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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9. 00:00

옛날 사진 속에서 '마산노동병원'을 찾았다

2021년 1월 19일 페이스북에 흥미로운 글이 하나 떴다. 창원지역에서 기록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박영주 선생의 글이었다. 1950년대 설립된 마산노동병원을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반가운 일이라 포스팅한다.

 

옛날 사진 속에서 '마산노동병원'을 찾았다.

며칠 전 마산의 한 고등학교의 1960년대 초반의 졸업앨범 한 권을 (자료수집용으로) 샀다. 앨범을 살펴보는데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사진 크기가 너무 작아 확대해서 보니 '노동의원'이라고 세로로 쓴 한글 간판이 선명하다. (표시 부분)

 

 

노동의원!

중앙동 1가에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궁금해했었던 바로 그 '마산노동병원'인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이 사진은 1962년 5월 16일, '5.16혁명 1주년'을 맞아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으로 위치는 현재의 통술거리 일대이다.

이날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기념식이 펼쳐졌는데 마산에서도 중앙부두 앞 광장에 학생과 공무원, 시민 등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을 마친 참석자들은 신마산 일대를 돌아 마산시청 앞에 설치된 사열대 앞을 지나 구마산 방면으로 군대식 시가행진을 했다.

이들이 학생 브라스밴드를 앞세워 저 '노동의원' 앞을 지나갈 때 그 병원의 실질적 설립자인 마산부두노조 위원장 노현섭은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당시 마산노동병원, 노동병원, 노동의원 등으로 불리던 이 병원은 마산부두노조에서 1957년에 부설 기관으로 설립한 병원이었다.

당시 부두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힘든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더구나 각종 재해와 질병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병원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대두되었고 마산부두노조에서는 이미 1954년부터 설립을 추진했지만 당시 여건상 쉽지 않았다.

마산부두노조 위원장 노현섭은 지역 내 의사들의 동참과 각계의 후원과 협조를 끌어내 1957년 8월 노동병원의 개원을 실현하게 된다. 그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마산노동병원은 조합원과 그 가족, 영세시민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한 명의 의사들이 당번을 맡아 진료하고 치료비는 최저 실비만 받았다.

노동자들을 위한 병원 설립은 일제강점기부터 추진되었는데 특히 1928년 설립된 원산노동병원이 유명했다.

마산에서도 병원 설립은 아니지만 노동자의 보건 향상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1923년 마산노농동우회는 '무산계급'을 위해 삼성의원 학산의원 등 5개 의원을 섭외하여 이들 병원에서는 노동자에게 무료 진찰을 해주고 약값은 반으로 할인해 주게 하였다.

또 1930년 마산자유노동조합에서는 시내 6개 의원과 교섭하여 극빈 조합원들에게 무료치료권을 배부하여 화류병을 제외한 병의 무료치료를 해주기도 했다.

해방 이후 마산노동병원이 설립된 시기를 전후로 하여 목포, 화순, 대전, 부산 등지에도 노동병원이 세워졌다. 한편 마산부두노조에서는 노동자 결핵요양소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추진에 나서기도 했다.

마산노동병원의 운영은 매우 어려웠다. 노현섭 위원장은 "우리(노동자)의 병원은 우리(노조)의 힘으로 세워야 하고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전임의사를 확보하기 어려운 재정 상황에서 시내 의사들의 희생적인 협조로 근근이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병원이 설립된 지 채 4년이 지나지 않은 1961년 5.16쿠데타 이틀 뒤 노현섭은 육군 방첩대에 전격 체포되었다.

노현섭은 마산부두노조 위원장으로서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섰을 뿐 아니라 마산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마산씨름협회 회장을 맡는 등 지역사회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4월혁명 후에는 교원노조 활동을 지원하고 '양민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피학살자유족회를 이끌고 있었다. 박정희 쿠데타세력은 혁신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노현섭은 '혁명재판부'로부터 징역 15년의 중형을 언도받게 된다.

마산노동병원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노현섭 위원장의 수감 이후 병원은 운영난으로 인건비 염출에도 애로를 겪게 된다.

마산부두노조는 노동병원의 시설을 확충하고 사단법인화를 통해 운영난을 타개하려고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원장이 바뀌면서 병원은 이어져 갔지만 운영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5년 말 이후 병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모른다. 더 자료를 찾아보고 해야 하지만... 누군가 마산노동병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충분히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마산노동병원은 노동자와 노동단체의 힘으로 의료인과 연대해 노동복지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흔치 않은 사례이다.

어쩔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극빈 노무자'들의 '의료후생'을 위한 그들의 노력은 소중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 혹시 노현섭 선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그의 평전인 "불세출의 혁명가 소담 노현섭"(홍중조 이상용 저, 2016.)을 보시길 바람.

추가 ; 아래 사진은 마산일보 1965년 10월 29일자 3면에 실린 '노동병원을 확장-보사부장관 지정으로' 기사에 실린 것입니다. 위 박영주 선생이 발견한 사진과  '노동의원'이라는 간판이 똑 같습니다. 두 사진과 주변 건물들을 보면 병원 위치는 현재의 '홍시통술(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앙동 1가 11-1)'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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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2.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7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10) "진짜 본토박이" ------------------------- 배○○

1941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04-2

날짜 : 2015년 1월 16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얘기부터 기억나시는대로 좀 해 주시지요.

= 바로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자랐지요. 6.25전쟁이 났을 때 내가 아홉 살 먹었는데 진해 웅천으로 피난을 갔거든요. 회원국민학교 입학 하고는 바로 피난을 갔어요.

거기로 피난 갔다가 석달만에 돌아왔어요. 그때는 여기가 전부 초가집이고 완전히 농촌이었지요. 농사 짓고 닭 키우고 소 키우고 완전히 농촌이었지요.

그래 기억나는 게... 군인들이 논에 엎드려 숨어 있고... 우리가 수류탄도 줍고 그랬거든요. 무엇인가 싶어서 주워보면 조그마한 단지처럼 생겼는데 그걸 도랑에 돌멩이 사이에 끼워놓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때 여기 미군들이 많았어요. 처녀들은 밖으로 못댕겼어요. 미군들이 건딜려고 해서... 그래서 우리 언니들도 막 숨겨놓고 그랬어요.

- 어릴 때 여기 사실 때는 이 동네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저 위 골짜기에도 마을이 있었지요?

= 여기는 그냥 회원동이라고 했어요. 저 앤지밭골 골짜기 거기는 전부 농촌이고 사는 사람도 스무남 집 정도 될까? 사람이 많이 안살았어요. 앤지밭골은 우리 아주 조그만 할 때부터 앤지밭골이라 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네요. 앤지밭골에서 내려오다 보면 중간에 못이 있었거든요.

그 주변이 다 논인데 논 중간에 언덕이 있고 그 옆에 못이 있었는데 애 하나가 빠져죽고 난 뒤 그 못을 없앴버렸어요. 그게 언젠지 모르겠는데... 거기서 조금더 내려오면 거기가 못산이거든요. 그런데 못이 가운데 있으니까 못산인가 싶기도 하네요. 옛날에 못산쌀가게가 있었는데 없어진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앤지밭골 밑 동네가 못산마을이고 그 다음이 우리 마을인데 이 마을은 그냥 회원동이라 했어요. 사람은 못산에 많이 살았고 앤지밭골에는 별로 많이 안살았어요.

- 지금 이 동네 안에서 제일 오래된 집은 어느 집입니까? 옛날에는 다 초가집이었지요?

= 주변이 다 논밭이고 집들은 다 초가집인데 어쩌다가 기와집 하나 있고... 초가가 점점 없어지고 쓰레트로 바뀌었다가 쓰레트 없어지고 슬라브 올리고 그랬어요.

우리 이 집도 옛날에 조그만 기와집이었어요. 지금 집들이 다 오래됐지요. 아직도 집이 옛날 그대로이지요. 요 앞에 골목도 옛날 그대로고 입니다. 내나 우리 쪼깬을 때 그 골목이고... 집도 다 농사 지어 묵던 집 그대로 이지요. 조금씩 수리해서 살다가 재개발 한다는 소리 듣고 수리도 안하고 그대로 살다보니 옛날 그 집 그대로 입니다.

물새는 집도 있고... 얄굿습니다. 요 밑에 골목으로 조금 가면 옛날에 풍수하던 사람 집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씨라서 이풍수라고 불렀어요. 사람도 죽고 다 어디로 가버리고 지금은 빈집입니다.

또 그 골목 끝에 돌깨는 돌쟁이 집이 있었는데 집도 뜯겨나가고 빈터 뿐입니다. 옛날에 이 동네에는 송씨, 허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다 어디로 가고 없어요.

- 앞에 이 골목이 거의 동네 한가운데 있는데 옛날에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내나 골목이지요. 우에 골목, 아래 골목... 어른들이 그리 부르대요. 여기 우리 집 있는 데는 아래골목이고, 우에 골목은 연탄집 위에 있는 거기가 우에 골목이고... 그리고 동네 골목, 여기가 또랑인데 지금은 복개를 안보이지만 개울이지요.

지금은 다 덮어놔서 안보이지만 또랑 따라서 공동새미가 졸졸하이 네 개나 있었어요.

- 그럼 지금 회원천이라 부르는 저 하천은 어릴 때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큰또랑이라고 했지요. 우리 동네 여기는 작은 또랑이라고 하고... 작은 또랑은 지금 복개를 해서 덮어놨지만 지금도 그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요.

옛날에 우리가 빨래 하러 큰또랑 갔다 아닙니까. 큰또랑 가면 물이 펑펑 내려오니까 거기 앉아서 빨래 하고 그랬지요.

- 예. 물이 깨끗했겠네요?

= 옛날에는 앤지밭골에 마을이 있어도 더러운 거는 논으로 다 갔지 또랑으로 꾸중물 내려오고 그런 거는 없었거든요.

물이 맑았어요. 무학산 물이 참 좋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해요. 똥물보다 더 더러워서... 비 좀 왔다 하면 다리가 떠내려 갈 정도로 여기에 물이 많았어요.

물이 깨끗할 때는 송사리 같은 조그만 물고기도 있었고 가재도 있었고 고동도 있었어요. 새까맣고 쪼깬 고동... 삶아서 꼬리 끊어 빨아 먹던 그 고동도 있었는데...

- 그러면 서원골 쪽으로는 빨래 하러 안갔습니까?

= 갔지요. 거기 가면 나무 주워와서 불 피우고... 옛날에는 다 알미늄 니무 대아거든요. 그 대야로 빨래 삶아 가지고 깨끗하게 빨아서 큰 바우에 널어놓고 냄비에다가 밥 해 먹고 놀고... 그랬다 아닙니까.

하하 재미 있었지요. 여기 큰또랑은 빨래를 해도 빨래 널 큰 바우 같은 게 없거든요. 거기는 우리가 놀기삼아 어불리서 갔다 아닙니까. 하하 그때가 좋았어요.

- 또랑 건너 둥구나무(아래 사진) 있는 데는 옛날에는 어땠습니까?

= 우리 쪼매할 때부터 있던 정지나무가 지금까지 있는 겁니다. 정지나무 원 둥치는 죽고 옆 가지가 살아있거든요. 누구든지 회원동 정지나무라 하면 다 찾아왔어요. 택시도 알고 전부가 다 알았어요.

어릴 때 보면 큰 정지나무가 있는데 노인네들이 거기 누워자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또 옛날 노인네들이 거기서 제 지내고 그랬거든요. 깨끗한 사람이 제를 지내야 되거든요.

부정 타면 안된다고 상주도 못보고 아무도 못봐요. 그런데 지금은 제도 없고... 옛날 노인들 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술꾼들, 노름쟁이들만 모이쌌대요.

- 아, 거기서 제를, 그러니까 동제를 지냈다고요? 그럼 동제를 언제 지냈습니까? 정월에?

= 그때가 우리 처녀 시절인데... 그때가... 정월에 안지내고 가을이든가? 춥도 덥도 안할 때니까 가을입니다.

정월하고 팔월에는 안했어요. 동네에서 그 나무가 전통있는 나무라고 해서 거기다 오만 거 다 차려놓고...

 

 

- 제를 아주 크게 지냈던 모양이죠? 언제까지 제를 지냈습니까?

= 옛날 노인네들이 크게 지냈지요. 상주거나 추접은 사람은 부정탄다고 거기에 못가고... 회원 마을 사람은 다 모였으니까 큰 행사였지요.

떡도 하고 돼지도 잡아서 동네에 다 갈라먹고 그랬어요. 건구도 치고... 제 안지낸지가 삼십년도 넘었것 같네요. 내가 의령으로 시집 갔다가 보리 숭년지고 난 뒤 여기로 다시 이사를 왔는데 그때까지도 제를 지내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열아홉살에 시집을 의령으로 갔다가 스물두살에 여기 내려왔어요. 신랑은 군에 가버리고 아들 하나 낳아가지고 보리숭년이 져서 여기 내려왔는데 그때까지 제를 지내더라고요.

내가 스물세살까지... 지금 내가 칠십네 살이니까 한 사십일 년이나 이 년 되는가 보네요. 노인들이 차차 돌아가시니까 누가 할 겁니까? 할 사람이 없는데... 옛날 노인들이 돌아가시고 나니 할 사람이 없어요.

- 당시에 이 마을에는 사람이 얼마나 살았습니까?

= 어릴 때 이 동네에는 많이 살았지요. 또랑 건너 하고 합하면 한 백 집?

이 동네만 해도 지금 있는 것만 백 집 되지요. 회원동 마을이 크거든요. 저 건너편에는 일본놈 말 키우는 창고가 있었는데 거기가 새한아파트 됐어요.

- 거기 창고는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 소 키우는 것처럼 일본놈들 말을 쭉 매어놓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말 지켜주고 말 밥 먹여주고 그랬다고 하대요. 그 한참 뒤에 말 창고 뜯은 그 자리에 새한아파트가 들어섰어요.

- 이 동네에 당시에 절은 없었습니까?

= 우리 쪼맨할 때는 돌산이라 하는 데에... 돌산이 교방동에 들어가는데, 저 위에 육일약국 있지요? 그 건너편부터 주공아파트 그 위로는 돌산이라 했어요. 돌이 많다고 돌산이라 했어요.

그 돌산에 절이 하나 있었어요. 지금까지 있는데 절 이름이 잘 생각이 안나네요. 옛날에는 절에 간다 하면 돌산 절에 가고 그랬지요.

- 옛날에는 동네마다 조그만 공장이 많았지 않습니까?

= 또랑가 둥구나무 밑 쪽에 작은 장갑 공장이 있었고 또 바로 밑 교원동에 우피 공장이 있었어요. 소가죽을 벗겨서 그 껍데기를 고아가지고 부리풀 만들었어요.

그걸 부리풀이라 하든데 그게 고무신 만드는 공장에도 가고 또 어디에도 가고... 그걸 또 녹여서...

- 그러니까 부리풀은 아교를 말하는 거군요? 접착제로 쓴 거지요?

= 소가죽을 가져오면 그 속살은 삶아먹기도 하고 그랬지요.

제비산 밑에 도치막이 있었어요. 또 우리 동네에 정미소는 또랑가 정자나무 밑에 있었어요. 우리 처녀 땐데 거기 하던 사람이 배씨라서 배씨 정미소라 그랬어요.

둥구나무 바로 밑에 다리 딱 건너면 거기 있었는데... 그럴 때 미군들이 많았어요.

- 그럼 그 당시가 전쟁 때이군요. 정미소, 장갑공장, 우피공장...

= 그리고 방장 공장이 있었어요. 요 앞에 작은 또랑 건너가 교원동인데 거기에 있었지요.

그때 우리가 열여섯 살, 열일곱 살 먹었을 처녀 시절인데, 거기서 방장도 만들고 마스크, 손수건도 만들고 이랬어요. 그 공장 했던 사장이 이만열이란 사람입니다.

또 그때는 일본 있다 나온 사람들이 요꼬를 많이 하대요. 우리 집에서도 방을 세 놓으니까 그 작은 방 사람이 요꼬를 짜더라고요. 그때 가정집에서도 기계 하나 가지고 요꼬 짜고 많이 그랬어요.

- 옛날에 이 근방에서 국화도 많이 키웠지요?

= 하우스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리고 저 위에 무학농장이라고 있었는데 포도, 배, 복숭 이런 거 하던 농장인데 마산에서 최고로 큰 농장이었지요. 과일나무가 있고 그 농장 안에 여관도 있고 하니까 사람들이 놀러 많이 갔지요.

해치 하면 농장 안에 가서 하고... 그 농장 주인이 말을 타고 내려오면 동네가 딸깍딸깍 했구마는...

- 농장 주인 성씨가 뭐였습니까?

= 천씨였는데 회원동에서 최고로 부자였어요. 농장에서 말 타고 내려오면 동네가 들썩들썩 했지요.

영감쟁이가 멋이 있었는데... 그 뒤에 한일합섬에서 사서 소도 키우고 짐승도 키우고 그러다가 한일합섬에서 또 어디 팔았다고 하던데... 몇손을 넘어간 모양이더라고요.

- 그럼 무학농장은 언제 생긴 것 같습니까?

= 우리 쪼맨 했을 때도 있었으니까 오래 됐을 거예요.

우리 오빠가 살아 계시면 팔십네 살인데 오빠가 그 농장에 댕기고 할 때 우리가 쪼맨했으니까요. 농장이 한 마을을 다 차지해 있을 정도로 큽니다. 지금도 젖소 키우고, 오리 식당, 닭백숙 식당도 있고 그렇습니다.

- 어릴 때는 밑에 시장이 없었겠네요?

= 옛날에는 시장 한번 가려면 부림시장까지 가야 되는데, 다라이 이고 갔다오면 멀었지요. 그전에는 회원동 전체에 시장이 없었어요. 시장이라고는 부림시장 밖에 없었지요.

어시장은 멀다고 잘 안가고... 북마산역 앞에 쌀장사들이 좀 있었고 그 건너편에 소전걸이 있었고... 한참 뒤에 북마산 중앙시장 들어서고 또 철길 있는 데도 시장이 생겼는데 장사가 최고 잘 된단다고 그래요.

부림시장은 죽었는데 여기는 아파트 들어오고 사람이 많이 끓으니까요.

- 그리고 이 동네는 큰 부자집이 있다든지 그런 것도 없이 다 비슷한 형편이었던 모양입니다.

= 우리 어릴 때야 다 농사 짓고 사니까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이 부자인데... 비슷비슷 했지요.

그중에서 좀 많이 지은 집이 송씨 집이었어요. 큰 집, 작은 집, 졸졸하이 집을 지어 살았는데 송씨 부자집이라 했거든요.

- 그러면 그 송씨들이 지금도 살고 있습니까?

= 옛날에 좀 부자로 살면 애들이 대학까지 나와서 다 서울로 어디로 가버리니까... 집 팔고 터값만 받아먹고 다 떠났지요. 옛날 부모들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 그럼 이 동네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집은 어느 집입니까? 동네는 얼마나 오래 됐다고 들었습니까?

= 얼마나 오래 됐는지 모르지요. 내 알기만 해도 백 년이 넘는데 몇백년 됐는지는 알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삼대 사대 그렇게 오래 산 집은 없어요. 옛날 사람들은 전부다 동네 떠나고 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 옛날 농사 짓던 헌집을 사서 들어온 사람들이지요. 이 동네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이... 나 하고 바로 이 밑에 사는 내 친구, 이미숙이라고 있는데 그 친구도 토백이입니다.

바로 옆에 살아도 동으로는 그 친구는 교원동이고 나는 회원동입니다. 그리고 노원호 씨라고 내하고 두 살 차이인데 동네서 같이 자란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나 하고 내 친구 하나 하고 세 사람이 토백이이네요. 나머지는 전부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뭐 말 한마디 하면, 토백이값한다, 이럽니다. 하하하.

이 동네 완전 본토박이는 세 사람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사 가고 없어요.

- 예. 말그대로 진짜 본토백이군요. 그러면 부모님들은 뭘 하셨습니까?

= 내나 농사 지었죠. 우리 아버지 고향은 밀양이고 분성 배씨인데 우리 어머니는 진양 강씨이고요.

우리 형제가 오빠가 다섯 명이고 내 위로 언니 다섯 명, 내 밑에 여동생 남동생 있제 하니까 열 명도 넘었어요. 옛날에는 생기는대로 낳으니까 열 명도 넘었는데 인자 다 돌아가시고, 언니 하나, 내 밑에 동생 둘 뿐입니다.

- 이 동네서 나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데 재개발 한다니까 마음이 어떠십니까?

= 재개발 되면 어쩌겠어요. 돈 쪼매 내주면 가도오도 못할 건데... 요새는 일억오천은 줘야 조그만 집이라도 산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재개발 되면 전부 촌에 터 사서 집 지어서 간다고 하고, 여기 아파트 들어와 살 사람이 거의 없어요.

지금 여기는 전부 늙은 사람 뿐이지 젊은 사람 없거든요. 젊은 사람은 다 나가 있고 나이 많은 사람들 밖이거든요. 지금 우리 동네 이 근처에 집이 일곱 채가 비어 있어요.

터 값만 삼천만 원 받은 집도 있고 사천만 원, 육천만 원 받은 집도 있지만 빙돌아 다 비어 있습니다. 덕방 하는 사람들이 사가지고 아파트 들어서면 팔려고 하다가 팔년이나 구년이나 썩히고 있는 데도 있어요.

재개발 되면 할 수 없지. 어디로 가게 될런가, 어찌 될런가... 앤지밭골로 가 터를 좀 사서 집 지으려고 해도 터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엄두도 내기 힘들어요.

앤지밭골이 큰 도시가 됐어요. 옛날에는 앤지밭골이 골짜기였는데 지금은 절이 두 개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양옥집을 지어 놓고 잘 돼어 있더라고요. 거기는 공기 좋고 물도 좋고 해서 살아보고 싶은 곳인데 잘 될런가 모르겠어요.<<<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모두 27회 포스팅했다. 이 편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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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 2021.04.06 16:39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푹 빠져서 27편까지 내리 봤네요^^
    제가 사는곳의 역사를 읽으니 너무 흥미롭고 재밋었습니다~~

  2. 허정도 2021.04.07 13:56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 분이시군요, 방문 감사합니다~~

2021. 3. 15. 00:00

창원 민주화 역사 담은 창작연극 ‘도시의 얼굴들’

이 글은 <문화뉴스> 노예진 기자의 2021년 3월 5일 기사입니다.

 

2월 28일 성황리에 막을 내리다

강제규 감독 “코로나 이길 희망으로 기억되길”

 

창원시의 역사적 배경을 담은 창작연극 ’도시의 얼굴들’이 2월 28일 막을 내렸다.

 

<사진 - 창원문화재단 제공>

 

2019 한국지역출판대상 천인독자상 대상을 수상한 허정도 건축가의 동명의 도서를 원작으로 민주화 투쟁의 중심 창원의 역사 속 인물들이 암울했던 시기 작은 희망을 품고 포기하지 않은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감독이자 창원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강제규 대표가 총괄프로듀서로 제작에 참여했다.

1909년 구한말 순종의 순행, 1919년 3.1운동, 1929년 마산의 노동야학, 1949년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의 삶, 1960년 3.15의거, 1979년 부마항쟁까지 70년의 역사를 담아 마산이 독립지사들뿐 아니라 저명한 문학가들이 터를 닦은 곳임을 보여주었다.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은 ‘창원의 역사와 시민성, 정신을 잘 살린 작품이다. 깊은 역사를 가진 마산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의 마지막 장면인 3.15 의거탑 앞에서의 대사가 너무 뭉클하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평범하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작품이다.’ 등 작품에 찬사를 남겼다.

창원문화재단은 “준비과정부터 공연 진행까지, 걱정과 설렘이 가득했는데, 벌써 공연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라며, “우리 공연을 사랑해주신 관객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우리와 함께 이 작품을 기억하고 추억 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강제규 감독은 ‘역사와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항거하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이 연극이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민주화 투쟁의 중심 창원의 역사 속 인물들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연극’도시의 얼굴들’은 2월 18일 부터 성산아트홀에서 공연되었으며,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전하며 2월 28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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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8.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6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9) "서민들 살기 좋은 동네" ------------------------- 심○○

1943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8-6

날짜 : 2015년 1월 10일

장소 : 자택

 

- 이 동네 사정을 제일 잘 아신다고 해서 찾아 왔습니다.

= 그런데 이 동네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온 지 얼추 한 사십 년 되어 가는데, 뭐 유물이 있다든지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 재개발을 하게 되면 동네가 다 헐리게 되고 그러면 동네 흔적이 다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동네 전경도 사진으로 남기고 또 여기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동네 옛날 모습 그러니까 어디에 국화밭이 있었고 미나리꽝이 있었고 조그만 공장이 있었다고 하는 그런 옛날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는 겁니다.

= 그런 걸 확실히 알려고 하면 토백이 한테 들어야 됩니다.

바로 위에 노씨라고 나이 많은 분이 있거든요. 그 분이 여기 본토백이인데 지금은 말을 잘 못합니다. 이 앞에 연탄집 옆에 이층 집 안있습디까? 그 사람도 고 사장이라고 제일 토백이입니다.

그리고 저 앞에 이층집 조사장도 좀 오래된 집입니다. 우리는 들어온 사람인데 한 삼십오륙 년 되는 것 같습니다. 연탄집은 박씨라고 우리하고 비슷한 때에 들어왔어요.

- 그때 이미 동네가 집들이 다 들어서 있었겠네요?

= 그렇지요. 우리 집 옥상에 올라가면 동네가 싹 다 보입니다. 우리 집이 제일 높으니까 거기서 보면 구동네하고 새동네가 딱 표가 납니다.

새동네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구동네는 옛날 집 그대입니다. 옛날 우리 살던 그대로 입니다. 이 소방도로 난 것 하고 가원빌라, 성심주택 들어선 것 말고는 다 그대로 입니다.

- 여기 오셨을 때 근처에 국화밭은 없었습니까?

= 성심주택에서 골목으로 쭉 나가면 저쪽으로 국화밭이 있었는데 그리 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도 국화밭인데 노씨가 했어요. 그 지하수를 내가 팠습니다. 성심주택도 지하수를 내가 팠고요. 이 위에는 또 미나리꽝이 있었습니다.

- 지하수를 파셨으면 이 동네 많이 다니셨겠네요?

= 그렇지요. 내가 지하수를 파니까 이 동네뿐 아이라, 창원 함안 마산시내 골목골목 다 댕깄습니다.

- 이 동네는 물이 잘 나왔습니까? 예전에 이 동네는 지하수 파면 어느 정도 깊이까지 파야 물이 나왔습니까?

= 예 잘 나왔지요. 물도 좋았어요. 지금 우리 집도 수도가 없고 전부 지하수를 씁니다.

이 동네는 깊이 안팝니다. 옛날에 돈도 없고 하니까 많이 파면 삼십이나 삼십오 미터, 사십 미터 정도밖에 안팠어요. 암석까지만 팝니다. 암석도 오륙 미터까지 밖에 안팝니다. 백 미터까지 내려가는 그런 깊은 데는 큰 기계로 파거든요. 이 위에 있는 태양탕이나 그런 목욕탕 같은 데는 좀 깊이 팠을까 다른 데는 깊이 파지 않습니다.

일반 가정집인데 뭐 몇백만 원 주고 팝니까? 그 당시는 오십만 원, 육십만 원 많이 주면 백만 원이고 그랬어요. 요새는 백만 원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큰 돈입니다.

이삼십 년 전에는 파는데 이십만 원, 삼십만 원 밖에 안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하도 파니까 물이 말라버리는 겁니다. 그래 다시 팔 때는 백만 원, 백오십만 원도 받고 그랬어요.

여기 지하수는 풍부합니다. 아무 데나 파도 가정집 물은 충분합니다. 여기 땅이 마사 땅이거든요. 마사는 전체가 물을 딱 머금고 있어요. 그러니까 높은 고지대가 아니고서는 물이 짝 있기 때문에 파면 다 물이 나옵니다.

- 교원동 교방동 회원동 이 일대는 땅밑이 마사토란 말이지요?

= 그렇죠. 위쪽은 돌과 황토가 섞여 있지만 한 육칠 미터 밑에는대부분 마사토입니다. 위쪽은 돌이 많으니까 파기가 좀 힘들지만 조금 내려가면 마사토니까 잘 파집니다.

- 지하수 파는 기계를 뭐라고 부릅니까? 지하수 일은 얼마나 하셨습니까?

= 그냥 보링기라고 합니다. 내가 이 동네 사니까, 다는 아니겠지만 이 동네 지하수를 삼분지 일은 내가 판 거 같아요. 하하. 한 이십오 년 넘게 했습니다. 지하수 안한 지도 삼십 년 거의 돼 가요.

- 옛날에 지하수를 마음대로 팔 수 있었습니까?

= 좀 늦게 되어서야 지질조사니 수질검사니 했지만 그때는 수질검사고 뭐고 어딨습니까? 그때는 물만 나오면 됐어요. 요새는 환경영향평가도 해야 하고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때는 무조건 바로 파면 됐습니다.

그 당시는 수도가 제대로 없었거든요. 있어도 아무래도 물이 안좋고 부족하고 하니까 지하수를 파거나 그랬지요.

- 또 우물물 길러 먹고 그랬지요. 지금도 이 동네에 새미가 있지요?

= 그렇지요. 이 위에 올라가면 샘이 있었고 이 아래 내려가면 거기에도 우물이 하나 있었어요.

또 옛날에 우리 집 밑에도 공동샘이 하나 있었는데 이 집을 새로 지으면서 막혀버렸지요.

- 오셨을 때 공장 같은 거는 없었습니까?

= 이 밑에 가구 공장이 있었어요. 지금 고물상 자리가 가구 공장이었어요.

그리고 또 오래 된 게, 공장은 아니지만, 지금 어린이집 하는 거기가 남일목욕탕 자리인데 옛날에는 목욕탕이 거기밖에 없었지요. 남일목욕탕은 헐렸고 가구 공장도 없어진지는 오래 됐죠.

북마산 가구거리 생기던 즈음에 없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가구 공장 옆에 우피 공장도 한 데 붙어 있었어요.

또 무학상가 자리에 요꼬공장이 있었는데 쓰레트로 허름하게 지어져 있다가 우리 오고 나서 그 자리에 무학상가 지었습니다. 이 위로는 다 주택이고 밭이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저 회원파출소 위로는 옛날에 전부 국화밭이었어요. 그리고 저 건너 회원동 쪽에는 왜정시대에 말 키우던 데라고 하대요(아래 사진의 중앙 상부 음영 짙은 세 건물). 또 천막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 자리에 새한아파트 세 동이 들어서 있습니다.

 

 

- 비가 많이 와서 큰 수해를 입은 적은 없습니까?

= 그때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하천변에 큰 피해가 난 적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밑에 집에 세들어 살았거든요. 그때 집 안으로 막 물이 들어와서 피해를 많이 봤죠. 그때 도랑가 옆으로 전부 집을 새로 다 지었어요.

이 밑에 도랑가 이층집은 거의 그 이후에 새로 지은 거라 보면 됩니다. 저쪽 서원골 의신여중 밑으로는 완전히 쓸어버렸고 여기는 이 밑에 남일목욕탕 그 주위로 피해를 많이 봤지요.

이 앞에 이 골목이 지금은 복개 했지만 옛날 도랑입니다. 옛날에는 큰 비만 이 도랑이 넘쳐 흘러서 주변이 엉망이었어요. 저 큰도랑 있고 여기 작은 도랑밖에 없었거든요.

- 그럼 여기 작은 도랑은 복개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 복개한 지가 이십년 넘게 됐을 겁니다. 지금은 비가 아무리 와도 큰 피해는 없지요.

- 조금 위에 수재민 주택이라기도 하고 공영주택이라고 하는 데 있잖아요?

= 수재민 주택은 저 위 앤지밭골에 있고 여기는 회원주택이라 하대요.

그리고 또 주공아파트 새로 지은 거기도 수재민 주택이 있었던 같습니다. 여기 무학자이 그 자리에도 수재민 주택이 있었어요. 쓰레트로 쫙 지어가지고...

- 그럼 여기 오시기 전에는 어디 사셨습니까?

= 봉덕에 살았지요. 원래 고향은 함안 여항입니다.

지금은 진전면이지만 옛날에는 함안군이었어요. 함안군 여항면인데 저쪽은 산동이고 이쪽은 산서인데 산서는 진전면으로 붙어버린 겁니다.

- 바로 이 밑에 길가에 보니까 점집이 하나 있는데 갓데미산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함안 분인가? 생각했습니다. 여항산을 갓데미산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 맞습니다. 둔덕 위에 그 산을 갓데미산이라하지요. 그걸 따다가 이름 붙였을 수도 있겠네요.

- 이 동네 오래 사셨는데 살기가 어땠습니까? 도 조금 있으면 재개발 될 거 아닙니까?

= 살기 좋습니다. 시장 가깝고 해서 없는 사람들 살기가 좋습니다. 또 이 집은 양지라서 볕이 들어서 따시고 사는데는 아무 불편이 없어요. 조금 있으면 우리 집에 볕이 여기까지 들어 옵니다. 볕이 잘 들어와요.

이 집 지은 지가 한 십칠팔 년 되겠네요. 우리가 살려고 지었거든요. 설계도 우리가 했고 공사를 떼내어 줬는데 그때 돈으로 평당에 이백이십 만원씩 주고 지었어요.

사실 우리는 재개발을 안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될 거고... 지금은 돈이 안드는데 관리비니 뭐시니 달달이 돈이 들 거고... 되도 그만 안되도 그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돈 싸게 주면 안 할끼고 비싸게 주면 할 거고요. 하하하.

- 어떤 사람들은 빨리 됐으면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반대하시고...

= 반대하는 사람 많이 있을 겁니다. 나도 여럿 사람이 같이 하니까 반대를 못하지 내 혼자만 반대한다고 되지도 안할 거고 또 괜히 시끄럽기만 하고...

- 바로 옆에 주차장은 만들어진지 오래 안된 모양입니다.

= 한 이삼년 밖에 안됐어요. 땅임자가 선창에 복다방 주인인데 처음에는 주차비를 얼마씩 받고 관리를 했어요. 그런데 주차비를 주고 주차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폐지를 했어요.

그러니까 쓰레기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 새로 싹 딲아서 무료 주차장을 만든 거지요. 동네 주민들을 위해서 땅임자가 서비스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차 대기 좋고 동네 깨끗하고 해서 좋아요.

- 좋은 일이네요.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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