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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9.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타박과 고문의 여독으로 49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정돈”이라는 1954년 4월의 이교재댁 방문 기사가 그렇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이보다 7년 뒤에 동일한 신문사에서 작성한 이교재의 추도식 관련 기사에는 “진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는 추도문을 전하기도 하였다.(「죽헌 이교재 열사, 32주기 추도회, 4월 17일」, 마산일보, 1961년 4월 1일자)

이보다 10여 년 뒤에도 변지섭은 “1931년 사명을 띠고 입국, 진주의 허만정, 달성의 문대효, 창녕의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事露하여 마산경찰서에 피검,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영면”하였다고 기술하였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8쪽. 그러나 문대효,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검되었다는 기술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각종 문건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의 사실을 과거에 소급하였기 때문이다. 이교재는 문대효나 성낙문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이 기술은 사실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교재는 위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채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설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망 직후에 나온 신문 보도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교재의 사망 직후 동아일보는 「이교재씨 영면」이라는 제목 아래 “신유년 통영 사건으로 6년간의 철창생활을 겪고 나온 후 이래 10수년간을 해내외로 다니며 많은 활동을 하던 斗山 이교재씨는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불행히 지난 12일에 씨의 고향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영영 이 세상을 이별하였다 한다.

유족으로는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고, 다만 80노모와 미망인 홍씨가 있을 뿐이라 한다”고 그의 부음을 전하였다.(「이교재씨 영면, 신유년통영사건으로 옥고 후 신음 중」,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자)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자택에서 세상을 이별”이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수년간 병으로 신음하였고, 마침내 악질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신유년 통영사건’이라거나 ‘6년간의 철창생활’은 잘못된 설명이다.

통영사건은 신유년(1921)이 아니라 1923년(임술)에 있었으며 감옥생활 역시 4년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교도소라든가 옥사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가족으로는 부인과 노모 외에 8살 된 딸이 있었으나, 이 역시 빠트렸다.

따라서 이 신문기사에는 세 가지 정도의 오류가 있지만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오류는 아니다.

이교재의 사망과 관련된 최초이자 당시의 기사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와병 중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은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해방 이후 삼진의 이교재 묘소를 참배하고 유족들을 만난 뒤의 글에 따르면, “과거 상해 체류시 본국으로 파견하여 운동하다가 옥중 고문을 받고 결국 그 여독으로 세상을 떠난 이교재 지사의 유가족을 방문, 위로” 하였다는 것이다.(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417쪽)

와병의 원인을 각각 악질과 고문의 여독으로 약간 달리 보았지만, 악질 역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종류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부산교도소 수감되었다거나 옥사하였다는 이야기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믿기 어렵다.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도 이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와병 중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그의 사망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정도로 경제 사정은 극히 어려웠다. 당시의 건물등기부에 따르면,(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교재의 집은 그의 사망 직후인 1933년 3월 20일에 馬山府 萬町(오늘날의 동성동, 필자)에 사는 川崎泰次(가와사키는 함안군의 일본인 토지소유 중 11,197평으로 전체 25,305평 중 약 44%를 차지한 지주였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122~123쪽)에게 4백엔에 저당 잡혔으나 빚을 갚지 못해 경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통영에 사는 朴喜鎣(박희형은 통영에 있는 하동집 박진영의 장손이고 통영군자금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성숙의 조카이다. 통영사연구회 회장 박형균의 증언에 따른다. 박형균은 박희영의 아들이다-2019년 4월 1일 인터뷰)이 이를 갚으면서 경매가 취하되었고, 최종적으로 그 집은 이교재의 모친인 金受室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김수실은 이교재의 모친이었다. 이교재의 손부인 조혜옥의 증언에 따른다-2019년 3월 27일 인터뷰)

이러한 어려움이 그의 유족으로 하여금 동대 마을을 떠나 도산 마을로 이주하게 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도산 마을을 방문한 김형윤은 ‘한두 섬의 저축이 있을 리 없는’ ‘불행한 혁명가’로 묘사하였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의 독립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초기의 독립운동에서 마지막 단계까지 초지일관 해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영역의 확대와 심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10년대 직후의 초기 단계에서 이교재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삼진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넘어서 진주지역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량이나 형명으로 본다면 단순 참가가 아닌 주도자의 역할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상해 망명 직후에 전개된 것으로, 주요 임무는 국내에 밀입국하여 군자금을 모으는데 진력한 일이었다.

통영에서 항일적 지사와 인척을 통해 군자금을 모으는 임무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간 이 지역에서 구축한 그의 조직 능력과 군자금 모금에 대한 그의 책임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임정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교재와 같이 헌신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임정이 1931년 9월에 시작된 중국 동북침략전쟁(만주사변)을 반침략전쟁의 중요한 기회로 삼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를 통해 광복을 도모하던 때에 국내에 파견되어 그에 호응하는 조직을 갖추면서 준비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1931년 11월 말 이후 입국시 휴대하고 들어온 9개의 문건은 임정의 광복계획과 그에 따른 이교재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휴대한 문서에 따르면 창녕·밀양·진주·달성 등 경상남북도 지역에 임정의 후원망이 있었고, 이교재는 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활용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임정 설립 직후 구축한 연통제나 교통국이 일제의 단속에 의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교재는 특파원으로서 이 과업을 수행하였으니, 임정의 국내연락망은 1930년대에도 여전히 살아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두 번째의 의미는 이교재가 그의 본거지이자 초기 활동무대였던 경남과 상해의 임정이라는 두 지역을 연계하면서 임정이 추구하는 조국광복이라는 광대한 목표를 지역이라는 맥락 속에서 실천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의미는 임정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조직화에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다.

해방 뒤에 김구가 이교재의 묘소에 와서 남긴 말은, 단순한 상찬을 넘어서 그의 업적을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었고, 임정문서를 휴대하고 입국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투고일 : 4월 22일 심사일 : 5월 17일 게재확정일 : 6월 3일

주제어 : 이교재, 창원 진전면 오서리, 경행재, 3.1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통영군

자금모금사건, 이교재임정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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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인 입학생을 보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192~198쪽)

이러한 시기에 임정에 도착한 이교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일원이 되었는지 역시 알 수는 없다. 앞서 말한 1922년의 기부금모집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때에도 임정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을 통해 볼 때, 이교재는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 모금이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겼을 정도로 임정의 요인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가 주도한 통영군자금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기관에서 작성한 두 종류의 재판기록과(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8428, 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대정 13년(1924),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075) 경남고등경찰부가 작성한 일지형식의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1923년 9월 21일자로 경남고등경찰부에서 작성한 기록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前敎員 李敎載가 上海假政府의 密命을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내로 들어와서 통영군 통영면 署町의 金宗元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던 중 체포되어 당국에 보내져 징역 2년에 처하였다”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慶尙南道警察部, 高等警察關係摘錄 –1919년~1935년-, 소화 11년, 39쪽)

이교재의 신분이 ‘전교원’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지만, 그의 활동 근거가 임정의 밀명이었고, 그 목적은 국내에 들어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는데 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이 통영이었고 그 대상이 김종원이었다는 것이다.

1923년에 통영지청에서 작성한 刑事事件簿에 따르면, 통영경찰서에서 ‘비현행범’으로 체포된 이교재의 죄목은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이었다. 구류일자는 대정 12년(1923년) 10월 4일, 검사에 이송된 날짜는 동년 10월 13일로서 ‘진주’로 표기되어 있다.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그날 진주교도소로의 이송이 결정된 것이다.

피고인의 본적과 직업, 그리고 연령은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농민, 이교재 37세’로 적혀 있다.

같이 체포된 인물로는 金宗元, 姜相烋, 朴性淑, 朴世洪, 李瓚根, 潘光閔 등 6명으로 그 신상과 죄목, 구류일자, 검찰이송여부 등은 <표 2>와 같다.

<표 2> 이교재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관련자(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에 의거하여 작성)

통영경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통영사건 관련자들의 죄명은 군자금 모금이 아니라 ‘증거인멸’이나 ‘범인은익’ 혹은 ‘동행취체령위반’ 등이었다.

모두 현행범이 아닌데다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명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10월 13일에 석방되었다. 이교재가 진주교도소로 간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을까?

김종원은 강상휴와 더불어 통영지역의 사회단체인 통영청년단의 창단멤버였다.(동아일보, 1921년 8월 27일자) 이 청년단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통영기독교청년회장을 지낸 박봉삼을 초대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순회강연과 교육, 계몽, 순회공연 등이었다. 말하자면 통영지역의 애국운동과 사회계몽 운동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11월 18일에는 회관을 신축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창립 당시에는 34명이던 회원이 3년여 만에 400여 명으로 증가한데다 그만큼 갖가지 활동을 한 덕택이었고, 3대 단장이던 임철규가 사재를 털어 회관을 신축하려던 참이었다.

이교재의 군자금 모집 사건은 바로 이 회관의 낙성 직전에 벌어졌던 것이다.

위의 명단에 올라있는 박성숙(朴性淑, 1900~1932)은 통영에서 하동집으로 알려진 부유 집안의 자제로서 일본 유학을 마친 뒤 귀향하여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고, 박세홍은 훈련을 담당하면서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박세홍은 1920년 3월 10일에 설립한 통영노동당의 회장이기도 하였다.(통영청년단에 대해서는 김상환, 「1920년대 통영지역 청년운동과 ‘김기정 징토운동’, 역사와 경계91, 2014.6, 191~229쪽과 정갑섭, 「통영청년단 1~3」, 한산신문1993년 7월 22-8월 5일. 일제시기 통영의 3.1운동에 대해서는 김상환, 일제시기 통영의 3.1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도서출판, 제일, 2005 참조)

사건부 기록에 박세홍은 학교 교사로 기재되어 있지만 통영합동노동조합에서 검사원으로도 일하고 있었다.

이 조합은 통영지역 노동조합의 연대체로서 1930년에 박세홍은 이 조합의 집행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566쪽)

이찬근(李瓚根, 1893~1950)의 이름도 올라 있다. 형사사건부에는 직업이 의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통영시 항남 1번가에 壽南醫院을 개설하였다. 1914년 6월 1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조선총독부 관보제548호 1914년 6월 1일 10면, 휘보-조사 및 보고-위생. 그의 주소는 용남군 동면 북문동으로 되어 있다.)

그의 경력을 보면 단순한 한의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 창간된 중외일보는 1928년에 주식회사의 형태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주주를 모집하였는데 마산의 이형재·구성전·옥기환 등과 더불어 통영의 이찬근도 5주를 투자하는 것으로 이에 참여하였다.(경성종로경찰서장 발신, 「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국사편찬위원회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1928년11월24일. htp:/db.history.go.kr/id/had_138_0720)

또한 이찬근은 통영지역에서 1920년대 말에 김두옥·최천 등과 더불어 동아일보사 통영지국장으로 거론되었으며,(김보한, 「김보한의 문화칼럼-진산 이찬근을 찾다」, 한산신문 2009년 9월 4일자) 1928년 3월 25일에 봉래좌에서 열린 신간회 통영지회 임시의장이기도 하였다.(통영시지 제1권, p.576. 설립준비위원으로 박세홍도 들어있다. 박세홍은 지회에서 조사연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진보적이며 독립운동에서 관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그는 통영수산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시와 글씨에 능해 통영출신의 시조 시인인 김상옥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 시기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당하였다-블루버드 블로그, 「통영별곡 51-초정 김상옥 거리를 아시나요? 4」 참조)

경찰의 기록에는 이교재가 김종원에게 군자금을 강요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죄로 판명되었다.

김종원은 형사사건부에 농민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鱈魚, 곧 대구잡이 사업가로서 통영에서 꽤나 이름난 수산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통영시지1, 518~519쪽)

또한 그는 통영의 3.1운동에서 사전 준비와 여론을 환기하던 시기의 주도 인물 19명 중 한사람이었다.(통영시지 1, 524쪽)

그러나 군자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박성숙일 것이다. 박성숙의 부친인 박진영(1853~1939)은 일제 시대에 통영에서 3대 부자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하동집의 주인이었다.

그의 부인인 李仁은 바로 이교재의 고모였다.(김상현, 「나의 삶 나의 통영- 박형균 하동집이 왜 하동집이냐 하면.」 인터넷 통영인뉴스( htp:/www.tyinnews.com/), 2019.2.21., 「박형균 –2 백석, 윤이상, 통영현악4중주단. 통영인뉴스2019.2.28. 성주이씨문열공파세포권지2.186. 109)

이교재의 외손자인 한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외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이교재는 통영으로 날아다니듯이 다녔다고 한다.(한철수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증언. 2017년 9월 8일 오후 마산상공회의소장실)

이 배경에는 이교재의 고모인 이인과 그의 아들인 박성숙 등이 통영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호인 이들이 독립운동에도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사망한 뒤 그의 집이 저당 잡혀 경매에 넘어갔을 때 400엔어치의 저당권을 사들여 이교재의 모친에게 되돌려준 것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249번지에 살던 朴喜鎣이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 주소는 박진영의 주소였다.)

또한 앞서 말한 대동청년단 멤버이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통영의 미곡상 서상호는 박성숙의 아내인 서말희의 오빠였다.

그가 통영에 자주 출입하면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씨네와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이 사건으로 인해 1923년 12월 20일에 끝난 제1심에서 제령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9월 21일에 경찰에 체포된 지 4개월만이었다.

제2심의 공소신청은 같은 해 12월 24일이었다. 대구의 복심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 취하로 종결되었고, 확정판결은 1924년 1월 24일이었다.(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CJA0016705.)

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에도 죄명은 ‘대정8년제령제7호 위반’으로, 형명과 형기란에는 징역 4년으로 기재되어 있다.(진전면 범죄인명부18번 참조.)

그렇다면 그는 1924년 1월 24일부터 다시 4년간의 징역생활에 들어갔으니, 1928년 1월 23일에 만기출옥하였을 것이다. 42살 때의 일이다.

이후 이교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다시 수감되었다는 말도 있다.

주형무소에서의 출옥 직후 상해로 귀환하였고 그곳에서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에 입국하는 도중에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는 것이다.(이현희,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 백산학보70, 2004.12, 1014쪽. 이 글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투사 명단에 이교재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전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물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기술은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2년간 복역하였다면 시기상으로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봉착한다.

1928년에 출옥하였고, 다시 1931년 말쯤 국내에 잠입하였던 사정을 감안하면 그 기간 동안 상해행과 감옥행을 모두 경험하여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국내로 들어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2년 형을 살았다면, 1931년말에 임정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서 새로운 임무를 떠맡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형을 살았다는 저간의 서술은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한 신뢰하기 어렵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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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1921년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갔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7쪽.)고 보았다.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상해로 망명한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1921년 출옥 후 혹은 1922년 4월 벌금형 이후 상해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기부금품취체규칙 위반으로 체포된 사실도 상해 임정과의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그의 첫 번째 상해행은 1920년도 말의 출옥 직후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왜 상해로 갔을까?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당시 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자는 부류와 외교와 정치력을 통해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부류가 있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6, 114~115쪽)

전자에 뜻을 둔 이들은 만주로, 후자는 상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교재가 상해를 택한 이유는 통상적으로 일찍부터 한인들이 집결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3.1운동 이후 망명자들이 급증하고 일본과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3월 하순경 최고기관 설립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설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8~51쪽)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진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맺은 인맥이나 단체를 통해 상해로 들어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해의 임정과 마산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조직은 국권회복단이나 대동청년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 등이 경북지방의 유림을 포섭하여 조직한 항일운동결사였다.

이 단체는 마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안확을 지부장으로, 李瀅宰·金璣成을 임원, 부원으로 이순상·배중세·변상태 등이 참여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경남대 경남지역문제연구소, 2004 참조)

이 중에서 일부 단원들이 4.3삼진의거 때 많은 군중을 동원하였고, 이후 상해 임정에도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79)

1909년 10월에 안희제·서상일·이원식·남형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형식의 대동청년단은 1945년까지 비밀결사로서 활동했기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는 대동청년단의 거점이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4쪽. 80) 떤 경우 대동청년단의 표면적인 조직활동으로서 국권회복단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0~163쪽)

마산과 삼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형재·배중세·변상태·김관재 등과(김봉열, 「마산 삼진의거의 3.1운동사적 고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239쪽) 윤상태·서상일·신상태·남형우·박영모·안희제·박중화 등도 양 단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임시의정원 구성에서도 의원 중 남형우를 비롯한 대동청년단 출신이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80쪽)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 및 국권회복단과 일련의 연락망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교재는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서상환과 서상호가 국권회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통영시사편찬위원회, 2018, 534쪽. 서상호는 이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박성숙의 처남이었다. 박성숙은 또 이교재의 내종형제였다.)

또한 이교재가 마지막으로 국내에 들어올 때 임정에서 전한 문건 중에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2인 모두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마산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에서 김관제는 변상태와 함께 각각 경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원의 의기를 책임지고 분담하였고,(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88쪽. 김관제는 경남 창원군 동면 무점리 51번지 출신으로 1920년 5월경에 있었던 의열단 폭탄 밀송 사건 관련자로 체포될 당시 김해군 김해면 남문통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高等警察要史,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5권 1920년 7월 31일 의열단원 곽재기 이성우 등 26명). 이후 김관제는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직의 주요 인물이었던 변상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는 책임을 맡았다.86) 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86)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 멤버 이순상(이순상은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11년 3월에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70쪽)은 상해에서 잠입한 高漢과 부산에서 접촉하기도 하였다.

권오봉의 동지였던 안희제는(이병철, 「다시 쓰는 인물독립운동사, 백산의 동지들 9, 성재 권오봉」, 부산일보1995년 1018일자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88~89)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고, 특히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남형우와 윤현진을 파견하였으며, 임정의 재정난이 심각할 때 누만의 자금을 조달하여 위기를 돌파하도록 도와준 사실도 있었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11~113쪽) 나아가 윤현진은 임시정부 원년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정원 의원에 경상도 대표 6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을 맡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임시정부사 자료집),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155쪽) 백산상회 자금 30만 원을 임정에 헌납하기도 하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윤현진)

상해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고한은 배중세와 안확과도 면식이 있었고, 결국 배중세와 함께 상해로 탈출하였다.(「이순상신문조서(제1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판 참조) 이 때 상해로 탈출한 사람으로 배중세 뿐만 아니라 남형우, 윤현진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권오봉, 안확, 변상태, 김관제, 안희제, 배중세, 남형우 등을 비롯한 삼진, 마산 및 경남지역과 상해를 연결하는 국권회복단 및 대동청년단이라는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상해행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는 당시 어떤 루트를 통해 상해로 갔을까.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상해 및 만주로의 망명 열기가 타올랐다. 이 당시 상해행 루트는 열차로 신의주까지 간 다음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의 단동(현 안동)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는 노정이었다.

임정에서는 1919년 7월 10일에 연통제를 설립하면서 국내와 임정의 연락망을 조직화하였다. 연통제란 임정과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연락망 조직으로 당시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설립하여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 77~81쪽.)

남편을 따라 상해로 망명한 정정화는 연통제와 뒤이어 만들어진 교통국을 통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잠입경로는 상해에서 아일랜드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안동으로 간 다음 그곳에 상주하는 통신원의 집에 머물고 그의 안내에 따라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오는 노정이었다.

신의주에서는 비밀연락 거점인 이세창 양복점을 접촉하였고, 그의 편의로 서울에 도착하면,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 박사를 찾아가 이곳에서 약 20일 동안 머물며 임정에서 지시한 사람을 만나고 자금을 모은 다음, 위의 귀환 코스를 거꾸로 되짚어 가며 상해로 귀환하였다.(한시준, 「정정화의 생애와 독립운동」, 사학지 47, 2013.12, 137~141쪽)

이교재도 이른바 ‘정정화루트’라고 부를 수 있는 코스를 따라 상해로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위 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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