위반으로도 1년 3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것도 비교적 무거운 것이지만, 대구복심법원의 형기가 2년 6개월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년 3개월의 형량이 줄어든 것이다.

대구복심법원에서 결정한 판결내용과 범죄인명부의 그것이 다른 것은 궁금한 부분이지만, 출판법만 적용한 것은 다른 지역의 시위대와 달리 관청을 공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문서를 불태웠다거나 하는 등의 보안법 위반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병수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형을 받았으므로(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병수항 : 삼진독립운동사, 267쪽) 복심법원의 집행원부에서 보이는 제령제7호 위반은 잘못 적용된 법령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시 3.1운동 참가자에 대한 재판에서 법리상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변호인측에서 제기한 ‘공소불수리’, 곧 검찰이 독립운동가들을 제령제7호위반으로 공소한 것은 잘못이며 따라서 그들은 무죄라는 주장이었다.(「獨立宣言事件의 控訴公判 急轉直下로 事實審問에, 問題의 核心인 「公訴不受理」은 自歸水泡」, 동아일보, 1920년 9월 21일자)

결국 법원은 검찰의 공소가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기왕의 치안법이나 출판법을 적용하여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교재에게도 이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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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6.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문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선산김씨, 밀성박씨, 창녕조씨, 회산황씨 등이 각각의 문중에 서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동권씨가 운영하던 경행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진전면에는 일암리의 誠久祠 경내의 道山書堂(草溪卞氏 문중), 오서리 동대에 있는 景行齋(安東權氏 문중), 오서리 서대(회동이 맞음. 필자주)에 있는 龜川精舍(密城朴氏 문중), 오서리 탑동에 있는 西溪精舍(安東權氏 문중)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근곡리의 慕遠堂(善山金氏 문중), 평암리 미천의 棲巖亭(昌寧曺氏 문중), 임곡리의 石愚堂(檜山黃氏 문중) 등이 있었다(진전면지, 141쪽)

다만 이 서당들은 경행재에서 보듯이 대부분 문중의 재실과 서당을 병용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1867년 회동에 있는 회계서원의 支院으로 건축한 경행재는 1930년대의 조사에서도 안동권씨의 서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寫眞編 沿河部落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權氏部落」 참조)

현재 남아 있는 건물구조는 4칸 반에 들보 3량 건물로써 좌우에 방이 있고, 중앙은 대청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1910년에 신식의 경행학교가 문을 연 이후 교실로 개조하면서 본래의 모습은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건물 앞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어서 소규모의 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조선조 말기에 세워진 경행재의 서당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는 이교재 선생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권오봉의 사촌 동생으로 1905년에 태어난 권오익은 자전 속에서 6살 무렵부터 사숙, 곧 경행재에 다니면서 한문을 익혔으며 8세 때인 1913년 무렵에 소위 신학문으로 전환하여 낮에는 소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밤에는 한학을 습득하는 과중한 부담을 안았다는 것이다. (權五翼, 素波閑墨, 소파 권오익박사 환력기념논문집간행회, 1965, 94~98쪽)

적어도 1910년까지는 전통적인 서당이었으나 그 이후 신식학문을 도입하면서 당분간 2중식의 교육제도를 운영한 듯이 보인다. 서당 형태였던 경행재를 신식학교로 바꾼 이는 동대리 출신의 권오봉(1879~1959)으로 알려졌다.

약 300석 지기의 중농 집안 출신인 권오봉은 홀로 서울까지 걸어 올라가 고향 친구인 鄭祥煥(정상환은 1921년에 백산무역에 640주의 주식을 투자하였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권영조 참조)의 집에서 지내면서 1898년 2월에 김규식, 신민회 간부 李重華, 林珍洙가 교사로 있던 私立興化學校를 2년간 이수한 뒤 순회 연설, 격문 반포 혹은 학교교사 등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백산의 동지들, 부산일보사 기획출판국, 1998, 58쪽. 여기서 1898년이라고 한 것은 흥화학교가 그 해에 신문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고 자격과 개학일자 등을 공고한 것에 기반하여 이렇게 추정한 것은 아닐까 한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향토서울 55, 1999, 91쪽). 백산 안희제도 1906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했고, 처음 1년 정도 흥화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 권오봉과 안희제는 동문이었던 것이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어문논총 77-0호, 2018.12, 153쪽). 흥화학교의 교육과정과 변화 및 교사진에 대해서는 김형목, 「사립흥화학교(1898~1911)의 근대교육사상 위치」, 백산학보 50, 1998과 정영희, 「사립흥화학교에 관한 연구」, 실학사상연구 13, 1999도 참고된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제나 교사 재직 연도로 보아 1906년 무렵에 입학하여 졸업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재학 중 혹은 이수 직후라고 말해지는 1899년에 당시의 교사 중에는 이중화와 임진수가 보이지 않고 김규식의 이름도 없다. 김규식과 임진수가 교사로 있던 시기는 1906년 전후였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93~94쪽)

흥화학교의 교과와 운영, 지향하는 이념을 경험한 권오봉은 이러한 시스템을 경행재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는 1910년 10월에 사립경행학교를 창설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몇 년간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 6월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본다.

박정선은 1910년 10월에 설립은 했으나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보았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39~141쪽). 말하자면 비공인 사립학교로 출범하였지만, 몇 년 뒤에는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25년에는 6년제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1925년의 6년제 전환에 대해서는 「순회탐방(488) -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창설 초기에는 동대리 출신의 權寧祚(1883~1955) (「권영조씨 별세, 완월동 자택」, 마산일보 1955년 3월 13일자)와 고성 출신인 李鎭畿의 재정적 지원이 뒤따랐다.

특히 권영조는 “천신만고 끝에 校地 확장 및 학교림 조성 등 재정적 기초를 거의 독자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개교 이후 18년 동안 권오봉 선생이 교장을 맡았다. (이병철, 앞의 글, 58쪽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2001, 88~89쪽. 고성군 독지가 李鎭坰, 오덕군, 허종택, 이진기 등 4명은 자담으로 각처에 유학한 학생을 도왔으며, 또 이진기가 파송한 유학생 安太元에게는 매월 20원씩을 보내어 일본의 山口縣고등상업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 자택에는 배둔공립보통학교 학생 4명의 의식을 전부 담당하는 등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이었다(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자 및 1921년 4월 26일자 참조).

그러나 공립학교인 진전공립보통학교가 1927년에 설립되면서 경행학교도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통설상으로는 진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28년 8월 19일에도 이 학교의 운동장에서 개인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신문기사가 있었으므로,(「개인정구대회 -창원에서 개최」, 동아일보 1928년 8월 5일자) 실질적인 폐교는 그 이후인 1929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6쪽)

이런 추정은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 학교의 교사진으로서는 창립자인 권오봉과 권영조를 들 수 있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또한 권오익은 경행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폭군적 독재자 조(趙) 선생”, “권영길(權寧吉) 선생의 열혈교육”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5쪽) 적어도 4명의 교사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교재도 1923년 이전에 일제 경찰 당국에서 ‘전교원’으로 기술하였으므로, 1910년대에는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1914년 창설 당시 학생수는 120명이요, 校舍는 40평으로 신축하고 학교의 유지비는 지방 유지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6년제로 승격한 1925년에 11회째 배출한 졸업생이 2백 명에 달하였고, 그 중에서 국내외의 각 중등, 전문대학 유학생 수가 10명이며, 1927년의 학생수는 남녀 9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순회탐방(488)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1921년에 양촌리의 양전학교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경행학교 학생 약 150명과 양전학교 학생 약 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양교 연합대운동」, 동아일보, 1921년 10월 23일자). 1921년 당시에도 여전히 큰 규모의 학교였던 것이다.) 성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의 유지비도 앞서 말한 독지가 뿐만 아니라 문중에서 나오는 경비까지 포함되면서 校舍를 유치하고 학교를 운영하였으니 궁핍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렇다면 신식의 경행학교에서 운영되는 교과과정과 그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권오익의 회고에 따르면, 신식 사립소학교에서는 배일사상의 고취와 항전의식을 앙양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순국열사, 의사에 대한 선동적 강화와 당시로서는 금서였던 유년필독, 월남망국사 등의 애국서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상급반에서는 양계초의 조선망국사략을 부교재격으로 활용하였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이러한 학습용 교과와 달리 돌격연습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나무막대기를 들고 행한 이 연습에서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와 같은 감동가를 불렀으며, 결국 이런 정신이 골수에 사무쳐 인생항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1908년에 설립된 마산의 창신학교에서도 유사한 兵式체조를 실시하였다.(조호연편, 마산시체육사, 마산시, 2004, 29~31쪽) 항일정신의 함양에 필요한 교과와 그에 따르는 신체 훈련은 당시의 마산이나 창원 지역의 학교에서 많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경행재 전경에는 운동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 下編, 「寫眞編 書堂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東權氏書堂」 참조) 이런 곳이 체조나 돌격연습을 하는데 활용되었으리라고 본다.

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구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운동 부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 이후 마산이나 진전 지역의 사립학교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해 문무를 겸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립학교는 또한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거점이기도 하였다. 윤상태가 주도한 달성군의 덕산학교나 안희제의 龜明학교(구포), 宜新학교(의령), 창남학교(의령) 등이 이에 속한다.(이동언, 「안희제의 교육구국운동」, 국학연구 4, 2000, 40~62쪽)

이는 1907년 「교육윤음」이 내려진 이후 각 서원이 사립학교를 부설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는데, 경남에서는 1908년에 안희제, 이원식, 서상일 등 대동청년단과 국권회복단의 중심 인물들이 교남교육회를 창립하였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민족문화논총 9, 1988, 164~165쪽)

이런 맥락에서 보면 권오익을 중심으로 시작된 경행학교의 신식 교육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진행된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경행학교에서는 독립운동가나 교육자, 프로문학가와 영화 감독 등이 다수 배출되었다.(이는 함안 칠원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만세시위가 교회와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대비된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12, 105~106쪽)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교수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권오익(1905~1998), 영화 <암로>의 감독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월북한 강호(1908~1984) (이성철, 경남지역 영화사 -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 호밀밭, 2015, 31~76쪽), 권오봉의 아들이자 카프시인으로 활동한 권환(1903~ 1954), 동래고등여학교 초대교장 권영운, 고현시장 의거를 조직한 권오규(1895~1961)와 독립운동가 이교재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8쪽)

경행재와 경행학교에 대한 위와 같은 검토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와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의 서술에 어려움이 있다.

1887년생인 이교재는 어린 시절에 서당식의 경행재에서 유교경전 중심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권오익 선생이 6세 때 서당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므로 이교재 선생도 대략 그 나이 때에 경행재에 들어갔으리라고 본다.

1893년 이후의 시기에 해당된다. 언제 그가 이 서당 교육을 마무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오봉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임은 확실해 보인.(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9쪽)

또한 그가 24살이 되던 1910년에도 사립경행학교에 다녔는지는 역시 알기 어렵다.

변지섭에 따르면 이교재는 대한제국의 멸망 직후인 24세의 나이에 국권회복에 진력하고자 동지를 모집하였고, 1913년부터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하였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이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그렇다면 일제의 강제합병 직후에는 경행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기 보다는 이미 졸업하여 사회활동을 하는 신분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이교재는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에 이 학교의 교사로서 적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식민지 경찰의 사건일지식 기록(1923년 9월 21일)에 따르면 “前敎員 이교재가 임시정부의 밀명에 따라 국내로 잠입,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9쪽)

‘전교원’이라고 기술한 것은 적어도 경행재가 소학교로 전환한 다음에 그가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이것이 1923년 이전 어느 시점에 마무리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그가 경행학교에 재직하였을 시기는 1910년에서 1923년 직전까지일 터인데,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수감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이다. 곧 1910년 사립경행학교 설립 이후부터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으로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는 이러한 교육경력을 바탕으로 1920년 12월에 조직된 진전교육회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의 경력에서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한 진전교육회는 “지난해 1월에 창원군 진전면 유지 제씨의 발기로 교육진흥, 지식교환, 체육발달, 풍속 개정 등을 목적으로 면내에 거주하는 자로서 만 20세 이상의 남자에 한하여 진전교육회를 조직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울러 임원으로는 “會長 權五鳳, 副會長 卞舜燮, 總務 權五成, 學術部長 李鍾協, 矯風部將 權寧寔, 運動部長 權寧祚, 部員 李昌淳, 金晟洙, 姜德永, 卞相憲, 李基榮, 卞相述, 幹事 李敎載, 金聖漢, 卞又範, 會計員 權榮鎭 金敦洙, 書記 李玘宰, 評護員 金태鉉 외 12인”(「진전교육회 출범」, 동아일보, 1921년 5월 6일자)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목록에 진전교육회의 간사로서 이교재가 김성한, 변우범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허나 이 기록에는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1920년 12월에는 이교재가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진전면사무소에 소장되어 있는 범죄인 명부 ‘이교재’ 항의 「刑名 刑期」란에 ‘징역 1년 3월’로 기재되어 있음을 참작하면(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冊中 제1호, 18번, 이 자료를 찾아준 고성군 기록연구사 김상민 선생에게 감사한다.)육회 조직 당시에는 출옥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이 조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회의 멤버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을 살펴보면 이교재 선생의 인맥과 사회인식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권오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대 마을 안동권씨의 일원으로써 카프문학가로 이름이 높은 권환의 부친이었고, 인맥도 상당히 넓었던 것 같다.

그는 의령의 애국지사인 남저 이우식과 사돈관계였는데, 권오봉의 둘째 아들이 남저의 사위였다. 이우식은 대종교도였는데, 권오봉도 대종교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권환의 휘문고보 학생학적부의 ‘가정 혹 본인신앙’에 ‘대종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장렬, 권환 문학 연구, 경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0쪽)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대종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교재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동대 마을의 ‘진사골목’이라고 부르는 동네 길에서 이교재와 이웃하여 살았던 권오봉은 또한 1919년 4월 3일에 거행된 삼진독립의거 때 진전면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록 1920년 지방관서>경상남도>부군도>창원군) 이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성금을 갹출하는데 앞장섰다.

권오봉은 1920년 무렵에 진전에 설립된 오정 야학의 학장으로, 또 1923년에 소작농 수천명을 망라해 결성된 삼진노동공제회의 간부로, 오서부업장려회 회장이자 삼진농민조합에서는 제3부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는 등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9~150쪽)

교육회의 운동부장 권영조는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진동면 고현의거에서 이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마산감옥에서 1년간 수형생활을 한 적이 있고, 경행학교의 교사로도 재직하였다. 교육회의 부원인 변상헌과 변상술은 4.3의거를 주도한 죄명으로 1년간 복역하였으며, 일암리 출신의 변우범(1898-1974) 역시 4.3의거 때의 주동자로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변우범 참조) 곧 1919년의 삼진만세시위 당시 주도했던 인물들이 교육회의 핵심 멤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물 구성의 특징은 삼진지역의 명족이라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성주이씨, 선산김씨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진의거의 특징 중 하나가 각지에 세거하고 있던 이들 명족이 연대하였다는 사실인,(이종흡 외, 「4.3 삼진의거 연구」, 가라문화 21·22, 2009, 106~107쪽. 이러한 양상은 합천에서도 유사하였다. 예컨대 3월 23일의 삼가 시위는 군내의 가회, 삼가, 백산면 등이 중심이었고, 지역 내의 지주와 유지, 자산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11, 247~248쪽) 이로써 우리는 교육회 역시 명족과 애국심이 결합되어 조직된 지역사회의 교육운동체이며 여기에 이교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교재는 1919년 전후에 지역사회에서 교육과 애국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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