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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13. 00:00

마산번창기(1908) - 4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2

 

■ 각국 거류지(各國 居留地)

월영동의 일부와 신월동 일부를 쪼개서 이루어진 해변의 신시가(新市街)이며 마산이사청 관내의 중심인 곳이다.

1898년(명치 31년) 2월 21일부 칙재(勅裁)로 개항되고 다음 해 1899년(명치 32년) 5월 1일에 거류지 구획이 정해졌다. 그 면적은 138,888평 남짓이며 이것을 A, B로 나누어 A는 일등지를 뜻하며 그것을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했다.

B호는 이등지이며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되어 있다. 그 일등지 전부는 이미지상권 경매가 종료되고 현재로서는 러시아인 소유자 중 몇 개 구획이 빈터로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식 기와집이 즐비해 있다. 이등지는 17호 및 39호부터 45호까지 여덟 구획을 제외하고는 경매가 끝나고 길도 가로 세로 개통되어 집도 띄엄띄엄 지어지고 있지만, 산기슭에 가까운 데까지 집이 들어서려면 아직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이 거류지에다 1902년(명치 35년) 즉 광무 6년에 당시의 영사(領事)인 사카타 주지로(坂田重次郞), 거류민회 이사인 센고쿠 간쿠로(仙石勘九郞), 박간지점 지배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 씨 등의 알선으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 시장은 마산포와 같이 매월 3번, 10일 20일 30일에 열리는 산호동 즉 고관(古館)의 그것을 옮긴 것인데 8월 3일이 음력으로 6월 30일이라 즉 10일이 붙는 날이라서 그날을 시장 첫날로 잡은 것이며 장소는 혼마치(本町)부터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에 이르는 데서 장이 열렸다.

이때부터 거류지는 신시(新市)라 불리게 되었으나 한국인 중에는 시장 복구 운동을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나와 그 시장은 불과 5~6번 열린 후 고관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월동에 새 시장을 개시하여 매월 16일에 열게 했으나 손님들과 출품이 적어서 이 또한 실패했다. 그래도 거류지에 대한 신시란 명칭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신시가 지역 명명에 관해서 당국자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으나 좋은 구획 안이 나오지 않아 시간만 흘러가고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작은 한 구획에도 십여 채의 전셋집들이 들어오게 되어 우편물의 배달이나 결창의 호구조사에도 A 몇 호인지, B 몇 호인지 조잡한 이름으로서 불편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1908년(명치 41년) 4월, 각국거류지회 회장인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거류민단 단장 마에다 에이치(前田榮一), 경찰서장 경시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 우체국장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기타 민단 의원, 유지자(有志者)들이 모여서 한 글자로 된 좋은 이름을 골라서 쓰기로 했다.

남북으로 11개 구획에 동 이름을 붙이고 동서로 11개 구획은 중앙으로부터 분할해서 동명(町名)을 붙이고 동(町)은 반드시 마치라고 읽도록 하고 죠메(丁目)를 나눈 곳에는 죠메(정목)마다 호번(戶番)을 따로 하고 각국거류지회는 이와 함께 동마다 몇 간(間) 간격을 기준으로 벚꽃을 심기로 했다.

그 11개 동의 내역은 아래와 같다.

 

 

□ 혼마치(本町, 1정목에서 5정목까지) - 현 월남동

북쪽의 창원교(昌原橋)로부터 중부의 마산교를 지나서 진해교에 이르는 지역이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에 열렸으며 상가는 다음 해 연말부터 들어오게 된 가장 오래된 곳인 동시에 1906년(명치 39년) 말까지는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당시의 마산 정거장에 바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진해군(현재의 마산합포구 삼진지역의 옛 행정구역) 읍내를 거쳐 하나는 고성과 통영으로 하나는 진주를 거쳐 전라도를 가는 노선이었다.

교마치로(京町通)의 북쪽 끝이 정류장 사이의 왕복노선으로 개통되고 나서 그 번성이 모두 교마치 쪽으로 쏠리고 이제는 조금 기울어진 감이 있다. 그래도 앞의 바다와 관련된 시설이 있고 남쪽 끝의 일본전관지에 중포병영이 세위지게 되므로 그 경향이 만회된 셈이다.

혼마치 1정목은 동쪽이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건물이 적어서 한산한 감이 있으나 그 앞바다를 매립하려는 공사가 시작되리라는 소식이 있어 그때는 교마치로와 별 차이 없는 번화가로 둔갑할 것이다.

이 동네에 사는 고참인 시게무라 우리치(中村宇一), 다나카 츠루마츠(田中鶴松)씨에 의하면 자신들이 이주했던 1900년(명치 33년) 말까지 혼마치는 동네 양끝이 아직 개통되지 않았던 상태였다고 한다.

혼마치 2정목은 해안가 일대를 가리키며, 해관지(海關地)에 이르는 사이에 무학교(舞鶴橋)가 걸려 있다.

□ 교마치(京町, 1정목에서 3정목까지) - 현 두월동

북쪽의 완월교(玩月橋)에서 중부의 반룡교(盤龍橋)를 넘어 남쪽의 혼마치 모퉁이까지의 지역으로 1905년(명치 38년) 말부터 개통한 시가지이다.

1906년 초봄에 완월교 주변에 나가야(長屋)가 한두 채 세워진 후 초여름 때부터 건축공사를 보게 되었다. 그해 6월 20일 본 책 저자가 마산에 왔을 때는 동네 전체로 16~17채 밖에 되지 않았으며 특히 동쪽 일대에는 건물이 없어서 해면을 지나온 남풍이 바로 가게에 불어와 시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한 길이 있을 뿐 가게의 번창이란 엄두도 못 내던 터였는데 같은 해 가을에는 혼마치로의 남쪽 끝 길이 닫히게 되고 그와 동시에 동네 북쪽 끝머리에서 마산포에 통하는 길이 열려 정거장 길은 이때부터 동쪽으로 꺾이게 되었다.

그 이래 혼마치의 건축공사는 아주 바쁘게 돌아가게 되고 그 공가 소리는 밤에도 들릴 정도였다. 같은 해 연말에는 동네 동쪽에도 기와집 건설이 시작되어 마침내 혼마치의 번영을 능가하고 마산 제일의 장소가 된 것은 1907년 초봄부터이다. 혼마치 2정목 위에 있는 야나기마치(柳町, 신창동)에 이르는 모퉁이는 하나미사카(花見坂)라고 불리기도 했다.

□ 사카에마치(榮町) - 현 홍문동

사카에마치는 대사교(大使橋)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와 동시에 개통된 시가지이며 경찰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교차점 사방은 양측에 요리점이 생겨서 마치 마산의 유흥가처럼 되어 버렸다.

□ 하마마치(濱町) - 현 창포동

혼마치와의 경계를 이루는 신월교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 5정목으로 나올 때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가지는 해안 매립과 동시에 개통된 곳이라 바다와 면하여 있어 길 한 쪽에 집이 있을 뿐이다.

그 1정목에서 2정목까지는 모두 해관 소유지이지만 1정목에는 해운업, 위탁판매업, 기타 해관에 연고가 있는 자가 땅을 빌리는 허가를 받고 거주하거나 창고를 지어서 해안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도 했다.

1907년(명치 40년) 7월에 해관이 창고를 건축할 예정이 있어서 그 터에 집과 창고를 없애도록 하여 그 꼭이 참으로 못 보게 되었다. 2정목은 애초부터 차지(借地) 허가를 내지 않아서 오늘날의 1정목보다는 아주 살풍경으로 자랑거리는 전혀 못된다.

3정목와 2정목이 이어지는 지역은 러시아인의 소유라 건축물이란 아예 없다. 다만 모퉁이 한 구획을 사이에 둔 구역에는 마산수산회사 및 부속어시장이 있기 때문에 상점들이 많이 덜어서고 있다. 가게 뒷 터에는 어부의 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빼곡히 줄지어 있다.

출선(出船) 후의 어부 집들은 다른 데와 변함없으나 배가 들어온 후에는 먹고 마시며 소란을 피우고 시끄럽기만 하여 여기저기서 노래 소리, 싸움소리가 이어진다. 근처의 상점들도 이때가 장사가 잘 되는 법이다. 출선과 입선은 매일 다소나마 있지만 출어기는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사흘 정도 걸린다.

이 뒷골목은 일본에서 말하는 빈민굴보다 더 열악하여 다타미 서너 장 넓이의 집에 부부로 세 가족이 살면서 줄판이 벌어질 때에는 아침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번갈아 들락거리기도 한다. 세상에 불경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양상이니 참 기운도 좋은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 악의 없는 어부들이 수산회사 소속의 에비스신사(惠美壽神社)를 중심으로 해업을 독점하고 그 기세가 높은 것도 마산의 꽃이라고도 하겠다.

□ 다이마치(臺町) - 현 대내동

다이마치는 이사청이 마산포에서 이사해 왔을 때 개척된 곳이라 이사청, 러시아영사관 소유지와 영국계약의 지계(地界) 일대의 총칭이다.

이사청, 이사청 관저, 이사청 직원 숙소 및 러시아 영사관이 있을 뿐 상가는 한 채도 없다. 다만 조망이 좋아 소나무가 울창한 일화산록(日和山麓)에 자리 잡고 있다.

□ 야나기마치(柳町) - 현 신창동

야나기마치는 북쪽의 웅천교를 꺾어 올라 교마치의 서쪽 위에 나란히 가면서 대사교(大使橋)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이며 교마치와 같은 시기에 개통한 시가지이다.

평탄하지 않은 비탈이 많은 동네라서 아직은 번화롭지는 못하다. 이름에는 버들 유(柳)자가 들어갔지만 버드나무는 없다. 집들이 이제야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 3년 내에는 변화가가 될 것이다.

□ 아사히마치(旭町) - 현 평화동

아나기마치와 나란히 월견교까지 이르는 지역

□ 사쿠라마치(櫻町) - 현 문화동

아사히마치의 서쪽 조금 높은 데로 아사히마치와 병행하는 지역으로 시중(市中)에서 가장 높은 시가지이다.

□ 토모에마치(巴町) - 현 대외동

마산경찰서가 있는 곳이며 그 서쪽 옆구리 지역 일대를 총칭한다.

□ 미도리마치(綠町) - 현 유록동

토모에마치의 서쪽에 위치하며 그와 병행하는 지역이다.

□ 아케보노마치(曙町) - 현 청계동

월견교(月見橋) 이남의 사카에마치와 토모에마치 사이에 있는 구역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네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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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조선 왕조 최후의 황제인 순종 이척(李拓)은 1909년 1월 10일~12일(원문에는 '등극한 1907년(융희 원년) 10월'로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에 소위 경부·경의선 철도부설 시찰이라는 명목 아래 마산포를 순행하였다.

 

이 순행을 축하하는 뜻에서 일본의 연합 함대가 마산만에 투묘(投錨)하고 101발의 축포를 터뜨렸다.

 

한편 마산 이사청(현 경남대 평생교육원) 정문과 숙사(宿舍)인 이사관사(부윤관사-현 마산종합복지관) 앞 그리고 경교(京橋, 제일각 앞)와 창원교(전 럭키회관 앞)에는 한제폐하(韓帝陛下)의 어남순(御南巡) 환영대송문(歡迎大松門)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수행원은 통감 이등박문, 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등 외교 문무백관이었다.

 

숙소는 삼증(三增) 이사관(마산부 초대 부윤 1914-1919) 관사였는데 숙사 근방은 한황(韓皇) 신변관계로 관계려니와 이등박문의 신변에 만약의 경우를 고려해서 한일 정·사복 경관은 물론 일인 병대와 헌병 등 3, 4중의 삼엄한 경계망은 수하(誰何)도 얼씬 못했다.

 

익일은 이사철 2층에서 잠시 휴게하셨다.

 

후일 마산부 회의실을 사용한 기념으로 1936년 마산부청 이전 때까지 그 자리에 옥좌라 써 붙이고 일반에게 조심을 환기시켰다.

 

이어 구마산으로 납시었다.

 

어가가 없어 인력거를 임시로 이등과 이완용 그리고 한국 각료 등만 각각 뒤따르고 나머지 무관과 수행원들은 마필(馬匹)을 이용했다.

 

감리서(구 제일은행)에다 급히 행재소(行在所)를 마련하여 옥좌를 감리실에 두고 감리서 내외엔 마산 근처의 국민들이 부복 배알했다.

 

12일 오전(원문에는 도착 다음 날 일모경(日暮頃)이라고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에 천지가 뒤집힐 환호성과 만세 소리에 싸여 열차편으로 한양에 환행(還幸)하셨다.<<<

 

 

<아래는 당시 순행을 기념하는 그림엽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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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마산 최초의 근대 건축>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남단 해변의 전망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현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경술국치 전인 이 시기에 식민 지배를 위한 법원 등 관아와 교육시설․금융시설을 비롯하여 요정․상점 등의 상업용 시설들이 일본에 의해 들어섰으며 이 외에 서양선교사들에 의해서 종교시설과 교육시설들도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양식은 대부분 의양풍(서양식과 유사한 형식) 혹은 일본식의 단층 건물이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대표적인 관아건물로 1908년에 지어 마산이사청으로 사용됩니다. 목조2층으로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1899년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을 헐고 지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한 부산법원 마산출장소 건물입니다.
목조2층 양식으로 마산시청 앞에 있는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개항기(1899년-1910년) 마산의 근대건축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상술의 논문자료입니다.
 

 

No

건 물 명

현 위 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일본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르네상스풍

 

1906년 마산이사청

2

러시아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식민지양식

 

현 월포초등교 내

3

마산우편국

월남동4가

1902

목조1층

의양풍

42평

1930.2.24중앙동이전

4

마산포교회

성호동

1903

벽돌조1층

개량한식

 

문창교회전신

5

심상고등소학교

장군동3가

1904

목조1층

의양풍

384평

일본인학교, 후 이전

6

마산공립소학교

 

1904

 

 

 

1901開校,성호초등교

7

마산병원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의양풍

75평

도립병원전신

8

마산 역사(驛舍)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일식

 

 

9

제일은행출장소

월남동3가

1907

벽돌조1층

의양풍

 

 

10

서전(西田)주조장

홍문동

1907

 

 

112평

마산最古酒造場

11

마산이사청

대내동

1908

목조2층

의양풍

 

1914년 마산부청

12

망월루

두월동1가

1908

목조3층

일식

96평

여관, 요정

13

심상고등소학교

중앙동

1908

양풍 平家

 

612평

이전하여 신축

14

창신학교

상남동87번지

1909

목조1층

의양풍

56평

호주선교사(신교)

15

마산신사(神社)

문화동

1909

 

 

 

 

16

마산헌병분대

월남동3가

1909

 

 

 

현건물은1926년신축

17

육군중포병대대

월영동

1909

기와

 

 

여러 채가 있었음

18

환서좌(丸西座)

신마산

1909

목조2층

 

 

5-600명 수용

19

마산 세관

월남동4가

1910

목조1층

의양풍

 

 

20

지방법원마산지청

중앙동4가

1910

목조2층

양식

 

 

21

성지학교

완월동206번지

1910

벽돌조1층

양식

 

프랑스선교사(구교)

22

부산감옥마산분감

장군동

1910

 

 

 

 


여기서 소개한 건물들은 그 시기를 대표할만한 것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외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전 글에서 밝힌 대로 보험회사․목재상․정미소․양조장등의 공업시설과 마산청과물 시장 등의 유통시설, 여러 개의 유곽과 30여 개소의 여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시기에 매우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표의 세번 째에 적힌 마산우편국(1902) 사진입니다. 의양풍으로 목조1층이었습니다.


여관과 요정으로 사용되었던 망월루 사진입니다.
목조 3층 일본식 건물로 창원천변에 있었는데 사진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업규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한편, 일제는 1906년부터 부산․인천․성진과 함께 마산에도 항만 및 세관 설비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신마산 세관에 종래의 부두연장 84.5m에 돌제(突堤)의 연장 10m를 보강해서 등대를 설치하고 계단이 딸린 목조잔교를 설치했습니다.
다음 사진이 그 때 설치한 마산세관의 목조잔교입니다.


 

세관 구내에 목조 단충의 파상형(波狀形) 철판지붕으로 된 50평 규모 창고 1동을 건설했으며, 세관 주위에 철책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목조 23여 평) 1동도 이 시기에 신축하였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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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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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마산으로 건너온 일본인>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였습니다만 일본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1884년에 착수한 그들의 공사관(公使館) 신축 때 들어 온 직공(職工) 70여명이 최초입니다.
그 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상인 약간 명이 잠주(潛住)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남산 밑에 일본인 거류구역이 설정된 1885년 후였습니다.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1894년,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서 일본인의 한국 이주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합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되도록 속히 한국 땅에 이식시키는 일,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계책이다. 한국 땅 이식 사업은 한반도를 개척하는 데 무엇보다도 장기적 대책이다. 한국 땅으로의 이식은 국부의 증진 도모에 크게 족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는 데도 또한 이 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
조선도항자편리(朝鮮渡航者便利) 22편-

이러한 정책에 따라 한국 땅에 이주한 일본인들과 그들로 구성된 일본인 거류지가 장차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함께 1911년에 펴낸『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은 개항하던 해에 33호 103명이었으며 이들은 생업 때문에 대부분 원마산(마산포)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80호에 259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래의 표가 개항이후 12년 간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 들의 수 입니다.

년도별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호수

33

70

80

99

95

154

340

677

868

989

1,132

1,548

인구

남자

87

189

160

203

191

359

717

1,233

1,826

2,009

2,360

3,163

여자

16

61

99

130

136

270

531

937

1,393

1,678

1,961

2,778

합계

103

250

259

333

327

629

1,248

2,170

3,219

3,687

4,321

5,941


이 통계를 보
면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인은 불과 77명밖에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03년에 327명이던 일본인의 수가 1904년에는 629명으로 302명이 증가하였고 이어서 1905년에는 619명, 1906년은 922명, 1907년은 1,049명, 1908년은 468명, 1909년은 634명, 1910년은 1,62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항 당시 103명이던 마산의 일본인이 1910년에 무려 5,941명으로 급증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1905년경부터 시작된 급격한 일본인 증가현상은 1905년 10월 노일전쟁 승리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1906년 2월 1일 마산에도 이사청이 설치되어 종래 창원감리가 행사하던 지방통치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해 9월 1일「일본거류민단법」이 실시되어 마산의 일본거류민회는 「마산일본인거류민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마산일본인거류민단이 발족할 당시의 일본인 거류민 수는 660호에 2,433(남자 1,452명, 여자 981명)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미곡상을 주업으로 하는 송원조장(松原早藏), 구중감작(久重勘作), 산본호장(山本好藏) 등을 비롯하여 216호 700명이 원마산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개항 다음해인 1900년 마산에 이주해온 일본인 송원조장 씨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그가 이주해온지 29년 뒤인 1929년 발간된 '마산현세록'에 실린 것입니다. 나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사진으로보아 꽤 젊은 나이에 마산으로 건너온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마산포(원마산)에 거주했던 까닭은 그들의 주업종인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영업 활동 때문에도 개항 이전부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마산포를 근거지로 삼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소개합니다. ( ) 안은 겸직입니다.

무역상 1

중매상 6(4)

약종상 5

잡화 27(6)

술소매 2(1)

도기 (5)

일상잡화 (1)

주물상 (1)

옷가게 3(2)

부엌잡화(1)

양주(2)

담배 (4)

과자상 3(2)

설탕상(2)

석유상(1)

장유상(2)

의사 2

문옥(問屋)1(1)

회사 2

여인숙(1)

야채상 1

두부 1

요리점 1

떡집 2

푸줏간 1

세탁업 1

일고(日雇) 5

예기 1

선원 (1)

목수 15

석공 6

미장 2(1)

철력세공 1

대장간 2

이발관 1

미용실 1

된장 (2)

일용노동 22

토목청부 1

정미상 (1)

식빵 1

대궁(大弓)(1)

페인트칠 1

작부 3

선두(船頭) 3

광업 2

 

러시아 : 호텔업1, 잡화상1

중국 : 잡화상7,잡화행상3

독일인 : 선교사


이 표는 1902년 당시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과 그 외 외국인들의 직업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표에서 보는 것처럼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그 중 건설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이가 50여명이나 되어 새롭게 조성되는 조계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겸직이 많았다는 사실과 직업의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이주가 극히 초기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직업도 있습니다.
알아보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짐작하기로는 문옥(問屋)은 건설관련, 일고(日雇)는 일용노동, 대궁(大弓)은 조선목공, 선두(船頭)는 선박업 정도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한편, 1904년에는 뒷날 봉암동 수원지를 건설한 본전퇴오랑(本田搥五郞), 경찰서와 일본인 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등을 건축한 천해신시(淺海新市) 등의 토목․건축 청부업자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들은 거류지 내에서 일기 시작한 각종 건설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아래 사진이 본전퇴오랑 씨입니다. 마산민의소 공회당을 싼 값에 사들여 헐고 공락관(옛 시민극장)을 지은 이 입니다.
이런 일본인들이 개항된 마산을 휘어잡았습니다.


당시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수에 대한 통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 시기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인구와 일본인 인구를 나타낸 것이 다음 표입니다.

년도

총인구

일본인

기타

한국인(추정)

출처

1899년

 

103

 

호수 : 2,000여호

香月源太郞, 韓國案內

1907년

11,881

3,219

80

8,582명

손정목, 도시사회경제사연구

1909년

11,022

4,321

 

6-7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1910년

16,657

5,941

52

10000-11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당시 마산에 거주했던 한국인은 을사조약 전후에 6,000-8,000여명이었다가 1910년 경에 10,000여 명을 조금 넘긴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친 총 16,000여 명의 마산 인구는 1910년대에 내내 14,000명에서 16,000명 정도로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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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31 10: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0. 10. 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식민지배의 상징, 마산 이사청>

1876년 최초의 개항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 완전 강점당할 때까지 34년간은 이 땅 안의 모든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로 재편성되는 시기였습니다.

이 재편 과정에서 신도시(新都市)가 생겨나기도 하고 반대로 많은 전통적 도시들이 상대적 또는 절대적인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전자는 마산을 비롯한 개항장 소재지들로서 외국인거류민들을 중심으로 통상 무역이 활발히 전개되던 신도시들이었고 후자는 지방행정의 중심으로서 1,000여 년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래의 도시들이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도시 중에서 마산․인천․군산․목포․부산․진남포․신의주․원산․청진 등의 9개 도시와 후자에 속하는 도시 중에서 경성․대구․평양의 세 도시가 1914년 부(府, 현재의 시)로 바뀝니다.

개항 이후 국제 사회에서 한국 내 지배력을 강화해 온 일제는 청일전쟁, 노일전쟁, 을사조약으로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 식민지화를 구체화시켰습니다.

특히 노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7월,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가쓰라(계, 桂)-태프트’ 비밀협상을 맺었습니다.

이 협약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함을 전제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노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정책을 미국이 방조하고 협력한 협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05년 8월 22일에는 제2차 영일동맹까지 맺었습니다.
이 동맹에서 영국은 ‘일본국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특수한 이익을 가지며 영국은 일본국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한국에 대해 취하는 것을 승인’ 하였습니다.

같은 해 9월 5일 노일전쟁의 종결을 위해 중재한 포츠머드조약에서도 이 점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일본은 국제사회에서의 실력과시는 물론 한국식민지화를 공공연히 사실화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참담하고 억울한 일이지만 당시의 우리 사정은 그랬습니다.
국제정세가 이랬기 때문에 을사조약으로 설치된 통감부는 한반도의 식민통치를 위해 행정권을 철저히 장악,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먼저 각 지방에 이사청을 설치하였습니다. 마산 이사청도 이 때 설치되었습니다.

마산 이사청 건물입니다. 
1899년부터 있었던 영사관건물을 헐고 1908년에 지어 이사청으로 사용했습니다. 목조2층 건물로 현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구, 창원군청)에 있었습니다.
창원군청 초기까지 원형이 남아 있었는데 건축적 가치도 없는 현재 건물로 개축하면서 철거되었습니다.
남아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을 것 같은데 아깝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왼쪽의 큰 나무가 위 흑백사진에 보이는 저 나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산이사청의 관할 구역은 부산이사청과 대구이사청 관할구역 이외의 지역, 즉 경남서부일대지역이었습니다.
지청(支廳)으로 진주지청이 1907년 1월 5일 설립되었고, 진주지청에서는 마산이사청 관할구역 중 좌측, 즉 경상남도 서남부 일대인 진주․사천․곤양․남해․하동․의령․초계․협천․삼가․단성․산청․함양․안의․거창 등을 관할했습니다.

통감부는 이사청 뿐 아니라 외청(外廳)으로 철도관리국․법원․재정감사청․관측소․영림창(營林廠)․우편국 등까지 설치함으로써 사실상 한국의 행정․입법․사법의 전권을 장악했습니다.
마산의 우편국은 이보다 훨씬 빠른 1899년 11월 16일 현재의 남성동 제일은행 터에 있었던 구 창원감리서에서 개설되었습니다. 개항에 필요한 시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제의 횡포로 인해 전국적으로 배일사상이 팽배해지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1907년 6월 하순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황제 양위(7월 20일), 한일신조약(韓日新條約, 丁未7조약, 7월 24일), 언론 탄압을 위한 신문지법(新聞紙法) 제정․공포(7월 24일), 한국군대 해산(7월 31일), 연호 변경(광무에서 융희로 변경, 8월 2일) 등 일련의 조처를 불과 일 주일 남짓한 사이에 해치워버렸습니다.

그 중 신문지법(新聞紙法)은 광무 황제의 법률 제1호로 이것이 이른바「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입니다. 일제하는 물론 8․15 후까지도 효력을 지니고 있었던 우리나라 언론탄압의 효시였습니다.

일제는 이처럼 한반도 통치의 내적 조건을 조성하면서 장차 다가올 식민지배의 기반구축사업인 사회기반시설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철도는 1899년 경의선 일부 개통을 시작으로 1905년 경부선과 마산선(마산-삼랑진), 1906년 경의선과 경인선, 1910년에는 평남선까지 설치하였습니다.
간선도로는 1907년부터 1910년의 한일합방까지 외채차입금 총 공사비 293만 여원을 투입하여 진남포-평양선을 위시한 14개 노선 총 연장 1,993㎞를 뚫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906년에 착공한 부산․ 인천․ 진남포․ 원산․ 청진․ 목포․ 신의주․ 성진 등 여러 개항장들과 함께 마산에도 항만을 개축하고 세관설비공사도 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수탈의 기반시설을 조성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지은 러시아영사관 건물입니다. 
현 월포초등학교 부지에 있었으며 목조2층 건물로 양식적 특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 건물이 그 자리에 존치되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건물이 서로 경쟁하듯 인근 지역에 서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을 때,
인근 월영리 주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2010/04/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2010/05/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010/05/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2010/05/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010/05/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2010/05/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2010/07/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010/07/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2010/07/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2010/07/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2010/08/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
2010/08/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2010/08/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 - 개항기
2010/08/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2010/08/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 - 개항기
2010/09/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2) - 개항기
2010/09/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3) - 개항기
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
2010/09/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5) -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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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27 11:0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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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마산의 관공서 - 1 □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신시(新市) 다이마치(臺町) 소재 언덕 위의 조망이 좋은 데에 있으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 부산 영사관의 분관으로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로 하여금 건..

마산번창기(1908) - 6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4 ■ 마산포 - 2 □ 월영동(月影洞) 신시의 서쪽부터 남쪽 일대를 포함하는 큰 마을이다. 그 일부는 일본의 전관지(專管地)이기 때문에 1908년(명치 41년) 7월 퇴거령으로 인해 서쪽의 산 ..

마산번창기(1908) - 5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3 ■ 마산포 - 1 신시(新市)의 북쪽 약 2km 거리에 있는 본래의 마산이다.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의 해안, 항로, 도서 등의 지리정보를 망라한 수로지로 동..

마산번창기(1908) - 4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2 ■ 각국 거류지(各國 居留地) 월영동의 일부와 신월동 일부를 쪼개서 이루어진 해변의 신시가(新市街)이며 마산이사청 관내의 중심인 곳이다. 1898년(명치 31년) 2월 21일부 칙재(勅裁)로 개..

마산번창기(1908) - 3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1 한국에서 마산같이 산이 좋고 물이 밝은 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음양의 영혼인 대기(大氣)가 응어리져서 마산만의 물이 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빛이 나는 아지랑이 속에 마산항의 ..

마산번창기(1908) - 2

서언 마산의 진상(眞相)을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으로 세상에 알리는 일은 오직 스와교도(諏方去洞) 씨가 편찬한 『마산번창기』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시찰이나 관광 명목으로 수많이 관민에 의한 수기가 잡지, 신문 등에 기술되었건..

마산번창기(1908) - 1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를 포스팅한다. 기록전문가 박영주 선생이 일본의 한 대학도서관에 참자고 있던 이 책을 찾아냈고, 이를 창원시정연구원이 번역 출판하였다.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4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lsquo;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rsquo;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3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lsquo;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rsquo;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2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lsquo;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rsquo;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1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lsquo;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rsquo;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

우리도 선진국이 되었다는데,,,

&lsquo;선진국에서는...&rsquo; &lsquo;우리도 선진국이 되어야...&rsquo; 등 등 , 오랜 세월 얼마나 들먹이며 얼마나 부러워 했던가, 선&middot;진&middot;국 7월 2일 UNCTAD(유엔무역개..

마산 인공섬(해양신도시)을 에너지자립섬으로

이 글은 최근 경남지역의 세 NGO에서 창원시에 공개적으로 제출한 요청서입니다. 창원시가 개발업체를 공모 중인 마산 앞바다의 인공섬(해양신도시)을 에너지 자립섬으로 만들자는 내용입니다. 마산 인공섬을 에너지자립섬으로 개발 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