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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2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8. 신상회사와의 투쟁

 

138. 신상회사(紳商會社)와의 투쟁

 

 

신상회사(紳商會社) 혁파 투쟁은 국내 본건지배층에 대한 투쟁이지만 외세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또 마산항민들의 저항심의 성장을 고찰하는데 의의를 가진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 서론(叙論)코자 하는 바이다.

 

구마산은 그 입지적 조건이 영남의 인후(咽喉)의 역할을 한 요지로 특히 경남 일대에서는 고래로부터 물산의 집산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항 이전부터 상업자본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는 곳으로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순조 33(1833) 마산포(구마산)의 객주 총계가 130호나 되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02년 구마산의 시장권을 빼앗으려던 일인들과 투쟁하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 재정적 배경은 역시 구마산 상인들의 자본의 힘이다.

 

마산포가 개항된 후 구마산에 영세 일인들이 드나들게 되고 잡거해 가면서 오래 상품이 들어와 상업이 약간 활기를 띠게 되자 1901년 구마산 상인들이 자주적으로 창설한 객주회사를 고쳐 1903(2)에 경위원(警衛院, 1901년에 창설한 궁내부 소속 황실 호위기관)이 신상사(紳商社)라는 어용 중간 착취기관을 설립하여 지독한 착취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견디지 못하여 구마산 상인들은 신상사 혁파의 상소를 외부(外部)에 올리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현재 본항(本港) 상민(商民) 김처원(金處元), 김준길(金俊吉), 박원숙(朴元淑) 이본항(以本港) 신상회사혁파사(紳商會社革罷事)로 외부(外部)에 상소(上訴)한 지령(指令)을 봉준(奉准)하온 즉 내각에 미수일문(微收日文)이 창재나시(剏在那時)며 기경해상등소(旣經該商等訴)하야 이론보경부지의(以論報京部之意)로 제발칙하조변(題發則何早辨)하야 치차내번(致此來煩)인지 소유전말(所有顚末)을 상사보명(詳査報明)할 사등인(事等因)이옵시고 해상민등(該商民等)의 상소내개(上訴內槩)에 본항(本港)은 즉각(卽各) 항중불성양지처(也港中不成樣之處也) 이거신축년분(而去辛丑年分)에 자경위원(自警衛院)으로 설신상회사(設紳商會社)하고 욕추외구(欲抽外口)타가 출입구(出入口)에 도무(都無) 가추지물(可抽之物)하야 내어포구선(乃於浦口船) 주인급차어상(主人及此漁商)과 행상무상(行商坐商)과 지주선인등처(地主船人等處)에 탁이구문(托以口文)하고 자무자매문물(自貿自賣文物)을 논기시가(論其時價)하야 십분지삼(十分之三)을 책봉(責奉)하오니 불과(不過) 1년에 각 상매자본(商賣資本)과 각 선인(船人) 영업(營業)이 몰입기중(沒入其中)하야 일항상민(一港商民)이 거양환산(擧懹渙散)하고 물가등용(物價騰湧)하야 민불요생(民不聊生)이오니 동촉(洞燭)하신 후에 본항신상회사(本港紳商會社) 각목(各目)을 영위혁파(永爲革罷)하심을 복망등정(伏望等情)이온바 차()를 준사(准査)하온즉 거신축년분(去辛丑年分)에 자경위원(自警衛院)으로 파유총무원(派遺總務員)하야 이기객주회사(以其客主會社)로 개작신상회사(改作紳商會社)하야 조정추세(條定抽稅)이온바 인사이상호원(因此而商呼冤)이 성극가민(誠極可悶)이오니 해사설시(該社設施)가 여시난혁(如侍難革)이온즉 양감미수(量減微收)가 자합방편(恣合方便)이오나 유비본서지소가천편고(有非本署之所可擅便故)로 준차상민등소(准此商民等訴)하와 이어본년사월(已於本年四月)에 거실보명우(擧實報明于) 경위원이고미승회지(警衛院而姑未承回指)이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8712

창원감리 이태정(李台珽)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각하(閣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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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마산포 해안의 석축돌제(위)와 부두(아래)>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당시 욱일 승천의 강압세력을 가진 신마산 방면의 일인들이 음양으로 한인업계를 침식코자 하였으나 난공불락의 한인 아성에 근접도 못했으며,

실례로 길형(吉形)이라는 일인이 점포를 빌리기는 했어도 상거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 결과는 명약관화로 수개월간에 파산한 바 있었다.

재래의 업자 외에는 연고 없는 여하한 한인이라도 냉연히 거부함으로써 마산의 몬로집단이요, 2의 개성이라는 명예스러운 평도 받았다.

그리고 연중 행사의 하나로서 풍어를 기원하는 어민들은 별신당에서 가장 경건한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별신제의 음호(陰護)라고 할까? 그때만 해도 어업 허가는 지금처럼 남발이 아니었고 남획도 없었던 탓인지 언제이고 규격에 맞는 계절 생선이 풍요하였을 뿐 아니라 창원강(진해만 연안 즉 통영, 고성, 남해, 거제, 가덕의 통칭)의 생선은 그 진미에 있어서 멀리 동해와 서해의 것에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하여 남녘 바다에서 합포만으로 몰려오는 어선은 장관을 이루었고 뭍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필의 운반 우마차가 인근 군부(郡部)로 종락(終絡)하는 은성상(殷盛相)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세의 변천과 지방의 자연 발전으로 옛날 선창 앞 해변을 매축하여 현재의 위치에 어조(漁組)의 면모가 일신하고 석일(昔日)의 어시장은 옛날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일인들은 매축으로 확장된 이곳에 공동권과 우선권을 방패삼아 소위 내선합자어업조합을 강제로 조직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진주한 지 불과 1,2년 만에 총 퇴진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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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객주들이 마산포 상권지켜>

1910년대 마산의 시가(市街)는 마산포라 불렀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도시 신마산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마산포는 우천이 아니면 어느 때라도 사람들로 붐볐으며 특히 5․10일 장에는 전(全) 지역이 혼잡할 만큼 사람의 왕래와 상거래가 많았습니다.

산업은 상업이 주(主)였고 다음은 어업이었으며 공업은 아직 초보적 단계였습니다. 1911년이 되어서야 종래 재래식 디딜방아뿐이었던 원마산에 일본인 하목철삼(夏目哲三)이 발동기를 이용하는 정미소를 설립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한와사(瓦斯, 가스)전기주식회사 마산지점이 1911년 3월 16일에 설치 허가되어 중앙동 전 마산시청자리에 발전소를 건립, 같은 해 5월 23일 최초로 전기를 송출한 것을 비롯하여 도시의 변화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최초로 전깃불을 생산한 기념으로 옛 마산시청 뒷마당에 세워 놓은 ‘전기불터’ 기념비 사진입니다.

 


금융기관으로는 1905년 제일은행 마산출장소로 시작하여 1907년 월남동(지금의 월남동 천주교회자리)에 신축 건물로 이전한 조선은행 마산출장소 및 경상농공은행 마산지점이 남성동(현 제일은행 자리, 후에 조선식산은행으로 합병)에 있었고 마산금융주식회사․마산지방금융조합․동척출장소 금융부와 민간 대금업자(貸金業者)도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던 조선식산은행마산지점입니다. 1918년에 지었습니다. 뒤에 무학산과 학봉이 보입니다.


다음 두 사진은 1911년 발간된 『마산과 진해만』에 수록된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마산지점과 경상농공은행마산지점의 광고입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대부분의 동종업자들이 끼리끼리 공동의 이익을 위해 조합을 구성하여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조합종류도 곡물상조합․여관조합․주조(酒造)조합에서 이발업조합․농사(農事)조합․고물상조합 등 모두 16업종으로 다양했습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뒤에도 마산의 한국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상권을 지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이 그들 스스로 개발한 신마산의 상권을 쥐고 있었던 반면, 한국인 자본가들은 원마산 어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어시장 객주였습니다.
원마산 어시장은 상인들의 공유재산과 같은 것이어서 원마산 주민의 절반 이상이 어시장 덕에 생계를 꾸려 갔다고 할 만큼 비중이 큰 시장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인들의 침탈 기도를 뿌리치고 어시장 상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이래 유지되어 온 객주제도 덕분이었습니다.
객주들은 계 조직을 통해 일본 자본가는 물론 다른 지역의 자본 침투도 굳게 막았습니다.
그런가하면 객주들의 계 조직은 이후 상민조합, 합포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산지역 한국인 자본가의 구심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저축조합까지 운영하면서 상권을 유지 강화하였고, 운송업에도 진출하여 역전의 화물운송업을 차지해 곡물무역업(주로 미곡)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진행된 꾸준한 자본축적이 3․1운동 후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자 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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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6. 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마산창과 유정당>

조용했던 마산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조창에서 일을 보는 관원은 물론 인근 지역 관원들의 왕래까지 잦아지고 여각(旅閣), 객주(客主) 및 강경상인(江京商人)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로와 육로의 접점이니만큼 시장으로서의 지정학적 조건도 좋았지만,
17-18세기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급증하여 임노동자들이 도시에 집중하는 등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가 마산포를 도시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산창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가도 들어섰습니다.
동성리·중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지금도 대부분 동명으로 이름이 살아있는 6개리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마산 도시구조의 주심부(主心部)인 이들 6개리가 오늘날 마산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으며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림처럼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입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조창 터와 바다 사이의 '이프, 남흥양복점, 수성목욕탕, 남성동천주교회' 등이 들어서 있는 터는 조창기능을 위한 작업 및 하역공간으로 추정되는 공지였습니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마산창은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습니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 우편물취급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본당이었던 「유정당(惟正堂)」입니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었으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은 1900년 4월 30일 오후 2시에 있었던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장면인데 미의회 도서관 소장 자료입니다.
(
마산포 개항 후 각국거류지 경매가 모두 다섯 차례 마산포 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회와 2회 경매까지는 당시 마산포해관으로 사용되던 조창건물에서 진행하였습니다만 3회부터는 1901년 1월 1일 신마산으로 이전한 마산포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 정황에 관한 보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자로 작성한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경매 중이라 차일을 쳐 놓긴 했지만 조창건물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글이 두 편있습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입니다.
김이건의 시 중 양창(兩倉)과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합니다.


  漕倉 惟正堂                조창 유정당             -박사해(朴師海)-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 漕船歌                     송 조선가           -김이건(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웅장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시공 수준도 높았던 건물로 보입니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고 했는데,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산도시의 발원지였던 마산창이 남겨 놓은 것은 없습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오가는 행인들은 알까요?
바로 이 곳이 오늘 마산도시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8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9
2010/06/2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0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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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middot;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lsquo;H 생&rsquo;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