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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4.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1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4) "한 집에서 46년을 살아오면서" ------------------------- 김○○

1940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598-16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조합사무실, 자택

 

- 반갑습니다. 이 동네에서 아주 오래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동네의 옛날 얘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살고 계신 데는 언제부터 사셨습니까?

= 우리 동네 내력을 역사로 남겨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69년도에 들어 왔습니다.

- 예. 정말 오래 되었네요.

= 68년도에 집이 완공 되고 69년도에 입주가 되었는데 우리도 69년도에 들어왔으니까 올해가 46년째인가 그럴 겁니다.

여기가 원래 나락 심고 하던 논이고 미나리꽝이고 그랬다고 합디다. 몇 사람 업자들이 모여 가지고 택지로 개발해서 집 서른두 동을 딱 한꺼번에 지어 가지고 개개인 한테 팔았어요. 매월 얼마씩 부금을 넣어야 하는데 14년 부금이었을 겁니다.

- 여기 주택들이 평수가 다 비슷해 보이던데요?

= 모서리에 있는 집 같은 경우는 조금 어중간 하니까 몇평 더 있어도 그외는 거의 다 비슷해요. 등기상으로는 서른다섯 평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서른여덟 평입니다. 분양할 때는 서른다섯 평인데 그 뒤에 재어 보니까 우리 게 평수가 더 있어요.

똑같이 짓는다고 했는데 우리 집은 세 평이 더 있어요. 그래 69년도에 입주를 했다가 그 뒤에 팔고 나가고 새로 들어오고... 우리는 한번도 옮긴 적이 없었고요.

- 당시에 여기 오셨을 때 이 동네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 공영주택입니다.

- 그러면 수재민 주택이라는 것은 잘못된 얘기군요? 여기를 수재민 주택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던데요?

= 예. 수재민 주택은 아닙니다. 우리가 집을 사서 들어왔는데 수재민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이사 들어오고 나서 수재가 났습니다. 그때 도랑가 집들이 홀라당 떠내려가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여기 오고 얼마 안있어 가지고 사태가 났어요. 큰물이 졌거든요. 우리 동네도 얼쭉 담았어요. 우리 집은 조금 높다 보니깐 안그런데 낮은 집은 방에까지 물이 들어갈 정도였거든요.

그래 우리 여기는 조금 높고 도랑가는 조금 낮습니다. 그러니까 벽을 뚫어가지고 물 빠져나가게 하고 그랬거든요. 그때 수해가 나서 이 밑에는 쓸었어요.

그래 그 사람을 이동시키기 위해서 화란주택이 지어졌습니다.

그때는 내가 젊었을 때인데 천주교에서 화란주택이란 거를 지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어요.

- 화란 즉 네덜란드에서 원조를 하고 천주교에서 관여를 해서 주택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 맞아요. 거기에 들어간 사람들이 수재민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처럼 주택 단지로 지어진 것은 여기가 처음이었거든요. 그 당시에 보로꾸로 지은 게 아니고 전부다 벽돌로 지은 겁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동네 집을 보고 우와~ 하고 그랬어요. 슬라브로 깨끗하게 지으놓으니까 전부 다 우와~ 하고 놀라고 그랬거든요.

여기 들어온 사람들도 교감 선생님, 공무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로는 고급주택이었어요. 처음 지을 때부터 단층 슬라브였는데 우리 집은 그때부터 하나도 안변했습니다.

지금 보면 이층 올린 데는 다 새로 지은 거고 우리는 단층 그대로입니다. 조금 달아냈을 따름이지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라고 봐도 됩니다.

그리고 난 뒤론 이 동네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집 다 들어서고 난 뒤로는 딱 그대로 입니다. 지금은 좋은 집들이 많으니까 이건 집도 아닙니다. 오두막이지. 하하. 사십 년 전에는 진짜로 좋았습니다.

- 그럼 69년도에 들어오셨을 때 이 밑에 무학상가도 없었겠네요?

= 그렇죠. 우리 오고 나서 그 뒤에 무학상가가 들어섰습니다.

이 주변에는 이 동네만 오물오물 있었고 위로는 전부 논이고 밭이었습니다. 이 위에 올라가면 태양탕 있지요? 거기는 솔밭 비슷하게 언덕받이가 되어 가지고 묘지도 있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태양탕이 들어오고 그 위에 또 황금탕이 지어지고 그랬어요. 지금은 남일탕이 없어졌습니다만 옛날에는 거기로도 목욕하러 다니고 했거든요.

주공아파트, 지금 블루밍 안있습니까? 거기도 다 언덕받이 비슷한 그런 상태였어요. 도랑 건너에 집이 조금조금 있고 회원국민학교가 있었고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아래 미나리꽝 있는 그 언덕으로 집이 몇채씩 있었어요. 부분부분 조금 있고 또 논이 있고 그랬어요. 그때는 차가 없으니까 부림동으로 내려 가려면 마을 가운데 샛길을 지나서 모 심어놓은 논길을 지나서 걸어다녔거든요.

이 아래 북마산역에 가려고 하면 사선으로 질러가는 길로 다녔습니다. 구마산역 쪽으로 해서 공설운동장, 양덕 한일합섬으로 가려고 하면 문디고개라 하는 데가 있었는데 그 길로도 넘어 다니고 그랬어요.

거기도 약간 언덕받이처럼 그랬는데 온통 흙구덩이였어요. 산호동 학교 뒤로 그쪽으로는요.

- 여기 오셨을 때 주변에 작은 공장은 없었습니까?

= 엄청 못사는 동네였어요. 여기가 옛날에 산동네 아닙니까? 그러니까 큰 공장은 없었어요. 도랑 따라 내려가면 저쪽 건너편에 건빵 공장, 또 회원초등학교 쪽에는 장갑 짜는 공장 그런 잔잔한 공장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다양한 과자가 나오지만...

옛날에 뻥튀기 비슷한 과자 안있습니까? 그 만드는 공장이 언덕받이에 하나 있었습니다. 여기서 얼마 안올라갑니다. 무학농장 올라가는 길 쪽에 지금 형제상가 근처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 과자 공장이 있었어요.

거기 가면 과자를 많이 줬어요. 모양을 만들어서 튀기는 과자인데 그런 걸 사러 간 적이 있어요. 애들이 어릴 때니까 한 70년대 중반쯤 되겠네요.

- 그 당시에 무학농장이 아주 유명했지요?

= 그렇죠. 무학농장은 처음에 누가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는 한일합섬에서 인수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왔을 당시에는 무학농장 관리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당시는 참 좋았어요. 마산에서 유명한 유원지 아닙니까?

봄 되면 사람들이 여기 얼마나 많이 온지 모릅니다. 앵기밭골 하고 무학농장은 또 다릅니다. 위치가 약간 다르거든요. 무학농장은 성인들 술 먹고 노는 그런 위주고 앵지밭골은 초등학생 중학생 소풍 가는 장소로 많이 이용 됐어요.

그때 무학농장이 얼마나 많이 알아줬다고요. 마산시민이 진짜 다오다시피 했어요.

우리가 신마산에서 살았는데 걸어서라도 여기까지 왔어요. 봄 되면 꽃이 많이 피고... 봄 되면요. 여자 두어 명 모이면, 우리 무학농장에 치마 주워러 가자, 이럴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유명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자들이 술 먹고 놀다 보면 옷상태가 형편없이 되고 그렇거든요. 치마도 내팽겨치고 가버리고 하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겁니다. 그만큼 여기가 유명한 곳이었어요.

무학농장 옆으로 앵기밭골 쪽에는 젖소도 유명했어요.

- 옛날에는 이 앞 도랑에서 빨래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고요. 그 송사리 같은 고기도 잡고 그랬어요. 물이 얼마나 깨끗했다고요.

70년대에 태어난 애들은 여기서 목욕 했어요. 우리 애들도 데리고 나가 씻기도 그랬거든요. 다라이에 담요 같은 거 들고 가서 밟아서 행구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수도물이 제대로 안들어 왔거든요. 우물도 안파져 있었거든요. 집 지었을 때 수도는 넣었는데 수도물이 잘 안나왔습니다. 격일제로 나왔거든요. 열두 시에 나올 때도 있고, 잠시잠시 주고 그랬거든요. 물이 없어 가지고 물 이로도 많이 댕기고 그랬어요. 온 동네 댕기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주로 도랑가에서 빨래를 씻었지요.

- 여기 도랑에는 샘이 없었습니까?

= 지금 위에 다리 있지요? 이 앞에 다리 말고 위에 다리, 그 바로 밑에서 물이 나왔어요. 얼마나 물 좋았다고요.

겨울에도 얼지않고요. 여자들은 거기 가서 빨래 씻고... 밤되면 저녁 묵고 설걷이 다 해 놓고, 아이들 다 그거 해 놓고 거기 가서 빨래 씻고 목욕하고 오고 그랬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 그럼 그 샘을 뭐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까?

= 물이 솟으니까 물난데라 그랬지요.

여자들은 우리 저 위에 목욕하러 가자, 하면서 여자들 혼자는 안가고요. 너는 씻으로 안갈래? 그랬어요. 다리 밑에 물이 송송송 났거든요.

거기서 내려오면 공동샘이 또하나 있었거든요. 옛날에 설훈 집 옆에 깊지는 안해도 우물이 하나 있었어요. 그 물을 이고오고 그랬어요.

지금 도랑 건너 미장원이 하나 있는데 그 미장원 뒤에 조그만 기와집이 있었고 그 앞에 설훈 집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집이 남아있을 겁니다.

지금 민주당 국회의원하는 그 설훈입니다. 막내 동생 하고 마고 동기거든요. 이 집에도 놀러 오고 했어요.

또 이 밑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메워져 있어요. 그 우물은 얼마 안됐어요. 우리 집 굼티 있는 데로 나가면 대문에 키위나무 있는 집 그 안에 우물이 있었어요.

그 우물이 너무 좋았어요. 거기로 물 뜨러 가기도 하고 그랬죠. 옛날에는 조그만 터만 있으면 방을 지어서 남 세주고 그랬는데 그 구석에 샘이 있는데 참 물이 좋더라고요. 이 동네가 옛날에는 참 물 좋다 했는데 지금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그때만 해도 골짜기 아닙니까?

옛날에는 회원동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이고 지금도 회원동 그 골짜기 사나? 이런 말을 했어요. 실제로 참 못사는 동네였어요. 택시도 안올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제사 모실려고 제사장을 봐서 택시 불러서 회원동 정자나무로 가자고 하면 택시를 딱 대다가도 가버립니다. 세 대쯤 보내야 택시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랬는데 이제는 서로 올라 합니다.

하하. 회원동 정자나무(아래 사진), 그 나무가 육백 년 됐다고 그러는데 그게 많이 알아줬거든요. 무학농장 가는 길 정자나무라 하면 알아줬거든요.

 

 

- 하나 더 여쭤 보겠습니다. 예전에 마포중학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마포중학교 알지요. 그 자리가 어디인가 하면 무학자이 있는 그 자리입니다. 마포중학교가 야간도 있었고 주간도 있었고 그랬는데... 그 주위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지요.

없어진지 오래됐는데 그래도 거기가 추억이 어린 곳이요. 우리 때는 마중이나 동중 이런 데는 시험을 치고 들어가야 하니까, 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 배운다고 마포중학교에 많이 다녔어요.

그런 얘기하면 눈물 흘리는 사람 많을거요. 참 못살아서... 먹을 것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배우겠다고 밤에도 오고... 신마산에서도 여기 오고 그랬어요.

- 그리고 혹시 이 공영주택 입주 당시 사진이라든지 옛날 이 동네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는지요?

= 그때는 카메라도 귀했어요. 애들 운동회 한다고 카메라 하나 빌리려고 해도 사진관에서도 잘 대여 안해줬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사진 남기고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사진 찾아봐 달라고 얘기하길래 지금 좀 찾아 보니까 옛날 사진이 몇장 있네요.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인데 한번 보십시오. 이 사진은 결혼 사진인데, 이 날이 1969년 12월 21일입니다. 성호초등학교 앞에 있던 청락예식장에서 식을 마치고 우리 집사람이 이 집으로 들어오는 사진입니다.

- 예. 사진 찍은 날짜가 분명하고 또 그 당시 주택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정말 귀중한 사진입니다. 앞으로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계획대로 잘 추진되면 몇년 안에 새로 아파트가 들어설 것 아닙니까? 이 동네서 오래 사셨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요?

= 이 동네 서른한 집 중에서 우리가 제일 오래됐어요. 이사도 안가고 지금까지 사는 집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내가 고향이 월영동 만날고개 올라가는 데 거깁니다. 큰 당산나무 밑 동네인데 거기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거기보다 여기서 더 오래 살았습니다. 이 동네서 늙어간다 아닙니까?

지금 이 사업이 빨리 되었으면 하는 게 시작한 지가 벌써 십 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기록해 두는 것은 참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이걸 안해 두면 이 역사가 땅에 묻혀버리고 모른다니까요.

그러니까 옛날에 이런이런 게 있었다는 이게 시의 역사거든요. 나도 마산시청에서 삼십몇 년 근무 했습니다. 청소과, 세무과, 공보실 안가본 데가 없습니다.

또 중앙동 동서기부터 시작해서 교방동, 회원2동, 월영1동, 서성동, 저 구산면 면서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역사를 밝혀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앞으로 재개발이 잘 진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하천이 깨끗해져서 빨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송사리 노는 거는 한번 봐야 안되겠습니까?

= 그리 될 날이 오겠지요.

- 오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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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5. 00:00

한국100명산. 3. 최치원의 수양지 무학산

예상치 않았던 무학산 100명산 탐방 : 둘레길만 걷던 초보등산꾼들이라 원거리 원정일정을 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포항 내연산은 8월말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8월의 100명산 원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빼먹기를 쉽게하면 앞으로 애로사항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회가 닿으면 무학산이라도 오를 기회가 있다면 그 달의 건수는 채워야지 하는 생각에 원정기념 현수막을 넣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지난주에 회원 모두가 참석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잘되었다 싶어서 "오늘은 모처럼 모두 참석했는데 정상한번 가입시더"라고 의견을 내어서 100산중의 하나인 무학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학산 지명의 유래

무학산은 마산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본래 이름은 [경상도지리지]에 두척산(斗尺山)이라는 이름으도 등장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척산이 회원현에 있은데 봉우리에 위에 고운대가 있으며, 월영대에서 북쪽 5리에 있다고 하였다. 아시다시피 월영대는 신라시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이 대(臺)를 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며. 두척산의 고운대는 최치원선생이 수양지로 보고 있습니다.

'고운대'는 조선시대의 지도나 전통 시대의 문인들이 남긴 시에 종종 출현한 지명이다물론 이 명승처를 최치원이 직접 고운대라고 지칭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조선 초기 문인들이 전국에 산재한 고운대를 이야기하였고, 무학산의 고운대에 관해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그 지명의 연원 또한 월영대와 마찬가지로 유구하다 할 것이다, [무학산의 '학봉', 이제 '고운대'로 불러야 , 유장근교수]

즉, 무학산에서 현재 학봉이라 불리우는 고운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러나 두척산이 언제부터 무학산으로 불러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제시대부터로 산의 형세가 학이 춤추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1.팔각정에서 근심바위까지(9시 45 - 10시 30분) : 출발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습도가 높은게 마치 비가 못와서 짜증을 부리는 듯한 그런 날씨였습니다.  항상 오던 무학산이라 별 감동도 없이 오직 정상에서 사진하나 박겠다는 마음으로 올랐습니다. 계곡을 사이로 요리조리 걸어 오르다가, 약간 급한 경사를 앞두고 하천근처에 잠시 쉬기로 하였습니다. 나무데크 위에 마련된 의자는 한숨돌리기 좋은 휴게쉼터인 것 같았습니다. 습기에 몸이 땀과 더불어 촉촉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누가 이야기 했습니다. "정상까지 45분만에 올라갈 수 있다 하더라"라는 말도 않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산을 잘타는 누구누구 얘기고 우리는 1시간 반은 걸려야 된다"는 오고가는 얘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죽자고 1시간 이상은 올라야 정상에 도착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코스가 정상을 향한 가장 근거리 코스인 관계로 경사도 가장 심한 코스라 난코스임에는 틀림이 없는 ㄱ것 같았습니다.  두번째 쉰곳은 팔각정자가 있는 근심바위였습니다. 도심을 내려보니 안개비와 운무에 의해 말그대로 자욱한 안개속에였습니다.은 뿌연 상태였습니다. 숨고르기와 물 한모금을 마신후 다시 출발했습니다.(걱정바위 정자) : 시내를 잘 볼 수 있는 단골쉼터(시내전경) : 운무에 쌓인 마산시내

2.근심바위에서 정상까지(10시 40분 - 11시 20분) : 몸이 어느정도 풀려서인지 걷기는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10여분이 지나자 '1년계단'에 도착했습니다. 그냥 걷기 지루할까봐 1월 1일부터 12월 말일까지 적혀진 나무계단입니다. 계단을 오르기 한결 가뿐한 것 같았읍니다. 암튼 서마지기에 도착해서 다시 물 한모금하고 정상을 향하였다. 날씨가 꾸무리 한것이 비가 못와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읍습한 기후였습니다. 그럼에도 서마지기에서 무학산 정상으로 향하는 1년계단을 다시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꺼이! 꺼이! 정상에 다다르자, 이게 왠일입니까! 갑자기 시껀먼 하늘에서 짜증을 부리던 구름끼리 한바탕 나타전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쏴아 하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에서 기념촬영할려고 하던 차에 순식간에 쏟아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기념촬영은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비옷도 대충 걸친채 사진부터 한방 박았습니다. 쉴틈도 없이 하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100명산 세번째 산행은 우중에 짧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서 시내전경) 완전히 구름에 체포되어 있음(서마지기에서 봉화산방향) : 오히려 산중의 시야가 더 좋음(서마지기에서 정상방향) ; 이렇게 인적인 없었던 적은 없었다.(정상에서 비상훈련): 소나기공습에 우산과 비옷을 급히'')(정상기념촬영) : 비는 왔지만 표정은 엄청 좋읍니다.(다시 한컷) 무학산은 한국100명산에 해당됩니다.

3. 정상에서 서원곡입구까지(11시 30분 - 12시 20분) : 당초 계획은 우회하는 코스로 학봉을 통해 하산을 하려했으나 가장 단거리 코스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던 길로 다시 하산을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 도착하자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의 충격이 워낙 큰지라 모든 사람이 정자안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정자 안에서 비옷을 다시 정비하고 하산을 하였습니다. 모처럼 맞는 비로인해 기분이 몹시 상쾌했습니다. 비닐 우의는 걸쳤지만 바지와 신발은 빗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산에 오를때 피부를 끈적이게 했던 습한 기운을 소낙비가 앗아가는 듯 합니다. 갑자기 내린비로 주변의 나무와 바위도 한결 깨끗해 보입니다. 신록이 더욱 푸르러 보이고, 바위가 더욱 파란빛을 띠는 것 같습니다. 암튼 소나기로 인해 무학산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모든 사물을 그대로인데 괜히 보는 사람의 기분땜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심바위정자에서 만난 고교생) : 고3 청소년들인데 도시락까지 싸서''', 기특했습니다. 용마고학생이랍니다.(비에 젖은 등산로) : 물만난 대지와 나무들(물 만난 돌탑) : 바위의 열기가 식혀지는 것 같습니다.(자작히 젖은 낙엽들) : 낙엽을 보니 가을이 온 것 같기도 하고

- 내려 오는 길에 오를때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 건졌습니다. 죽은 나무에 새겨진 웃는 장승입니다. 아시는 분들오 있겠지만 창원에 사시는 분인데 주로 죽은나무에 나무 조각을 한다고 하는데, 창원 인근의 산에 주로 산행하면서 죽은 나무를 보아 두었다가 때를 봐서 조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무학산에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니 엄청 반가웠습니다. (웃는 장승모습) : 한그루 나무로 2개의 장승을 만드는게 보통 실력이 아닌것 같습니다. 특히 오른쪽 두상의 일부를 삐쭉하게 남겨둔 이유는?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를''''

- 일행 중에 한명은 그런 사람을 추천해서 상을 줘야 된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원곡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정체는 신들린 조각님이랍니다.(네이버에서 블로그명입니다.

암튼 별탈없이 100명산 3번째 등정은 성공리에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 참에 기념비 하나를 소개할 까 합니다. 서원곡 팔각정 주차장에서 팔각정으로 가는 초입 우측에 큰 바위위에 비석하나가 있답니다.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답니다. 언젠가 신경이 쓰여서 올라가 보니 최치원 선생의 후손들이 최치원선생을 기리는 기념비인데 시멘트로 제작되었으며, 건립시기는 1965년도로 되어있습니다. 의미있는 기념비인것 같았습니다. 무학산 오를때 시간이 되시면 한번 보시기 권합니다.

(큰바위 위에 외로이 선 비석)(비문) 건립시기가 정묘년이면 1987년 아님 1927년이고, 경주 후인 김무영씨가 적은 것 같으며, 내용은 고운 최치원 관련 내용인 것 같읍니다.

* 무학산 주변산들 : 무학산 (716미터)자락에 연해 있는 봉우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읍니다. 정상에서 북측으로 봉화산(262.9미터)이 있으며, 남측으로 대곡산(516.4미터), 만날고개에서 더 남측으로 내려가면 밤밭고개 아래쪽으로 청량산(323미터)까지 연결됩니다. 앞서 언급된 고운대(397미터)에서 동측으로 내려가면 환주산(추산공원)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밤밭고개로 향하는 도로로 인해서 청량산과 단절되어 있으며, 고운대에서 환주산과 연결되는 곳은 산복도로(합포고등학교 앞으로 산복도로가 개설되면서 산맥이 단절되어서 일주순환을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언젠가 이 두곳이 산행을 위한 종주코스를 위해 어떠한 형태로라도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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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kdaudrb 2013.09.25 21:16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우선 무학산이 100명산 탐방대 축하 드립니다 저의는 님들께서 소개한 죽은나무에 조각한 네이버에 신들린 조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삼식 2013.09.26 16:51 address edit & del

      반갑군요, 사이트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2. rkdaudrb 2013.10.14 20:23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비오는날 산행 멋져요
    비오날에는 운치도 있고 낭만도 있고 비를 맞는 기분이 좋아요
    창원에 정병산에 있는 장승도 올려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건 kbs 생생 투데이에 나온 장승 이네요 ㅋㅋ

2011. 3. 9. 00:00

만날고개의 옛길을 걷다


3월 5일, 오후 2시.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탐방대 열 다섯번째 길, 모두 스무사람 쯤 만났습니다.

오늘 탐방지는 만날고개.
만날재의 전설과 옛 주막, 아기무덤터와 계비, 일제기 군용지 표지석과 일본인 유지들의 사유지 경계석, 그리고 월영마을 옛 신당,,,,
무심코 지나쳤던 만날재에 끝도 없이 펼쳐진 역사의 향연에 일행은 몸을 맡겼습니다.

이 글은 그 중 옛날 월영리에서 만날재로 넘어갔던 오래된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만날재공원을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 올라가지만, 이 길이 뚫리기 전까지 만날재로 가는 유일한 길은 당산마을 한복판의 좁은 길이었습니다.
당산마을은 산복도로 윗쪽 마을 이름인데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어서 지으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당산마을은 옛날 월영리 제일 윗쪽 산 밑에 붙어있던 마을로 현재 경남대 뒤 산복도로 위쪽에 붙어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감천 넘어가는 사람들과 감천에서 마산포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목을 축였던 주막과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당산목인 수백년된 팽나무가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오래된 마을입니다.

낡고 좁고 오래된 옛길이지만 창신대학 실용미술과에서 길벽화를 장식해 놓아 길이 훤했습니다.





이 길은 옛날 월영리 사람들이 만날재(무학산)를 넘어 감천거쳐 내서로, 그리고 함안으로 다녔던 길입니다.
길이야 함안 아니라 서울까지도 이어지게 마련이지만 굳이 함안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월영리가 조계지였던 시절에 발행한 지도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이 지도의 일부입니다. 1907년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인데 이 지도에 대해서는 지난 1월 3일 이미 포스팅한바 있습니다.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옛 창원군청) 앞에서 만날고개로 올라오는 넓은 길이 이 좁은 골목과 연결되었는데 그 넓은 길에 함안신정(咸安新町)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길이 함안으로 이어진다는 뜻인지, 함안 쪽에서 볼 때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곳이 함안과 관련있다는 의미아니겠습니까.



이 길이 만날고개를 넘어 감천과 내서거쳐 함안으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 몇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 지도는 1916년 일본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 5만 '마산(군사극비)' 지도입니다.



1919년 일본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 1만 '마산' 지도입니다.



1926년 일본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5만 '마산(조선교통도)' 지도입니다.



1937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제작한 1/20만 '마산' 지도입니다.
함안까지 연결되는 길이 전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함안은 지금의 가야읍이 아니라 당시 읍소재지였던 함안읍입니다.




최근인 1990년대 지도도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지역의 위성사진을 통해 비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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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1.03.09 08:51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네요.
    몰랐던 사료지도를 보니 이 길이 참 중요한 길이었음을 알것 같습니다.
    지금은 현대길에 밀려 명맥만 유지하지만요. ㅎㅎ

  2. 옥가실 2011.03.09 18:19 address edit & del reply

    글을 읽어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좋은 자료가 참으로 많아요.

    차암... 빨간펜 한곳,

    원문에 산당마을이라고 썼는데, 제가 잘못 알려준 불찰입니다.
    당산 마을입니다.
    산복도로 건너기 바로 직전에 당산 경로당도 있더군요^^

2011. 1. 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일본인이 계획한 신마산의 모습>

-마산전도(馬山全圖)*-
1907년 / 청목항삼랑(靑木恒三郞) / 율원경포당(栗原耕浦堂) / 1 : 4,500 / / 일본국회도서관

 

 

한일병합 직전 시기의 신마산 조계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제목인「마산전도」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을 ‘신마산’ 혹은 그냥 ‘마산’이라고 불렀으며 원래부터 한국사람들이 살았던 원마산(마산포)을 ‘구마산’이라 불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마산 최초로 개설된 중앙에 있는 도로를 진해본통(鎭海本通)으로 표기하는 등 도로의 명칭을 일본식으로 지어 사용하고 있으며 조계지 주변의 산 이름까지 일화산(日和山), 영성둔산(影星屯山) 등 그들 멋대로 지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지도가 제작된 시기에는 아직 개설되지 않고 계획 단계에 있었던 도로까지 표시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구분을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자료와 비교 분석해보면 산수상통(山手上通)이라고 불렀던 현 제일여고 앞 도로 이북의 지역은 도로가 개설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범례로 토지경매 때 나눈 등급을 표시하여 무색의 토지를 1등지(一等地, A급지), 유색의 토지를 2등지(二等地, B급지)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이는 다른 자료의 구분과 일치합니다.

그런가하면 그 때까지 경매되지 않았던 토지도 상세히 구분했는데 이에 의하면 제일여고 앞 도로인 고운로 이북의 토지는 그 때까지 미경매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토지는 등급별로 일련번호를 붙여 놓았습니다.

지도 최상부의 지점은 현재의 만날고개로 연결되는 위치인데 이곳은 무학산 너머에 있는 감천마을과 연결되는 고개입니다.

그곳에「함안도(咸安道)」라는 도로명칭이 적혀있고 함안도 아래의 직선도로,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앞 도로가 「함안신정(咸安新町)」이라는 것을 보아 옛 월영리와 함안의 연결도로가 만날고개를 지나 감천-중리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월영동에서 걸어서 함안까지 간다면 그 길이 가장 빠를 겁니다.

조계지 역역 안에 있었던 세 개의 하천에 11개의 교량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 창원천(옛 마산시장 관사 앞)을 일화계(日和溪)로 불렀으며 신월천(깡통골목, 복개)을 신월계(新月溪), 월영천(경남대 앞 광장, 복개)은 월영계(月影溪)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창원천에는 7개의 다리가 있는데 아래로부터 신월교․무학교․마산교․반룡교․대사교(大使橋) 등 다섯 개의 다리에 명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월천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는데 아래로부터 창원교․완월교․웅천교였으며․왼쪽 월영천에 있는 한 개의 다리는 진해교였습니다.
진해교는
현재의 진동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 때만 해도 진동을 진해라 불렀기 때문에 진해교라고 한 것입니다.

일본인 전중 손(田中 遜)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4개의 콘크리트 교량은 그 시기와 위치를 보아 창원천에 있는 7개의 다리와 신월천의 3개 중 4개를 개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어느 다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중손은 일본궁내대신이었던 전중광현(田中光顯)의 아들입니다.
전중광현은 1906년 한황실 위문대사로 우리나라에 왔던 일본 고관으로 방문 당시 철도용지였던 마산 장군천 상류 일대 35만여 평을 100년 동안 농장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통감 이등박문과 임차계약을 하였습니다.
전중손은 바로 그 농장을 물려받은 자인데 그 농장이 월포원입니다.
전중손은 이 외에도 대규모의 가옥임대업과 건설업 및 수 백호의 소작인을 두고 농업경영을 하는 등 일제기에 마산을 호령했던 권력자이자 대부호였습니다.

함안신정(咸安新町)․본정(本町)․중정(中町)이라고 적힌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세 갈래 길이 개항 초기에 ‘마산의 긴좌(銀座)’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변화했던 도로입니다.

이 지도를 다른 사료들과 비교 검토해보면 매우 정밀하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방 이후 강점기가 진행되면서 개항 초기에 조계지내에 개설된 도로가 없어지거나 형태가 약간씩 바뀌었기 때문에 최초의 조계지 도시구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대단히 큰 지도입니다.

위 지도의 현재 모습이 아래 그림입니다. <<<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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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0 14: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11.01.10 16:57 신고 address edit & del

      오 기자, 반갑소.
      근황은 이야기 들었어요.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주세요.
      가족 모두 새해 좋은일 많이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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