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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by 허정도 2009. 11. 9.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다. 지금까지 제기된 주장들을 모았다.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고 하였다.

이 주장은『마산시사』를 비롯한 관찬자료와 마산과 관련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산의 지명 기원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에서 마산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근거 없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한 일본지식인이 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조선운송주식회사가 펴낸『조선항만지사정』에서는 마산지명의 기원에 대해
‘조선 제18대 현종(1660년-1674년 재위) 때부터 마산포라고 칭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현종의 재위기 이전에 이미 마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마산이란 용어가 등장한다며 그 기원을 주장한 학자도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25년(1530년)보다 10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내상조에
‘(경상)우도내상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인 마산포와 4리 317보 떨어져있다 - 右道內廂 在昌原府 去海口馬山浦 四里三百十七步所屬’ 라는 마산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세종10년(1428년) 8월 기록에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 (그 당시 마산만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는 마산포 기록이 있으니 이 주장도 타당성이 없다.

음차현상으로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하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대왕 편>


몇 년 전에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합포에 진주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박희윤의 주장이다.
그는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합포(마산일대의 당시 지명)에 진주할 때,
 
‘산호동 지역 바냇들에 몽고군의 목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로 인해 「용마산」「큰 말굿」「작은 말죽통」 등의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용마산 아래에 있는 포구(浦口)라는 의미와 일본원정당시 말들을 실어 나르던 포구(浦口)라는 의미에서 「마산포」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시기를 고려후기로 추측했다.

박희윤의 주장대로라면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이 곳 합포의 자산성에 정동행성을 둔 것이 1274년이고, 두 번째 원정이 128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이 더된 시기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600여 년 전에 간행된 사료에 마산이란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앞의 주장들처럼 시기적으로 오류가 있지는 않다.

확인 되지도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마산’ 지명의 정확한 기원은 무엇일까?
이 오래된 지명은 언제 무슨 사연을 담고 만들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