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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도시이야기

할아버지의 위험한 선택, 그 까닭은?

by 허정도 2009. 12. 22.

이 할아버지는 왜 도로 한가운데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실까요?

찬바람이 쏟아지는 겨울 오후,
이 할아버지는 어째서 산복도로 위험한 내리막 길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실까요?


       <이 할아버지는 왜 이 위험한 찻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실까요?>

며칠 전 차를 타고 마산 산복도로를 지나가다 황당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마산여중 앞에서 산복도로를 타고 석전동 네거리로 가자면 육교가 나옵니다.

그 육교 지나면 내리막이 시작되면서 길이 왼쪽으로 급하게 휘어지는데 바로 그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차가 왼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갑자기 눈앞에 웬 노인 한 분이 찻길 한복판에서 짐이 실린 자전거를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참 아찔한 장면이었습니다.
남루한 차림은 아니었지만 넉넉해보이지도 않는, 도시에서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였습니다.

하도 상황이 황당해서 운전을 하던 친구에게 차를 천천히 몰게 하고 자전거 뒤를 따라 내려왔습니다.

한 가지 짧은 의문이 스쳤습니다.
‘저 할아버지는 왜 찻길로 들어왔을까? 이 위험한 길로’

그런데 이 할아버지,
석전 네거리에 가서는 교통법도 아랑곳 않고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건너가시면서, 고개를 뒤로 젖혀 육교 쪽을 올려다보고는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고함치듯 말했습니다.
왼팔로는 자전거 핸들을 잡고 오른 팔을 들어 어느 한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육교 위에서도 짧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도 어이없는 상황이라 주의를 기우려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어∼이, 이쪽이야, 이쪽, 이쪽으로 와아∼”

그 말을 듣자 상황이해가 되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내외분이 어디론가 가시는데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끌고 찻길로, 할머니는 육교를 이용해 건너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육교 위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혹시 할머니께서 다른 길로 갈까봐 큰 소리로 길을 잡아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석전 네거리 육교가 ㄷ자형으로 조금 복잡하거든요.

할머니가 방향을 바로 잡은 것을 확인한 할아버지는 태연히 석전동 네거리를 자동차와 섞여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갔습니다.

         <석전 네거리를 대각선 방향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시는 할아버지>

       <석전 네거리 육교 / 횡단보도가 없어서 자전거로는 건너갈 수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셨다>

상황이 끝나자 곧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림의 A지점 어딘가에서 B지점 어딘가로 이동하시는 중이었고, 할아버지는 자전거에 짐을 싣고 가야했던 겁니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저렇게 위험한 선택을 했을 때는 뭔가 사정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산복도로에는 걷는 사람들을 위한 보도(푸른색 길)가 설치되어 있거든요.

궁금한 것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 때문에, 다음 날 그곳을 지나면서 잠시 차를 세워놓고 주변정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뿔싸!
왜 그 할아버지께서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산복도로 내리막 위험한 길(붉은색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았습니다.

보도가 있었지만 자전거는 다닐 수 없었습니다. 계단이 있었습니다.
한 두 단이면 모를까 아홉 단이었고 경사도 급했습니다.
도저히 노인 힘으로는 자전거를 이동시킬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를 위험한 찻길로 내쫓은 아홉개의 계단>

만약 두 분이 보도를 따라 함께 걸으려했다면 노란색 길을 따라 삥 둘러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길도 마지막 점선 부분에서는 무단횡단을 해야 합니다.

석전 네거리에는 육교만 있지 횡단보도가 없거든요.

도로 사정이 이러니,
할머니는 파란 색 보도를 따라 걷게 하고 본인은 위험한 길을 택했던 겁니다. 할아버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할아버지를 위험한 찻길로 내몬 것도, 도로교통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게 한 것도, 바로 이 도시였습니다.

정말 황당하고 아찔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길은 선(線)입니다.
줄과 같은 것입니다.

지상 최고의 고속도로라도 중간이 끊기면 이미 길이 아니고, 제아무리 아름다운 숲길이라도 이어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길어 끊어졌다는 것은 낚싯줄, 두레박줄, 연줄이 끊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린이니, 녹색이니 온갖 포장으로 요란한 ‘드림베이 마산’ 한 복판에서 일어난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네거리 한복판에서 육교 위에 계신 할머니에게 팔을 흔들며 큰소리로 길을 잡아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모든 도시계획의 시작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편하게 즐겁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도시계획의 완성’ 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를 두고 ‘삶을 담는 그릇’ 이라 부른다고. <<<