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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숙3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 2020. 3. 9.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 2020. 2. 3.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 2020.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