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09. 11. 23. 06:00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 세 번째 도시 탐방에 나섰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모두 30여 명이었다.
평안안과 건너 편 창동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처음 머문 곳이 마산창,
시간은 250년 전 영조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
마산포는 고려시대 조창이었던 석두창과 고려 말 몽고군의 일본정벌 시도로 북적인 적도 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용한 포구였다.
마산포에 다시 사람이 모인 것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위한 조창, 즉 마산창(馬山倉) 때문이었다.

조용했던 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정기시장이 섰고, 전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몰려왔다. 조창과 관련있는 관원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도 마산포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과 마산포 인근주민들의 왕래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민가가 들어섰다.
동성·중성·오산·서성·성산·성호 등 지금도 동명으로 사용되는 6개리가 그 때 형성되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다.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마산창과 유정당〉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경남지역 두 조창 중 하나다.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우편물취급소로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이다.

 
<마산창이 있었던 시기의 위치도 / 제일은행 자리에 유정당이 앉아 있었고 남성동 성당과 이프 등이 있던 곳은 해안공지, 남성동우체국 자리는 바다였다>


마산창의 본당은 「유정당(惟正堂)」이라 불렀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두 글이 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다. 김이건의 詩 중 양창(兩倉) 혹은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한다.


           
漕倉 惟正堂                朴師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漕船歌                    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웅장했고 시공 수준이 높아 섬세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니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복원도에 의하면
유정당은 현재의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고 마산창의 정문은 현 중화요리점 북경성 자리, 거기서부터 남성동 성당까지는 해변공지, 남성동우체국 부지가 서굴강 즉 바다였으니 당연히 마산 앞바다가 보였을 것.
기가 막히는 그림이다.

아쉬운 것은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창부지는 1910년대 초 일본인들에 의해 세 개의 블록으로 나누어지면서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
유정당은 그시기에 헐렸다. 지어진지 150년 후의 일이다.
1918년,
그 자리에는 벽돌조 1층 근대식 건물의 조선식산은행이 들어섰고 이 건물은 현재의 건물을 짓기까지 사용되었다.
지금의 큰크리트조 제일은행 건물은 1970년대에 지었다.


 <위는 유정당 / 가운데는 1918년 건축한 조선식산은행 / 아래는 현 제일은행>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쓴 『마산항지』에 의하면 개항 직후인 20세기 초,
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이 많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현재 사용하는 창동이라는 지명은 해방 후에 생겼는데 조창과 관련한 송덕비로 추정되는 이 석탑들 때문에 일제기에는 이곳을 석정(石町)이라 불렀다.

마산창에서는 8개 읍, 즉 창원·함안·칠원·진해(지금의 진동)·거제·웅천·의령 동북면·고성 동남면에서 보내온 대동미를 수봉(收捧)하였다.
모두 9,215석(石) 5두(斗)였다.
초 봄에 마산포를 출발한 조운선은 거제 견내량 → 남해 노량 → 전라도 영암 갈두포 → 진도 벽파정 → 무안 탑성도 → 영광 법성포 → 만경 군산포 → 충청도 태안 서근포 → 보령 난지포 → 경기도 강화 이고지포 →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6월 하순 경 도착하여 임금께 세곡을 바쳤다.

사용된 조선은 판선(板船)이었고, 조세징수와 감독을 관장한 도차원(都差員)은 창원부사,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은 구산첨사였다.

조선(漕船)이 떠날 때는 풍악을 울리고 선원들에게 술을 대접했으며 대포를 쏘아 장도(壯途)를 축하했다.
그 축하의 자리가 지금의 남성동성당 터 정도 아니었을까?

                                 <매립이전 마산포의 위치도 >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올드시티(Old City)의 정체성과 한 도시공간에 녹아 있는 역사와 문화의 말 없는 몸짓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탐방이었다.

늦가을 토요일 오후,
무심한 길과 표정 없는 건물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그것들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끝>


                <부림시장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함께 '찰칵'>

Trackback 0 Comment 11
  1. 천부인권 2009.11.23 07:18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은 옛것을 뜨올릴 수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창원시는 그런 그림 자체를 떠올리기가 힘듭니다.

    개발이란 이름은 사람의 추억을 파괴합니다.

    • 허정도 2009.11.23 08:37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역사문화 자산은 마산이 많은 편이죠.

  2. 유림 2009.11.23 08:57 address edit & del reply

    역시 선배님 이시네요
    제 글에 조금 엮어 두겠어요

    반가웠어요

    북마산 탐방에 오실거죠?
    선배님 이야기 듣고 싶네요

    • 허정도 2009.11.23 10:59 address edit & del

      즐거웠습니다.
      북마산 탐방, 당연히 참석해야죠.

  3. 林馬 2009.11.23 19:41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대단한 발견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요?
    헐고 부수어 새로운 도시를 만들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자산을 찿아 보존하여 역사성을 자랑으로 여기며
    관광자원으로 삼는 것이 더 나은 지역사랑이 될것이요.
    시민이 먹고 사는데도 더 기여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모델을 어제 벌교와 순천만을 둘러보고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 왔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08:20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늦가을 순천만, 환상적이죠?
      매립해 산업단지 만들려 했을 때 시민들이 힘을 합해 살려놓은 갯벌, 지금은 순천의 보물단지가 된 것으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4. 김정수 2009.11.23 22:57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대단한 마산의 재발견입니다.
    탐방대에 회원가입해놓고 한번도 못갔네요.
    그날 은행나무단풍을 찍고 있었지요.
    이 앞주도 그랬고...
    12월에는 시간내서 가봐야겠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08:21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도 계획되어 있다니 함께 걸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5. 이은진 2009.11.24 13:00 address edit & del reply

    지도와 같이 놓으니,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 프린트 해둘려고 하니,
    하는 방식이 없군요.
    아쉽습니다.

    요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는데
    그저 그리스 부근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인데
    전세계의 사람들이 읽고
    관광을 가고는 하는군요.
    우리와 지형이 비슷한 섬이 많고 해안이 복잡한 곳에서
    우리도 발굴하면 많은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17:12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프린트해서 드리겠습니다.
      올드시티의 장점을 살린다면 재미있는 결과가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게 참 많은 도시입니다.

  6. 김판균 2010.01.07 12:09 address edit & del reply

    무학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산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가진 도시라는걸 느낍니다.
    강과 바다가 접하며, 삼면이 산을 이루고, 바다엔 돝섬이 파도를 막아주니...

    저의 어릴적 기억으론 마산이 전국 두번째가는 어시장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마산포구엔 수백척의 배들이 정박을 하고, 진해,거제 외 남해안일대 고깃배들이
    수없이 드나들던 곳...청과시장이 같이 있어 창원,진동,함안 외 지역의 농산물이 전부
    마산으로 모였던 그런 도시가 마산인데...
    어쩌다가...지금의 마산으로!!!!!!!!!!!!!!!!!!
    도시 이야기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김형윤의 <삼진기행> 4 / 1954년 4월 17일 (토)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4 이야기는 본선(本線)에서 조금 지났지만은 이교재 선생을 검거한 이만갑이라는 자(者)는 어떠한 자인가를 말 안할 수 없다. 기자(김형윤 선생 자신)와 이만갑은 (지금은 일반..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lsquo;벼랑&rsquo;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middot;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lsquo;H 생&rsquo;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

총독에게 폭탄 던진 65세 강우규 의사

부끄러웠던 그날 저녁 지난 9월 19일 옛 서울 역 건물에서 열린 &lsquo;대한민국 건축문화제&rsquo;에 갔다가 역 광장에서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동상을 처음 보았다. 세운지 오래되었겠지만 서울 갈 일이 ..

재생에너지만 사용하는 구글과 애플

탈원전 정책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탈핵경남시민행동 공동대표 박종권 지난 9월 3일 창원시정연구원과 창원상공회의소는 &lsquo;정부 에너지 정책 변화와 지역 경제 세미나&rsquo;를 개최해 원전 산업이 살아 있는 상태..

2003년생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의 외침

어른들, 언제까지 돈타령만 할 건가? 최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2003년생 소녀 그레타 툰베리에 대한 이야깁니다.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9월 23일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연설자로 나섰습니다. ..

탈원전 정책은 유지되어야 한다

에너지전환은 전 세계 추세, 새 원전 건설은 결코 안돼 요즘 창원 경제가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어렵고 260 여개 원전 관련업체의 생존이 위태롭다고 한다. 창원시정연구원은 탈석탄.탈원전 등 정부 에너지 정책이 급변하면서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기후위기, 시간이 없습니다"

"기후위기, 시간이 없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2014년 9월 24일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담에 모인 세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 기후변..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7 / 보테로의 도시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 1932~ ) 일정 중 틈을 내 메데진 사람들의 자부심 미술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를 감상했다. 보테로(Fernando Botero)는 콜롬비아의 화가..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6 / 국제 시(詩) 축제

아래의 글은 도시연구자 박용남 선생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시(詩)가 도시를 살릴 수 있을까? 시인(혹은 시)을 매개로 개최되는 축제는 국내에도 많다. 축제 분위기는 대부분 서정적이다. 하지만 메데진의 &lsquo;국제 시(詩..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5 / 빈민은행 Bancuadra

이 글은 도시연구자 박용남 선생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ldquo;어느 누구도 그들이 사는 곳 때문에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거절당해서는 안 된다.&rdquo; 이 슬로건으로 하층민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