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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2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존의 거시 사회사적 분석에 미시 문화사적 분석을 부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신을순과의 결혼식 사진 / 1953년 가을>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마산 315의거를 다룬 문헌들에서 왜 마산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빈번히 제기되거나 다루어져왔다. 315의거 학술논문총서에 실린 많은 글들도 이 질문을 예외 없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한국의 모든 도시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폭압, 원조경제의 위기에 따른 경제적 곤란, 자유당의 노골적인 부정선거 획책 등 대동소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표출 강도는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산 지역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적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해 유혈시위가 발생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논자에 따라 구조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으로 또는 지역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치, 경제, 사회 및 역사적 요인으로 나누어본다. 요컨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요인은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며 이 글의 목적상 사회사보다는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요 요인들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뒤이은 개인적요인의 검토를 위한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마산 지역은 조선 말기 개항장이자 구미 열강의 조차지로서 근대 문물에 상대적으로 일찍 눈을 떴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무정부운동 등 사회운동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였다.

일본인들과 상권을 둘러싼 충돌도 첨예했기에 일반인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강만길(1999)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마산인의 진취성과 저항성을 키워왔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해방 직후의 귀환동포와 6.25전쟁 기간의 피난민 중 상당수가 마산에 정착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난민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날품팔이, 고아, 부랑아 등 최하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구의 사회적 구성상의 특징에 주목한 이은진(1998)은 정치적 억압, 경제적 곤란,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형성이 지역사회의 유동성과 급진성을 촉진한다고 분석했다.

셋째, 경제면에서 마산은 1950년대의 수입대체 기반 경공업화 과정에서 상공업도시로 빠르게 발전했던 만큼 동 연대 말 미국 원조의 감소에 따른 경제 불황(서익진, 2000)의 여파가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이다.

높은 실업률 등 시민의 경제적 불만도 상대적으로 더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넷째, 정치적으로 민주당 허윤수 국회의원의 변절(자유당 입당)이 미친 다면적인 영향이다.

이 사건은 허윤수와 자유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자유당에게는 충성경쟁으로 부정선거 획책을 위해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과 반공청년단까지 대거 동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상대적으로 선명성이 강한 신파 세력이 선거운동을 주도하게 만들어 의거의 발단이 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선거포기 선언을 하고 가두시위를 조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이은진, 1998).

 

이러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315 선거일 직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가히 폭풍전야의 상태였다고 평가된다(홍중조, 1992: 108).

지역의 정보나 소문이 집결되는 도심(번화가이자 유흥가)에서 장사를 하던 중년의 하상칠은 이러한 시내 분위기나 민심 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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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21.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해방이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전까지의 해방공간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표출하려는 다수의 도시 빈민들 및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가 늘어나 주택수요에 비해 공급의 절대량이 부족했다.

이 같은 사정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敵産家屋)을 다투어 차지하려는 경쟁이 심화되었고, 19506월에 한국전쟁까지 발발해 그나마 있던 기존 주택마저 전란(戰亂)으로 파괴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주거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해방 후 귀환 동포들과 전쟁 피난민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당시 한국전쟁 초기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었지만 인접한 마산도 귀환 동포들과 전쟁 피난민들로 도시 인구가 급증했다.

갑자기 마산에 모여든 이들이 사용한 주거는 신포동과 월포동 및 중앙동 등에 있었던 일본군 창고와 노동자 숙소였다.

회원동에 있었던 일본군 말 사육장의 마구간도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이들은 보통 10-20 가구가 한 창고 안에서 칸막이도 없이 함께 살았다.

<가운데 음영이 짙은 직사각형 세 건물이 마산 회원동 일본군 말 사육장이다>

 

밑바닥엔 헌 가마니나 짚 혹은 판자조각 등을 깔았고, 비가 새는 지붕 밑에서 누더기 같은 이불이나 담요를 덮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판자를 주어다 칸을 막으니 마치 그 모양이 하모니카 같다하여 하모니카 촌이라 불렀다.

하모니카 촌의 집이 이 정도니 주방 설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지혜를 발휘, 창고의 콘크리트 바닥 한 부분을 깨내고 그 밑 부분의 흙을 넓게 파낸 다음 솥을 걸고 불을 때어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그리고 큰 깡통을 주워 모서리 부분을 잘라내고 편 것 여러 장으로 견고한 지붕을 만들고 시멘트부대나 비료부대 그리고 코르타르를 주워와 루핑을 만들어 창고 처마에 덧대어서 주거공간을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 외곽지역에 난립한 판자 집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도시 미관은 물론 화재가 났다하면 대형 화재로 번졌고 소방 차량의 진입에도 지장을 초래하였다.

또한 판자집 밀집지역에는 오물 처리도 쉽지 않아 전염병을 쉽게 확신시킬 우려가 있었으며 도범(盜犯) 방지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진주지역은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인 19528월부터 기존의 주택을 보수하거나 신축하여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시 정비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2년까지 20여 년간 시행된 대안지구 토지구획사업이 그것으로, 수정남동·수정북동·평안동·대안동·동성동·계동·상봉서동일부·봉곡동일부·인사동일부·남성동일부·본성동일부·중안동일부·장대동일부·봉래동일부 등 총 14개 동에 걸쳐 25만여 평 규모의 대대적인 주거지 사업이었다.

전쟁 후 적극적인 주택정책을 세우고 있지 못하던 정부는 1957년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외국자금에 의존해 긴급히 건설했던 임시 구호성 주택에서 항구적인 주택을 짓도록 유도하기 위해 민영 ICA주택(미국 국제협조처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자금을 융자해주어 지은 주택)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정부는 이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여러 타입의 표준형 공동주택을 제시하였고 이는 곧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1958년 ICA주택 낙성식 후 주택을 둘러보는 참석자들>

 

이 정책은 시멘트 블록 벽에 외부는 시멘트 모르타르, 지붕은 슬레이트 기와를 이용한 현대적 감각의 주택들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게 했다.

단독주택의 규모는 대지 40평에 건물 15평 정도였으며 연립주택은 4세대가 한 동에 입주하는 2층이었다.

실내에 욕실을 배치하는 등 신개념의 평면구성 때문에 문화주택이라 불리기도 했다.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마산의 교원동에도 이런 집합주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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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허기를 때우고 있는 피난민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집과 백여 미터 떨어진 싸구려 객사엔 여러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머물러 우리들 이야기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동네 구장집에 있었던 머슴방엔 거의 매일 밤 머슴자리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들었다.

그리고 바냇들 북동쪽에 있은 벽돌공장 북동쪽엔 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 귀국한 귀환동포들이 주로 거주한 신포동과 해운동, 회원동 등 난민들 거주지는 변두리 동네들 거의 모두에 형성되었었다.

그리고 여러곳에서 불거졌던 소소한 절도사건들이 화제에 오를 땐 그 지역들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복어 내장을 끓여 먹고 중독사한 비극적 얘기도 그 마을들 얘기로 종종 들려왔다.

우리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부들이었음에도 뜨네기 좀도둑들에 많이 시달렸었다.

광을 따로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집들에선 방이나 마루 한녘에 곡식자루를 두기 일쑤였는데, 들에 일하러 간 녘에 이것을 털리고나면 부잣집에서 거금 털린 것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은 당장 굶주림에 직면하기 때문이었다.

고된 농사일로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 툇마루에 둔 곡식자루가 없어졌더라는 이야기나 일 나간 대낮에 감쪽같이 없어졌더라는 이야기, 심지어 낼모래 벨 벼나 보리를 세워둔 채 낱알을 훑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엿판 실은 리어카 아래쪽에 곡식자루가 있더라는 말도 들었고, 방물장수 함지도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솥을 떼어갔다는 말도 들렸고, 낡은 옷도 없어졌다 했다.

어쨋든 지금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도 한, 실소를 머금을 정도의 소소한 사건, 그러나 당자들에겐 상당한 타격이 되는 이런 사건들이 10년여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런 사고들을 막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모여 자율방범대를 만든 일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좀 효과를 보는 듯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구장집, 술도가, 방앗간에서 얼마씩 내고 여러집에서 곡식되씩 내어 교대로 번을 서는 청년들 야식비나 난방비를 감당했지만, 그것도 한두번 넘어가면 꺼려했고, 청년들은 그들대로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고 밤에도 잠을 설치게 되니 지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변두리 어려운 사람들의 삶은 고달픈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공권력은 제 살찌우기에 바쁘니 도회지 부자들 돌보기에도 바빴던 셈이다.

한편, 마산부두엔 며칠에 한번씩 구호곡을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우리동네 몇몇 형들은 그 하역작업에 적극적으로 자원했었다.

품삯도 당시로선 쏠쏠했거니와 그에 못잖은 부수입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대꼬챙이를 다듬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작업때 곡식부대에 찔러 흘러나오는 곡식을 위 내복 안에 담고 있다가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 말이 새어 몸 수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형들로부터 아구찜 먹는 걸 배웠을 것이다. 그 전엔 못 먹는 생선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부두 근처에 있는 아구찜집에서 막걸리안주로 먹어보고서 집에서 해 먹기 시작했고, 그걸 보고 여러 사람들이 따라 먹었던 것 같다.

뒤에 들으니 그때 오동동 바닷가 아구찜집 중에 내 초등학교 동기 집도 있었는데 그가 지금 오동동 할매아구찜이다.

그 외, 양덕 미군부대 군용식품 절취해내는 속칭 도꾸다이이야기도 들었고, 청수들 저수지 으슥한 바닷가에 일본에서 오는 밀수배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으나 직접 본 일은 없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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