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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오래된 사진 두 장

by 허정도 2009. 12. 8.


삼광청주의 일제기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마산에는 근대산업유산들이 제법 남아 있다.

유산이라 말할 정도가 아니라도 옛 사진에 나타난 과거의 모습과 현재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라져버린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자료이긴 하지만 아직 못 본 분들을 위해 마산의 옛 사진 두 장을 소개한다.

첫째 자료는 1910년 경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의 어느 시기 마산 전경사진이다.

                <맨 위가 일제기, 가운데는 10년 전, 아래는 최근 사진>

이 사진을 두고 개항기 마산사진이라고 소개한 곳도 있으나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이유는 사진에 나타난 시가지 형태다.
일본인들이 스스로 지칭한 소위 신마산이 이미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로의 개설 상태가 개항기를 훨씬 지난 1910년-1920년대 초반 경 어느 시기 임을 알 수 있다.

돝섬과 오른쪽 이시미곶, 그리고 건너보이는 산의 능선과 해안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차분하고 아름답다.
이에 반해 최근 10-20년 동안 지어진 들쑥날쑥한 건물들이 얼마나 주변의 자연환경과 부조화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시미곶은 마산MBC송신소 자리다. ‘이시미끝발’이라고도 부른다. ‘이시미’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전설속의 구렁이 ‘이무기’의 방언이다.
이곳 지형이 마치 돼지(돝섬, 猪島)를 삼키려 접근하는 ‘이무기’의 모습과 비슷하다하여 붙인 지명이라고 전한다.
어떤가?
‘이시미’가 돼지(돝섬)를 먹으려고 서서히 물 위를 헤엄쳐 다가가는 것 같은가?


둘째 자료는 1910년대 중반 경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두월동 통술거리(쿄마찌, 京町) 남쪽 입구 사진이다.

<맨 위가 일제기 / 가운데는 10여년 전 / 아래는 최근, 빠른 속도로 낡아져간다>

두월동 통술거리(쿄마찌)는 당시 일본인들이 활거 했던 신마산 중심거리였다.
나무로 된 전봇대와 일본사람들이 반룡교라 불렀던 월남교의 난간이 뚜렷이 보인다. 보행자도 꽤 많다.
사진의 주인공 격인 오른쪽 건물은 마산시 두월동 2가 7-4번지 터로 모서리 땅이라 당시에는 상당한 요지였을 것이다.
70년대에는 2층이 제법 손님이 많았던 중국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직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언제 철거될지 시간을 다투고 있다.
일제기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상업용 건물인데 살려볼 길은 없을까?

<반룡교에 얽힌 이야기 하나>

이 다리는 일본인 전중손(田中孫)이 한일병합 이전 마산에 설치한 4개의 콘크리트 교량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쓴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의 기록을 참고한 추정이다.

전중손은 일본궁내대신이었던 전중광현(田中光顯)의 아들이다.
전중광현은 1906년 한황실 위문대사(韓皇室 慰問大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당시 철도용지였던 마산 장군천 상류 완월동 일대 35만여 평을 100년 동안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통감 이등박문과 임차계약을 했다.
경술국치 4년 전에 이미 '100년간 사용' 운운하는 이 따위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으니 '일제강점기 36년'은 순진한 계산법인 것 같다.
사실상 영원히 제것으로 하려는 꿍심이었다.

전중손은 아비로 부터 이 농장을 받고, 농장 이름은 ‘월포원’으로 지었다.
장군동의 장장군 묘가 월포원 내에 있었다고 하니 시내에 인접한 좋은 위치였다.
전중손은 대규모의 가옥임대업과 건설업을 했고, 수 백호의 소작인을 두고 농업경영을 하는 등 일제기 마산의 대부호였다.
1908년 5월 발족한 마산상업회의소 발기인 중 한 명으로 기록된 것 외에도 일제기 마산기록물 도처에 전중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갑부에
일본제국의 궁내대신 아들이었으니 당시 마산에서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