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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근거지로 획정하여 우리 국민들의 가옥을 철거하게 하고 전답을 점령하였다. 광무 8년 9월에 그들은 소위 해군 방위대 본부를 거제군 송진포에 두고 우리 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일본 가근거지(假根據地) 방비대 군령을 공포(광무 8년 9월 27일 감시 보고 제58호에 의거)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에 제재를 가하였다. 방비대 군령 대일본 해군 방비대 사령관이 군대를 안전케 보지(保持)함을 위하여 각하(刻下)에 긴급한 좌개군령(左開軍令)을 제정하여 지실(知悉)게 하니 이등(爾等).. 2017. 1. 30.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2011. 11.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2) - 개항기 사람 손 닿기 전의 신마산 옛 모습 1899년 / 네델란드인 스태든으로 추정 / 각국정부 / 막대추정 / 군산 마산포 성진 각국조계장정 / 규장각 이 지도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국 대표들이 맺은「군산․마산포․성진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된 설계도면입니다. 개항기 마산관련 자료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지도로 근대적인 측량기법으로 작성된 마산시내 최초의 지형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등고선으로 표시된 지도라 지형의 고저(高低)와 기복(起伏)을 잘 알 수 있으며 해안의 간조선과 만조선 그리고 하천까지, 사람 손이 닿기 전의 조계지(신마산) 옛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있는 자료입니다. 등고선의 단위(고저차)가 표기되지 않아 아쉽습니다만 현재의 지형과 비교해보면 등고선의 고저차가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2010. 9.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1899년 5월1일, 마산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항'이라는 이름으로 인근 신월리와 월영리(현, 신월동과 월영동)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이 도시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조계지'의 위치는 마산포의 남쪽 약 2km 거리의 해안이었습니다. 개항은 긴 세월 동안 마산사람들 삶의 터전이었던 마산포의 도시구조에도 결정적인 변화와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마산포(원마산)의 모든 것들은 개항지인 소위 ‘신마산’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됩니다. 마산포 개항은 1898년 5월 26일 의정부 회의에서 찬성 7표 반대 3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사흘 뒤인 5월 29일, 대한제국 외부대신이 마산포․군산․성진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開市)가 결정되었음을 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 중 평양은 연.. 2010.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